반 다이크와 요르단스가 발견한 인간의 이중성
바로크 시대, 회화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루벤스에게는 두 명의 뛰어난 제자가 있었다. 플랑드르 출신의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와 요르단스(Jacob Jordaens, 1593∼1678)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이탈리아 바로크 미술을 받아들이면서 스승의 생동감 넘치는 인물 표현과 밝고 조화로운 색채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두 화가는 이탈리아 미술과 루벤스의 화풍을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기 다른 자신의 개성을 펼쳐나갔다. 반 다이크는 자연스럽고 세련된 귀족 초상화로 명성을 쌓았고, 요르단스는 신화와 종교적인 이야기를 풍속화처럼 표현하는 특유의 화풍을 완성했다. 그렇게 방향은 달랐지만 두 화가는 모두 플랑드르 회화의 전통을 따라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실제적인 미술'에 다가갔다.
1618년, 19살의 나이로 안트베르펜 화가 길드로부터 장인으로 인정받은 반 다이크는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며 스승에 버금가는 화가로 성장하게 된다. 그가 ‘루벤스 회사’에 머물렀던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제작된 루벤스의 그림 중에는 반 다이크의 손을 거친 것이 하도 많아서 누가 어디를 그렸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스승의 든든한 협력자였던 반 다이크는 당시의 유행을 따라 1620년에 이탈리아로 떠나게 된다. <체포되는 그리스도>[그림 1]는 그 무렵에 반 다이크가 루벤스에게 선물한 것으로 루벤스는 이 그림을 너무나도 좋아해서 늘 식당 벽난로에 걸어두고 바라보았다고 한다.
이 그림에서 반 다이크는 빛과 어둠을 이용하는 카라바조(Caravaggio, 1573~1610)의 기법과 사물의 표면에 생기를 더하는 루벤스의 붓질을 잘 종합하면서 매우 극적인 화면을 만들어 냈다.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몰려드는 무리는 어지러이 움직이고, 다가올 수난을 예감한 그리스도는 고요하게 서 있다. 유다는 체포하라는 신호로 약속된 입맞춤을 하기 위해 스승의 손을 꼭 잡은 채 예수에게 다가선다. 어둠에 깊게 잠겨 있는 유다의 얼굴과 횃불을 받아 밝게 빛나는 예수의 얼굴이 대조를 이룬다. 혼란과 고요,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는 루벤스 화실에서 익힌 바로크 미술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반 다이크는 스승보다 한층 부드러운 색조를 사용하면서 인물의 표정을 더 섬세하게 표현했다. 예수의 얼굴을 들어다 보면 성인의 초탈한 표정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체념과 제자에 대한 연민, 그리고 배신자를 보는 착잡함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이 보인다.
초상화는 섬세한 심리묘사에 탁월한 반 다이크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줄 수 있는 장르였다. 당시의 초상화는 일정한 공식이 있었다. 왕과 귀족 들은 대개 갑옷을 입고 기사처럼 말을 타고 있거나, 격식을 갖춘 화려한 옷을 입고 품격 있는 실내에 머물러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런 설정들이 인물의 힘과 권위를 드러낼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반 다이크는 이런 초상화의 공식들을 깨고 연극적인 설정을 바탕으로 꽃이나 지팡이 같은 사물을 들고 야외 배경과 어우러진 다채로운 인물화를 그려냈다. [그림 2] 그의 인물상들은 대부분 마르고 키가 크게 그려졌는데, 그로 인해 예민하고 연약하면서도 어딘가 기품 있어 보였다.
이런 반 다이크의 초상화를 좋아한 사람 중에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절대왕정을 꿈꾸었던 영국의 황제 찰스 1세(Charles I, 1600~1649)도 있었다. 왕의 모습을 돋보이게 해 줄 이미지를 원했던 황제에게 반 다이크는 가장 적합한 화가였다. 찰스 1세는 반 다이크를 궁정 수석화가로 임명함과 동시에 기사 작위를 수여하여 곁에 두었다. 그로 인해 반 다이크는 자기 생의 주요 작품들을 영국에 남겼고, 플랑드르 출신임에도 영국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로 꼽히게 된다.
