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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윤숙 Oct 04. 2023

입체주의(Cubism) – 화두를 던지다

캔버스에 붙은 신문지 조각이 불러온 파란

1907년,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와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가 만났다. 브라크는 피카소와 자신은 ‘밧줄에 함께 묶인 등반 대원’과 같았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영감을 주면서 입체주의를 완성해 갔다. 그 전조는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그림 1]이었다. 피카소가 아프리카 조각에 영향을 받은 이 그림은 ‘최초의 진정한 20세기 미술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혁신적인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 혁신은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큰 충격이었다. 


그림 1.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1907, 캔버스에 유채, 233.7 × 243.9 cm, 뉴욕 현대미술관


제목이 말해주듯 이 작품은 바르셀로나 아비뇽 사창가의 여인들을 그린 작품이다.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는 이 여인들은 아프리카 가면과 같은 얼굴로 이집트 벽화처럼 정면과 측면이 뒤섞인 모습을 하고 다. 이들은 외계에서 온 침략자처럼 무심한 눈으로 먹잇감을 찾는다. 형태는 조각나고 공간은 깊이를 잃어버렸다. 


과거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 같은 작품의 표현방식은 분명 르네상스 이후 수백 년을 이어온 회화에 대한 도전이자 문명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이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이 그림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브라크는 바로 그 때문에 <아비뇽의 처녀들>이 가치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이렇게 조각난 형태가 새로운 회화의 언어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때까지 왕정이 남아있었던 구시대적인 스페인에서 나고 자란 피카소와 달리 브라크는 현대적인 도시 파리의 영향 아래 있었다. 그는 세잔을 알고 있었고 마티스와 함께 야수파에 참여하며 회화의 첨단을 걷고 있었다. 그 때문에 브라크는 <아비뇽의 처녀들>이 지닌 놀라운 비전을 알아보았고, 피카소와 함께 입체주의를 시작할 수 있었다.     




분석적 입체주의 – 사물과 공간의 뒤섞임


입체주의라는 말은 마티스의 입을 통해 나왔다. 마티스는 브라크의 <에스타크의 집들>[그림 2]을 보고 비난 섞인 어조로 “이것 은 작은 입방체(little cube)일 뿐이다”라고 평했다. 마티스의 말마따나 그려진 집과 나무, 공간들은 모두 기하학적 도형으로 축약되었다. 이런 시도는 세잔이 제안 한 것이었다. 세잔은 “자연을 원통․구․원뿔로 다루되 모든 것을 원근법 속에 집어넣어 한 대상 혹은 한 평면의 각 측면이 중심점으로 향하게 하라.”고 말했었다. 


그림 2. 조르주 브라크, <에스타크의 집들>, 1908, 캔버스에 유채, 73 × 59.5 cm, Kunstmuseum Bern


브라크는 세잔의 조언을 따라 만져질 듯 견고한 형태들을 그렸다. 그러나 원근법만은 거부했다. 아마도 그것이 마티스를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브라크가 보이게 원근법은 환영을 만드는 속임수일 뿐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체험했던 공간에 대한 경험을 축소시킨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이사갈 집을 보러 갔을 때 결코 한 자리에 서서 공간을 파악하지 않는다. 우리의 시점은 계속 움직인다. 현관에서 거실을 바라보다 거실에 서서 현관을 바라보고, 방에 들어가다 뒤돌아 서서 거실과 현관을 동시에 보기도 한다. 브라크의 방식이 그와 같았다. 그는 자신이 다양한 시점에서 보았던 것들을 분석하여 캔버스 위에 모았다. 이것이 입체주의의 출발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런 방식은 입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해체하는 일에 가깝다. 미술사에 등장하는 많은 용어와 마찬가지로 '입체주의'라는 말도 이 양식을 설명하는 데 적절한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가 미술사가들은 이 시기의 입체주의에 '분석적 입체주의'라는 이름을 달았다. 이들의 회화가 '입체를 구축하는 일'이 아니라 '공간과 입체를 다양한 면으로 분석하고 분할하는 작업'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림 3. 파블로 피카소,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 1910, 캔버스에 유채, 92 × 65 cm, Pushkin Museum, Moscow


‘분석적 입체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중 하나는 피카소의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그림 3]이다. 이 인물화는 작은 조각의 파편들도 완전히 분해되어 있다. 형태와 공간에 관심을 둔 입체주의는 색을 중요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색채는 매우 단조롭다. 피카소는 인물의 이미지를 철저히 분석해서 작은 형태로 나누고 공간과 뒤섞어 버렸다. 그로 인해 얼굴을 암시하는 몇몇 파편을 제외하면 그림의 많은 부분은 추상화에 가까워졌다. 


