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푸생의 "영웅적 풍경"과 클로드 로랭의 "그림 같은 풍경"
전 유럽에 바로크 예술이 꽃피던 17세기에 프랑스에서는 예외적으로 고전주의 양식이 자리 잡았다. 역동적인 변화와 순간적인 환영, 사실적인 표현과 화려함을 추구하는 바로크와는 달리 고전주의는 영원성과 고요함, 질서와 균형을 중시하는 양식이다. 프랑스는 루벤스를 통해 바로크 미술을 충분히 흡수했음에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고전주의를 구축해 나갔다. 프랑스에서는 왜 바로크가 아닌 고전주의가 자리 잡게 되었을까? 어떤 화가들이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새로운 고전주의를 만들게 되었을까? 17세기 프랑스로 가보자.
17세기, 프랑스는 절대왕정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나라였다.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한 루이 14세( Louis XIV, 1638 ~ 1715)는 70년 넘게 왕좌를 지킨 절대군주였다. 그의 시대에 예술은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중 하나는 왕을 찬양하는 화려하고 감각적인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웅장하고 장식적인 바로크 미술은 왕의 영광을 선전하고 신성화하는 데 적합한 양식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절대왕정은 바로크와는 반대되는 질서와 안정감을 추구하기도 했다. 절대군주는 왕을 중심으로 통합된 국가를 세우고, 이성과 지성을 동원해 영원히 지속될 국가를 완성하려 했다. 세련된 궁정문화를 만들고, 학문을 장려하는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프랑스어를 다듬는 등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 체계적인 표본이 만들어졌다. 이런 시대에 국가는 영원하고 이상적인 질서를 추구하는 고전주의 예술을 원했다.
이렇게 상반된 절대왕정의 두 가지 요구를 잘 종합한 최고의 걸작이 베르사유 궁전[그림 1]이다. 몇 번의 설계 변경을 통해 완공된 베르사유 궁전은 절대군주의 위엄을 보여주는 매우 장대한 규모의 건축물이다. 태양신 아폴론을 주제로 한 환상적인 조각들 [그림 2],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반사하는 거울로 둘러싸인 ‘거울의 방’[그림 3] 등은 태양왕 루이 14세의 권위를 가시적으로 드러냈다. 이처럼 베르사유 궁전은 그 크기와 장식적인 면에서 궁정 바로크 예술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궁전은 고전주의의 정수라고 평가된다. 긴 수평선을 기본으로 하는 건축물은 매우 안정되고 우아한 느낌을 준다. 뿐만 아니라 기하학적 도형을 기본으로 만들어진 정원은 변화무쌍한 자연이 아니라 인공적인 질서가 부여된 야외공간이었다. 바로크가 표방하는 과잉과 환각성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즉 베르사유 궁전은 바로크를 품고 있는 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프랑스 미술의 중심에 선 인물은 니콜라스 푸생(Nicolas Poussin, 1594- 1665)이었다. 서른이 되던 해에 로마에 도착한 푸생은 당시 로마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화가였다. 당시 로마는 바로크 미술이 한참 기세를 올리고 있었기에 대부분의 화가들은 카라바조의 예술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푸생은 “카라바조는 회화미술을 없애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을 서슴치 않으면서 오직 그리스·로마의 고전성에서 자신의 길을 찾으려 했다. 그는 고대의 건축과 조각은 물론 문학과 관습까지 깊게 연구하며 종교적인 그림보다는 신화적인 이야기나 역사적인 이야기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포키온의 장례>[그림 4]는 푸생이 추구한 예술이 무엇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포키온은 성품이 온화하고 전쟁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내어 아테네 시민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장군이었다. 하지만 그의 절친한 친구가 아테네를 배신하고 도망치자 함께 반역자로 몰려 처형당하게 된다. 그렇게 처형된 시신은 도시에 매장할 수 없어서 도시 밖으로 옮겨졌다. 이렇게 고귀한 영웅의 이야기를 선택한 푸생은 죽은 영웅보다 그의 시신이 옮겨지는 풍경을 더 장엄하고 아름답게 묘사했다. 고대의 건축물과 구불구불한 길, 철저하게 계산하여 안배된 전경과 원경, 군더더기 없는 절제된 표현 등은 눈으로 본 자연이 아니라 이성으로 접근한 철학적이고 명상적인 장면이었다. 이처럼 질서와 통일성이 부여된 이상적인 풍경은 주인공의 신념에 부합하는 ‘영웅적인 풍경’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클로드 로랭은 프랑스 동부의 로렌 지방 출신으로 푸생처럼 로마에 정착하여 일생을 보낸 화가였다. 재밌는 것은 그가 로마에 간 이유가 그림이 아니라 제과 기술을 배우러 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하필 그가 요리를 위해 머물게 된 곳이 풍경화가의 집이었고, 클로드는 그곳에서 풍경화의 기초를 배우게 된다.
그의 풍경화는 고대 역사나 신화적인 이야기를 완벽한 비례와 균형을 보여주는 풍경을 통해 표현했다는 점에서 푸생의 고전주의적 풍경화와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낮은 지평선과 넓은 하늘, 끝없이 이어지는 열린 공간은 엄격하게 닫힌 공간성을 보여주는 푸생의 풍경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크리세이스를 돌려주러 온 오디세우스>[그림 5]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한 장면을 담은 그림이다. 한데 이 그림 어디에서도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찾을 수 없다. 화면이 담고 있는 것은 배 한 척이 들어오고 있는 해질 녘의 항구 풍경이고, 그것이 진정한 이 그림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클로드 로랭은 푸생과 달리 자연이 만들어내는 신비한 효과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지는 해가 만들어 내는 미묘한 색조와 그림자, 동틀 무렵부터 황혼 녘까지 시시 때때로 달라지는 빛과 그에 따라 변하는 사물의 색이 그를 매료시켰다. 그것을 관찰하기 위해 화가는 해뜨기 전부터 밖으로 나가 저녁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그렇게 실제 자연을 연구 덕분에 클로드 로랭의 그림은 고전주의와 자연주의의 특징이 동시에 엿보이는 당시로서는 아주 특별한 그림이 되었다.
그의 그림은 매우 유명해졌고, 복제품이 만들어졌으며, 그는 푸생으로부터 17세기의 가장 위대한 풍경화가라고 평을 받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그의 그림을 떠올리며 “그림 같다!(picturesque)”고 감탄하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쓰는 ‘그림 같은 풍경’이라는 말은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경탄이자 처음으로 자연의 빛에 매료되었던 화가, 클로드 로랭에 대한 찬사였던 것이다.
요약하자면 푸생이 이성을 통해 ‘자연을 능가하는 미’를 구현했다면, 클로드 로랭은 자연을 연구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평가하는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둘의 방향은 이처럼 달랐지만 이들은 현실에 없는 이상을 구현하고, 새로운 미의 표본을 세운 진정한 고전주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