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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윤숙 Oct 09. 2023

추상미술 - 형(形)과 색(色)의 이중주

칸딘스키 - 색은 피아노의 건반이요, 영혼은 다양한 선율을 가진 피아노다

19세기말부터 회화는 자신이 품고 있었던 많은 것들을 캔버스 밖으로 던져버렸다. 사실주의는 문학적 요소를 버렸고 인상주의는 원근법을 지웠다. 야수파는 사실적인 색채와 멀어졌고 입체주의는 3차원 공간을 해체했다. 그럼에도 회화 안에는 여전히 사물이 존재했다. 해체된 얼굴의 일부, 악기의 실루엣과 같은 부분들이 여전히 어떤 대상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추상화에는 그 어떤 대상의 조각도 남아있지 않았다. 추상회화가 눈에 보이는 대상을 그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 추상(abstract)을 비구상(非具象, non-figurative)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문제가 되는 것은 작품 그 자체다.


추상미술에는 대상이 없다. 도대체 뭘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는 그림 앞에서 관람자는 종종 고민에 잠긴다. 그러다 제목을 보러 다가가면 ‘무제’라는 두 글자가 우리를 허탈하게 만든다. 화가들은 왜 아무것도 없는 그림을 그린 것일까? 그런데 이 질문을 던지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추상화 안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형(形)과 색(色)만으로 정신적인 것을 그리다


추상미술은 “순수 회화”를 만들겠다는 목표가 구체화된 것이었다. 이때 “순수 회화”란 정물, 풍경, 인물과 같이 그림 외부의 요소를 빼고 온전히 회화의 내적 요소로만 채워진 그림을 말한다. 그렇다면 회화의 내적 요소란 무엇인가? 바로 형(形)과 색(色)이다.


미술이 순수 회화가 되기까지 회화는 약간의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잘 그린 그림일지라도 그림은 세상의 복제품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복제품은 언제나 진품과의 유사성으로 가치를 인정받는다. ‘얼마나 사실적인가?’라는 기준은 아주 오랫동안 회화의 가치를 판단하는 변치 않는 기준이었다. 그런데 20세기 초에 등장한 추상미술은 더 이상 세상을 복제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렸다. 하지만 대상을 잃어버린 회화는 벽지문양이나 타일처럼 내용 없는 공허한 장식이 되어버린다.


추상미술은 설명할 수도 분석할 수도 없는 정신적인 것으로 대상의 빈자리를 채우려 했다. 그 선두에 서있었던 사람이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다. 그는 추상미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처음으로 추상화를 세상에 선보인 화가는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혹은 그보다 조금 앞서서 여러 화가들이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칸딘스키를 창시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추상회화의 원리를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확고한 표현양식으로 선보였기 때문이다.


그림 1 클로드 모네, <건초더미>, 1890, oil on canvas, 72.7 ×92.6cm, 개인 소장


추상에 대한 그의 관심은 두 번의 경이로운 체험으로부터 유래했다. 그 첫 번째는 모네의 <건초더미>[그림 1]를 본 것이었다. 칸딘스키는 제목을 보기 전까지 일렁이는 빛으로 표현된 <건초더미>가 도대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은 믿을 수 없는 힘과 광채를 발했다.” 두 번째 경험은 1910년경 어느 날 저녁에 찾아왔다. 칸딘스키는 해질녘 햇살을 받은 어떤 그림이 불타는 듯 내면의 빛을 발하면서 눈부시게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깜짝 놀란 그는 그림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것은 자신의 그림이 거꾸로 놓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확인 한 순간 칸딘스키는 더 이상 이전의 감동을 느낄 수 없었다. 이런 체험들은 주제가 없이도 회화가 감동을 줄 수 있으며, 심지어 주제가 해로운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었다. 형태와 색채만으로도 영혼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회화의 문법


칸딘스키는 회화에 정신적인 것을 담아낼 방법을 음악에서 찾았다. 음악은 리듬, 선율, 셈여림 등으로 감정과 생각을 표현한다. 그처럼 회화도 대상을 재현하지 않고 형과 색만으로 “예술의 영혼”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색은 피아노의 건반이요, 눈은 줄을 때리는 망치요, 영혼은 여러 개의 선율을 가진 피아노인 것이다. 예술가들은 인간의 영혼에 진동을 일으키는 목적에 적합하도록 이렇게, 저렇게 건반을 두드리는 손과 같다. 그러므로 색의 조화는 오직 인간의 영혼을 합목적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법칙에 근거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바실리 칸딘스키,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그는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을 저술하면서 음악의 화성학이나 대위법과 같은 회화의 문법을 모색했다. 재현적인 요소로 이루어진 구성적 회화를 선율적(멜로디) 구성이라 부르고, 비구상적인 형태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그림을 교향악적 구성이라 명명했다.