그렇지만 피카소와 브라크는 결코 대상을 버리고 완전한 추상을 향해가진 않았다. 입체주의 회화가 추상화처럼 보이는 이유는 세부를 설명하는 부수적인 부분을 없애고 대상의 본질을 암시하는 핵심 골조만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은 피와 살을 가진 현실적인 인간은 분해되었다. 그럼에도 남겨진 조각들은 보다 분명하게 대상의 진실을 드러내 준다. 




종합적 입체주의 – 사물, 그림, 문자의 뒤섞임 그리고 도상 파괴


 분석적 입체주의가 대상을 작은 부분으로 분해할수록 대상은 점점 본래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보기 힘들어졌다. 이에 브라크와 피카소는 실물을 작품에 끌어들이게 된다. 그림의 재료라고 여겨지지 않았던 벽지나 신문, 나무 조각 등을 작품에 붙여 사물이 자기 자신을 지시하게 만든 것이다. 그 처음은 브라크의 파피에 콜레(Papier collé-종이 오려 붙이기)였다.


그림 4. 조르주 브라크, <과일 접시와 컵>, 1912, papier collé and charcoal on paper, Metropolitan Museum of Art, US


브라크는 <과일접시와 컵>[그림 4]에서 사물이 놓인 공간이 나무로 된 테이블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나무 무늬 벽지를 붙여 넣었다. 또 이미지를 보충하기 위해 BAR(술집 카운터 테이블), ALE(맥주)이라는 문자를 삽입했다. 이렇게 다양한 것들이 함께 모여 만들어진 입체주의 작품에는 ‘종합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림과 사물 그리고 문자가 뒤섞인 브라크의 작품은 매우 명료하게 그것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형태와 배경, 그림과 바탕의 관계가 모호해 졌다. 붙여진 벽지는 가장 도드라진 형태이지만 그림이 그려진 바탕이기도 하다. 또 목탄으로 그려진 알파벳은 그려진 형상이자 사물을 지시하는 문자이다. 이런 특징은 피카소의 작품에서 더 두드러진다.



그림 5. 파블로 피카소, <바이올린>, 1912, 92 × 65 cm, papier collé and charcoal on paper


피카소는 브라크의 파피에 콜레에 매우 큰 자극을 받았고 그것을 아주 조금 변주하여 큰 변화를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피카소가 제작한 <바이올린>[그림 5]은 단조로운 색, 조각난 이미지들, 덧붙여진 신문 등 형식적인 면에서 브라크의 작품과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브라크가 나무 모양 벽지로 나무 테이블만을 암시했다면 피카소는 동일한 신문지로 서로 다른 대상을 표현했다. 피카소 작품에서 잘린 신문지의 한쪽 면은 바이올린의 몸체(형상)가 되고 다른 쪽 면은 배경(바탕)이 되었다. 모양까지 엇비슷한 두 장의 종이가 놓인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이로써 하나의 형상이 일정한 의미를 갖는 도상학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예술의 경계 허물기


입체주의는 그 예고편이었던 <아비뇽의 처녀들>이 그러했듯이 매우 난폭한 방식으로 세상에 충격을 안겼다. 첫째, 입체주의는 사물의 분석해서 조각내서 형태를 해방시켰다. 그것은 단순히 이집트 회화처럼 다시점으로 사물을 묘사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사물과 공간의 경계를 허물었고 형태와 배경의 경계를 뒤섞었다. 요컨대 입체주의 그림 안에서 공간과 사물은 함께 연결되어 움직인다. 


다른 한편으로 입체주의는 예술을 매우 평범한 것으로 만들었다. 의자, 유리잔, 물병, 재떨이, 접시 등 매우 일상적인 사물들이 그림의 소재로 등장했다. 그것들은 대개 공장에서 대량 생산 되는 싸구려 물건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벽지나 신문지, 노끈처럼 하찮은 재료들이 예술의 영역에 마구 난입해 들어왔다. 그런 소재들은 예술은 보석처럼 드물고 귀한 소중한 것이라는 부르주아적 관념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흔한 재료들과 문자가 뒤섞인 만들어진 입체주의 작품들은 사람들을 질문하게 만들었다. 사물과 그림이 혼합된 콜라주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림에 쓰인 문자는 문자인가 형상인가? 이 예술가들은 무슨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철학이 세상에 던져왔던 질문이었다. 이로써 예술의 지위는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세상을 재현하고 해석해왔던 미술이 이제 세상에 화두를 던지고 세계에 대한 질문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예술이 아방가르드(avant-garde :전위)가 되는 것이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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