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조화, 회화의 회화
추상회화의 창시자를 자처한 칸딘스키의 출발은 표현주의였다. 1909년 무렵 결성된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의 모임인 청기사파는 다양한 형식으로 화가의 내면적 욕망을 드러내는 회화를 보여주었는데, 칸딘스키도 그 모임의 일원이었다. 몇 년 뒤 칸딘스키의 관심은 추상미술로 옮겨가 ‘회화의 교향악’을 추구했지만 그때에도 색과 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화가의 ‘감정’이라고 보았다.
피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과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9~1935)는 칸딘스키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으나 전혀 다른 길을 따라 추상에 이르렀다. 수직의 격자로 그려진 몬드리안의 추상화는 캔버스에서 화가의 정서를 걷어내고 소위 말하는 차가운 기하학적인 추상세계를 보여주었다. 한편 말레비치는 절대적인 회화의 근원을 탐구하며 단색의 사각형만 남은 매우 극단적인 회화에 도달했다. 이들의 그림은 누구나 따라 그릴 수 있을 만큼 단순하고 볼게 별로 없다. 그러나 그 내적 의미는 오래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네덜란드 출신 화가 몬드리안은 파리로 건너가 분석적 입체주의를 받아들였다. 분석적 입체주의는 재현이 아니라 세계의 근본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 회화의 소임이라는 믿음을 몬드리안에게 심어주었다. 그가 그린 3개의 나무 그림[그림 1~3]은 구상적인 나무 그림이 분석적 입체주의의 방식을 따라 추상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형태와 색채를 단순화할수록 개별적인 나무의 모습은 사라지고 보편적인 나무의 구조와 빈 공간이 드러나고 있다.
몬드리안이 구상에서 추상으로 나아간 원인은 자연에 대한 불쾌감 때문이었다. 자연은 일련의 질서를 품고 있지만 변화무쌍하여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몬드리안은 예술의 과업은 그러한 혼란 속에서 보편적이고 순수한 미美를 건져 올리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이념을 신조형주의(Neo-Plasticism)라고 불렀다. 이때 이미 몬드리안은 입체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미학 위에 서 있었다. 이제 자연 세계를 기하학적 패턴으로 단순화하는 일은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우리는 선과 색채의 순수한 관계 위에 기초를 두고 있는 새로운 미학을 원한다. 왜냐하면 순수한 구성요소의 순수한 관계만이 순수한 미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순수한 미는 신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몬드리안, <새로운 조형>, (1925)
몬드리안의 관점은 다분히 신플라톤주의를 따르던 르네상스 시대의 수학자나 예술가들의 입장과 유사하다. 이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비례와 리듬의 법칙을 발견하면 합리적인 우주를 창조한 이성적인 신과 합치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르네상스 화가들이 심도 있게 연구한 비례론은 수학을 통해 미(美)와 신(神)에게 동시에 다가가기 위한 이론이었다.
몬드리안의 추상미술은 혼란한 세계 안에 질서를 부여하고, 미와 신성을 연결하한 점에서 고전주의와 동일한 지평에 놓여있지만 완전히 다른 형태를 추구했다. 그는 이제 자연이 아니라 회화의 근본 요소(선, 면, 색 등)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 한다.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그림 4]은 더 이상 자연과 상관없다. 색은 근원이 되는 색만을 추려서 사용되었고, 형태는 평온을 나타내는 수평선과 생기를 나타내는 수직선으로 나뉜 크고 작은 평면만 있다. 몬드리안은 자연에서는 얻을 수 없는 직선과 사각 평면이 가장 큰 긴장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형태라고 생각했고, 오직 그것만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같은 직선이라도 대각선은 사용하지 않았다. 대각선의 역동적인 느낌은 테두리의 구속을 파괴함으로써 화면 안에 동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몬드리안의 생각대로 크고 작은 평면들은 완벽한 균형 속에서도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검은 직선을 조금만 옮기거나 면의 색을 조금만 바꾸어도 화면의 조화는 깨어질 것이다. 그는 이런 균형을 좌우 대칭으로 만들어 내는 ‘정적 균형’과는 다른 ‘동적 균형’이라고 부르면 이것이야 말로 “새로운 조화”라고 자찬했다.
회화는 오랫동안 물감으로 세상을 표현해 왔다. 인간의 초상, 사과와 나무, 본 적 없는 신과 괴물에 이르기까지 화가의 붓은 모든 것을 그려냈다. 그런데 회화가 한 번도 그리지 못한 것이 있었다. 바로 회화였다. 회화는 회화를 어떻게 그릴 것인가? 이 질문에 해법을 제시한 사람이 러시아 출신의 화가 말레비치였다.
말레비치는 인상주의, 신인상주의, 입체주의 등을 거쳐 추상의 극한인 절대주의에 이르게 되었다. 그가 실험했던 입체주의는 콜라주를 활용하는 종합적 입체주의였다. 콜라주의 문법은 회화와 많이 달랐다. 이전까지의 회화는 물감을 이용하여 사물을 표현했지만 콜라주는 나무 테이블을 표현하기 위해 나무 무늬 벽지를, 밧줄을 표현하기 위해 밧줄을 붙여버렸다. 이 방법으로 회화가 회화를 표현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려면 먼저 회화가 무엇인지 정의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기획 속에 있는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는 ‘회화의 영도(zero degree)’에 도달하고자 했다. 자연에서 섭씨 영도는 물과 얼음의 경계가 되는 온도다. 영도를 넘어가면 얼음은 물이 되고 물은 얼음으로 변한다. 즉 영도란 물과 얼음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다. ‘회화의 영도’도 이와 마찬가지로 그보다 더 나아가면 더 이상 회화가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회화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회화의 영도를 캔버스에 담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회화의 회화’가 될 수 있었다.
말레비치가 도달한 ‘형태의 영도’는 정사각형이었다. 그가 1915년에 발표한 <검은 사각형>[그림 5]에는 제목 그대로 흰 정사각형의 캔버스 안에 검은 사각형만이 그려져 있다.(세월이 흐른 지금은 칠해진 물감이 갈라진 무늬가 생겼다.) 하지만 사실 ‘그렸다’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이 검은 사각형은 캔버스의 형태를 반복한 것일 뿐 화가가 어떤 의도를 갖고 그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로써 절대주의는 추상회화에서 화가가 담당했던 마지막 역할인 ‘구성’마저 지워버리게 된다.
다양한 절대주의를 실험한 말레비치는 ‘색채의 영도’인 흰색에 도달하여 <하양 위의 하양>[그림 6]을 선보이게 된다. 흰색은 색이 칠해지지 않은 캔버스의 색이자 어떤 색도 칠할 수 있는 ‘순수한 색의 프레임’이었다. 그 위에서 모든 그림은 시작된다. 이에 말레비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흰색의 세계로 탈출했다. 나 외에도, 조종사 동료들이 이 무한에서 헤엄친다. 나는 절대주의의 신호기를 꽂았다. 헤엄쳐라! 자유롭게 흰 바다, 무한대가 그대 앞에 놓여 있다.”
말레비치는 그야말로 회화의 끝에 도달했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 대신 "자유롭게 흰 바다"가 나타났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무한대의 공간이 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