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즘의 시작, 전통과의 단절
20세기 전반기 미술을 지칭하는 모더니즘(modernism)이라는 단어는 사실 당시 미술에 대한 어떤 정보도 주지 않는다. 그 안에는 하나의 주의(~ism)로 수렴될 수 없는 이질적인 미술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그럼에도 모더니즘이름으로 묶인 예술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찾아낸다면, 그것은 아마도 ‘전통과의 단절’과 ‘새로움의 추구’일 것이다.
물론 이런 움직임은 19세기부터 있어왔다. 사실주의를 선언한 쿠르베는 전통적인 소재를 거부하고 눈에 보이는 동시대의 사람들을 그림에 담았다. 또 인상주의자들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빛을 그리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대상을 평등하게 바라보았고, 2차원인 회화를 3차원처럼 보이게 만들려는 노력도 포기했다. 그때부터 회화는 자연과 인간, 창녀와 신사를 대등하게 다루게 되었고 형태보다는 색채표현에 더 중점을 둔다.
하지만 아무리 19세기 미술이 고전예술과 멀어져 갔다 하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20세기부터 미술은 재현이라는 회화의 과제 자체를 부정하면서 보다 근원적으로 전통과 단절했다. 즉, “세상을 보여주는 창”으로써의 미술은 깨어지고 화가 개인의 내면을 자유롭게 표현하거나 선·형태·색이라는 회화의 고유한 요소들 간의 논리를 이용하여 화면을 구성하는 추상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 첫 시작점에 야수파(fauvism)가 있었다.
1905년 파리의 한 전시장에서 백색의 토르소가 자극적인 색채가 난무하는 그림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보고 한 비평가가 이렇게 말했다. “야수들 사이에 있는 도나텔로여!” 20세기의 가장 선구적인 유파를 지칭하는 야수파라는 말은 그와 같은 조롱에서 유래했다. 비평가들은 ‘광란하는 미치광이’, ‘아무렇게나 그려놓은 그림’이라는 비난을 이어갔고 관객들마저 비웃음을 보냈다. 이런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가장 큰 요인은 실제와 상관없는 칠해진 색채였다. 야수파의 캔버스 위에서 나무 등걸은 선홍색이 되고, 흙은 분홍색이 되고, 하늘은 노르스름해졌다. 이렇게 자의적인 색채는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미친 짓이었다.
야수파의 일원이었던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 1876–1958)는 쏟아지는 비난 속에서 자신의 색채는 자연을 재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화가의 감정을 표현하는 하나의 도구였다고 항변한다.
“(나는) 나의 파란색과 주홍색 물감으로 에콜 데 보자르(예술학교)를 불태워 버리고 싶었고, 내 앞에 무엇이 지나가든 생각 않고 내 붓으로 나의 감정을 번역하고 싶었다.”
매우 과격한 언사로 자신을 변호하는 블라맹크는 ‘야수’라는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매우 몸집이 컸던 그는 권투 교사, 떠돌이 바이올리니스트, 직업적인 사이클 선수와 같이 병존하기 어려운 직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성격도 매우 극단적이었는데, 공공연하게 지식과 고전을 무시하면서 예술 교육을 받지 않고 루브르 박물관에는 가본 적도 없다는 것을 자랑하곤 했다.
그런데 1901년 반 고흐의 회고전이 제멋대로 살아가는 이 화가를 압도해 버렸다. 그는 반 고흐에게 영감을 받아 캔버스에 직접 물감을 짜서 두껍게 나이프로 문지르거나 전혀 다른 색상을 나란히 배치하여 화려하고 어지러운 그림을 만들어냈다. [그림 1] 절제되지 않은 원색으로 가득한 블라맹크의 자유분방한 풍경화는 신선함과 생기를 느끼게 한다.
야수파의 이런 시도는 실제 사물의 색상에 매어 있었던 회화의 색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놀라운 변화를 이끌었다. 하지만 야수파는 운동이라고 하기엔 결속력이 약했고, 공동 전시도 3회 만에 끝나버렸다. 이들의 그림에 서려있던 흥분과 에너지도 화가들이 나이 들어감에 따라 점차 사그라들었다.