<사냥복 차림의 찰스 1세>[그림 3]는 사냥을 나갔던 왕이 잠시 말에서 내려 우연히 화가를 바라보는 순간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그림 속 황제는 격식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왕관도 쓰지 않았고 왕홀도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인물은 충분히 돋보이며 왕처럼 보인다. 수행원들과 그가 타고 온 말은 어둠에 묻혀 있지만 왕은 신의 선택을 받은 것처럼 밝은 빛 속에 전신을 드러내고 서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왕은 수행원보다 앞에 서있기 때문에 훨씬 키가 커 보이고 나뭇가지는 닫집처럼 왕을 감싸며 그의 위치를 돋보이게 해 준다. 뿐만 아니라 밝은 상의와 붉은 바지의 조합은 시선을 강하게 끌어당기고, 왕의 표정은 어딘가 산만해 보이는 수행원들의 표정과 달리 당당하면서도 지적이고 우수에 젖어 있다. 반 다이크는 이렇게 치밀한 구성을 통해 왕의 '일상적인 모습'을 '가장 왕다운 모습'으로 만들어냈다.
반 다이크의 마법같은 붓질로 찰스 1세는 캔버스 안에서 최고의 왕으로 빛났다. 하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못했다. 1642년에 청교도 혁명이 시작되었고, 무리한 내전을 이끈 찰스 1세는 1649년에 결국 실각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한편 반 다이크의 생은 그보다 짧았다. 그는 초상화의 새 지평을 열었으나 안타깝게도 1641년에 마흔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스승인 루벤스가 죽은 지 불과 1년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다.
루벤스와 반 다이크 이후 플랑드르 미술을 대표한 인물은 요르단스였다. 그는 고향인 안트베르펜을 거의 떠난 적이 없는 매우 토속적인 화가였다. 그러나 고전 미술과 이탈리아 미술을 총 망라한 박물관과 같았던 루벤스의 화실은 그에게 이탈리아 유학에 비견되는 가르침을 주었다. 그중에 카라바조의 현실적인 사실주의와 명암법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요르단스는 스승의 화실에서 배운 지식과 플랑드르 특유의 풍속화적인 사실주의를 종합하여 독특한 그림 세계를 완성해 갔다.
<왕이 마신다>[그림 4]에서 사람들은 좁은 방에 모여 앉아 흥겹게 잔치를 벌인다. 창밖에서 밝은 빛이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대낮부터 거나하게 취해 왁자지껄 떠들어 대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거나하게 취한 이유는 이 날이 주의 공현 대축일(동방박사 세 사람이 아기 예수를 찾아와 그가 메시아임을 알려준 사건을 기념하는 날, 1월 6일)이기 때문이다. 플랑드르에서는 주의 공현 대축일이면 작은 인형이 숨겨져 있는 커다란 공현절 기념 케이크(epiphany cake)를 나눠 먹는 풍습이 있었다. 이때 자신의 케이크 조각에서 인형을 발견한 사람은 그날의 왕이 되었는데 그가 ‘왕이 마신다’라고 선창을 하면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함께 축배를 들었다. 요르단스는 <왕이 마신다>에서 좁은 방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흥겹게 잔치를 즐기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폭음과 폭식을 경계하라'는 교훈적인 메시지를 넌지시 집어넣었다. 열띤 분위기 속에서 방은 어지러워지고, 사람들은 서서히 감정이 격해지고 심지어 한 남자는 몸을 숙여 속을 게워낸다. 이들은 분명 선을 넘었다.
요르단스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감정의 과잉, 화면에 흐르는 생동감, 방 안을 관통하는 빛 등은 바로크 미술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 속에서 고전적인 질서와 격식은 사라지고 상식적인 궤도에서 벗어난 인물들이 얼굴을 내민다. 이는 반 다이크 초상화에 등장하는 귀족들의 모습에서도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이다. 궁정의 세련됨이 배어있는 반 다이크의 귀족들은 일상적인 편안함 속에서 차갑고 불안한 내면을 드러낸다. 이 둘은 매우 다른 것 같지만 요르단스가 표현한 질박하고 토속적인 서민들이나 반 다이크가 그린 고상한 귀족들이나 이중적인 건 매한가지다. 술과 웃음에 취해 먹고 마셔대다가 정신을 잃고,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듯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지만 실은 우울한 인간. 이처럼 어리석고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이 반 다이크와 요르단스가 보여준 실제 세계였다. 바로크의 빛이 어둠을 드러내는 것처럼, 두 화가는 인간에게 덧씌워진 이상화된 관념을 걷어내고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백일하에 드러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