좌) 그림 2 바실리 칸딘스키, <인상 V (Park)>, 1911 / 우) 그림 3 바실리 칸딘스키, <즉흥(Improvisation) No. 30 (대포)>, 1911-1913


회화의 교향악은 3단계로 구성된다. 그 첫째는 ‘외적 자연’에서 얻은 직접적인 인상을 형태와 색채로 표현한 ‘인상’[그림 2]이고, 둘째는 ‘내면적 자연’에서 생겨난 인상으로 의식의 통제 없이 자유롭게 그려진 ‘즉흥’이다. <즉흥 no.30-대포>[그림 3]에는 그림의 제목이 지시하는 대포의 형태가 분명히 보인다. 이는 1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이 그림에서 주요 멜로디를 담당한다. 그 멜로디에 다양한 선과 색이 어우러져 웅장한 화음을 이룬다. 이때 덧붙여진 요소들은 무의식적으로 갑작스럽게 떠오른 것이었다. 칸딘스키는 이 그림을 그릴 때 마음속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저쪽 구석은 더 무거워야 한다”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그림 안에서 형과 색은 분명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좌) 그림4 바실리 칸딘스키, <구성(Composition) VII>, 1913 / 우) 그림5 바실리 칸딘스키, <구성(Composition) VIII>, 1923


교향악의 마지막을 차지하는 ‘구성’은 '외적 자연'과 '내면적 자연'에서 받은 다양한 인상을 의식적으로 배치하는 것을 말한다. 칸딘스키는 치밀한 실험을 통해 구성을 완성했다. 그것은 처음엔 비정형적인 것[그림 4]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기하학적인 형태로 변해갔다. [그림 5] 이런 변화는 형태에 대한 이론을 정교화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의 학생들을 위해 <점과 선에서 면으로>라는 저서를 집필했는데 그것은 회화의 새로운 문법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법은 차가운 이성의 작업이었기에 법칙으로 만들기 쉬운 수학적인 형태를 요구했다.      


대상을 떠나 추상에 이르는 칸딘스키의 도약은 20세기라는 새로운 시대 상황과도 맞물려 있었다. 과학자들은 물질의 기본 요소인 원자가 깨질 수 없는 단단한 덩어리가 아니라 핵과 전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물질의 근원이 나뉠 수 있다는 과학적 발견은 칸딘스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물질은 더 이상 영원하고 객관적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화가는 캔버스에 물질적 대상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을 담아야 했다. 그렇다면 예술에 있어 정신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예를 들어 그에겐 색채도 정신적인 것이었다.


흰색은 죽은 것이 아닌, 가능성으로 차 있는 침묵인 것이다. (...) 그리고 가능성이 없는 무(無), 해가진 후의 죽은 무, 미래와 희망이 없는 영원한 침묵과 같은 것이 바로 검은색의 내적 울림인 것이다. (...) 회색은 음향과 운동이 없다. (...) 그렇기 때문에 절망적인 부동성이다. - 칸딘스키,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이런 생각은 물질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시대를 사는 화가의 깊은 성찰이기도 했다. 산업혁명 이후 유래 없는 풍요를 누린 유럽 세계는 자신들이 축적한 부의 사용법을 알지 못한 채 전쟁 향해가고 있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위대한 정신”의 시대를 기다렸다. 칸딘스키는 물질적인 요소가 없는 회화를 통해 그런 시대를 준비하려 했다.


하지만 칸딘스키가 정립한 회화의 문법은 객관적인 법칙이 되지 못했다. 색채와 형태는 문명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같은 문명 내에서도 유행에 따라 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의 시도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모두에게 동일하게 작동하지 않을지라도 색채와 형태만으로 생각과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만은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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