야수파의 선두주자이자 말년까지 화려하고 신선한 색채를 사용하며 야수파의 특징을 이어나간 화가는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였다. 그는 블라맹크와는 매우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원래 법을 공부하고 있었던 마티스는 병에 걸려 치료를 받는 동안 어머니가 지루함을 달래라고 사준 미술재료를 손에 쥐면서부터 회화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몸이 낫고 본격적으로 미술을 배우기 위해 파리로 간 마티스는 귀스타브 모로의 화실에 들어가 고전회화의 기법을 익혔다. 그리고 화가가 된 뒤엔 매일 12시간 이상 꾸준히 작업했다. 이렇게 성실한 마티스에겐 과거의 미술에 대한 불만이나 혁신가가 되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그는 그저 매우 잘 배우는 사람이었다.
시냐크는 마티스에게 처음 새로운 시대의 회화를 알려준 사람이었다. 그는 분할주의를 마티스에게 전했고, 마티스가 자신의 뒤를 이을 화가가 될 거라 기대했다. <사치, 고요, 쾌락>[그림 2]에는 분명 원색의 색점을 이용하여 채색을 하는 분할주의의 영향이 보인다. 하지만 마티스는 분할주의 안에서 변화를 꾀했다. 그는 점을 선처럼 연결하여 형태의 윤곽을 분명히 하고 색채의 강렬한 대비를 돋보이게 하며 자신만의 회화를 발전시켰다.
그 결과 분할주의의 경향은 오래가지 않았다. 1905년 야수파 전시회에 제출된 <모자를 쓴 여신>[그림 3]에서 이미 분할주의의 균일한 붓터치가 사라졌다. 대신 반 고흐를 연상시키는 경쾌하고 두꺼운 물감자국이 보이고, 폴 고갱의 영향을 받은 뚜렷한 윤곽선과 자의적인 색채 사용도 눈에 띈다. 또 색채 상호 간의 관계를 통해 화면의 에너지를 끌어올리고 형태를 완성해 가는 세잔의 방식도 엿보인다. 요컨대 이 그림은 마티스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회화 원리를 깊이 연구하고 종합하여 완성된 것이었다.
후기 인상주의를 소화해 내면서 마티스는 색이 칠해진 양에 따라 느낌이 변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자기 나름의 색채 원칙을 완성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1㎠의 파란색은 1㎡의 파란색만큼 파랗지 않다.”
<삶의 기쁨>[그림 4]은 마티스의 색채원칙이 반영된 그림이다. 캔버스는 제목과 어울리는 행복한 색채로 가득하다. 마티스는 그림이 꼭 아름다울 필요는 없지만 고달픈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편안함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인지 그의 그림은 매우 단순한 형태와 선명하고 밝은 색상으로 채워졌다. 하지만 시냐크는 이 그림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티스가 의도하진 않았지만 이 그림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도발적이었기 때문이다.
야외에서 유희를 즐기는 사람들은 서양 회화의 오랜 주제인 목가적인 풍경화에 해당한다. 하지만 마티스는 주제는 차용하면서 회화의 오랜 문법을 모두 무시해 버렸다. 색채는 자연과 상관없이 칠해졌으며, 대조적인 색으로 칠해진 넓은 색면은 조화 대신 강한 충돌을 일으키고, 원근법이 사라진 공간은 완전한 평면이 되었다. 더구나 인체의 해부학적인 구조도 모호해졌다. 인물의 크기는 제각각이고 그중 몇몇은 성별도 불분명하다. 또 오른쪽 하단에서 키스를 나누는 것 같은 연인은 머리가 하나로 합쳐진 것처럼 형태가 왜곡되었다. 이것은 전통적인 회화의 문법을 모두 교란시키면서 아카데미의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탈출이었다. 이 같은 탈출은 화가들에게 표현의 자유를 열어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전통을 세워야 하는 과제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