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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윤숙 Aug 10. 2023

뭉크 - 표현주의 이전의 표현주의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강인한 영혼의 그림

“질병과 광기, 그리고 죽음은 내 요람 위를 맴도는 악령이었다” -에드바르트 뭉크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위와 같이 회고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는 아들이 곧 죽을 거라 생각했다. 다행히 뭉크는 죽음을 밀어내고 살아났지만 천식과 류머티즘이 그를 오래도록 괴롭혔다. 죽음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은 것 같았다. 병약했던 어머니는 그가 5살 때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와 같았던 누나 소피마저 수년 뒤에 죽음을 맞이했다. 불행은 장성한 이후에도 이어졌다. 그는 26살에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고 32살이 되던 해에는 형제들 중 누구보다 건강했던 남동생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여동생은 정신병으로 병원에 감금되었고, 뭉크 자신도 한때 극심한 정서 불안을 겪으며 정신병을 앓았다.


이 같은 이력과 과감한 그의 표현 때문에 당시의 평론가들은 뭉크의 미술도 미쳤다고 단언했다. 우울, 고독, 불안, 공포, 냉소, 광기, 허무, 절규. 이런 어두운 이미지들은 그의 그림에 깊이 배어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의 산물로 여길 수는 없을 것 같다. 뭉크는 자신의 정신 상태를 걱정할 때조차도 자기 미술의 정상성만은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내 미술이 병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에드바르 뭉크


 뭉크 자신이 말했듯이 미술은 모든 것을 초월해서 그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었고, 많은 한계 상황 속에서도 삶을 지속하는 이유가 되었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광인의 불안한 흔적이 아니라 죽음과 광기를 마주하면서도 다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강인한 영혼의 붓질이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표현주의, 첫 번째 영혼의 회화 : “네 삶을 기술하라”


뭉크의 아버지는 매우 독실하고 경건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강박적인 신앙심으로 아들을 억눌렀지만 에르바르트 뭉크는 연이은 가족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신앙의 무력함을 절감했다. 그의 기도에 신은 응답해 주지 않았다.


뭉크는 아버지와는 다른 시대를 살아야 했다. 19세기말에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선포했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서서히 창조론을 흔들고 있었고, 프로이트는 우리 의식이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이런 시대에 노르웨이의 젊은 보헤미안들 사이에는 마약과 압생트(술), 허무주의와 무정부주의, 절망과 자살 그리고 도착적인 자유연애가 만연해 있었다. 이들의 비전은 매우 유아적이고 자족적이었기 때문에 뭉크는 결코 그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헤미안들의 전복적이고 반항적인 태도는 그의 예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보헤미안 그룹이 잡지에 발표한 “9 계명” 중에 “네 삶을 기술(記述)하라”는 계명은 그의 예술의 돌파구가 되어주었다.


뭉크는 자신의 삶을 글로 써 내려가면서 용감하게도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과 마주했다. 누나 소피가 죽어갈 때, 뭉크의 아버지는 그녀가 죽으면 주님과 함께하게 될 것이니 더 나을 거라는 주장을 했다. 14살의 뭉크는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커튼 뒤로 몸을 숨기며 부끄러움과 무력감을 느꼈다.


그림 1 <병든 아이>, 1885-86, Oil on canvas, 120 x 119 cm, Nasjonalmuseet, Oslo


<병든 아이>[그림 1]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린 그림이었다. 이 그림에서 뭉크는 소피가 죽어갈 때 이미 세상에 없었던 어머니를 등장시켰다. 그의 관심은 본 것을 물리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겪었던 내면적인 경험과 분리될 수 없는 어떤 형태를 ‘표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병과 가난으로 야윈 붉은 머리의 소녀는 창백한 얼굴을 창가 쪽으로 돌리고 있고 어머니는 고통 속에 고개를 숙인다. 그 외의 모든 것은 과감하게 생략되었다. 이로써 죽어가는 아이와 비탄에 빠진 어머니라는 명료한 슬픔의 이미지가 완성되었고, 머지않아 이 그림은 최초의 표현주의 회화로 알려지게 된다. 하지만 뭉크 자신은 표현주의라는 말을 알지 못했다.


그에게 이 작품은 첫 번째 “영혼의 회화”였다. 그는 장식적이고 화사한 그림들을 향기 나는 거품을 만드는 ‘비누의 그림’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은 보편적인 ‘영혼의 그림’을 그리려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나 자신을 면밀히 관찰하고 스스로를 해부학 실험대로 이용함으로써, 영혼에 대한 연구를 기록하는 것이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인체의 오목한 곳들을 연구하고 시체를 해부했던 것처럼 나는 자기 응시를 통해 영혼의 보편성을 해부하려 한다.”


뭉크는 영혼을 해부하여 그림으로 명료하게 보여주려 했다. 그래서인가 그의 그림에는 어려운 상징과 신비가 없고, 미완성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모호하지는 않았다. 그의 영혼은 왜곡되고 과장된 형태를 취하면서까지 오히려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예를 들어 <병든 아이>에서는 물감이 눈물처럼 흘러내린다. 그로 인해 뭉크는 많은 비웃음과 비난을 받았지만, 이런 기법은 그동안 회화가 담아내지 못했던 불안과 우울, 질병과 죽음과 같은 인간의 실존적 진실을 마주하게 만들었다.  




그림의 인생


뭉크의 그림을 사람들은 ‘노르웨이의 영혼’이라 불렀다. 하지만 뭉크의 그림은 오랫동안 노르웨이에서 거부당했다. 그를 초대한 곳은 독일이었다. 1892년부터 1908년까지 뭉크는 주로 베를린에 기거하면서 여러 번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전시를 거듭하면서 그림들이 매번 이전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림들은 배열된 순서에 따라 서로에게 영양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키스>[그림 3] 뒤에 <목소리>[그림 2]가 놓이면 <키스>는 강렬한 사랑의 순간에 대한 아련한 기억이 되지만 <키스> 뒤에 <흡혈귀>[그림 4]가 놓이면 <키스>는 위험한 유혹에 빠지는 순간이 된다.


이런 경험은 뭉크로 하여금 <생의 프리즈> ‘사랑’ 섹션[그림 2~7]을 구성하게 했다.  


좌) 그림2 <목소리(Summer Night's Dream), 1893 / 우)그림3 <키스>, 1897
좌) 그림 4 <뱀파이어(Love and Pain)>, 1895 / 우) 그림 5 <마돈나>, 1894-95


“(‘사랑’ 섹션은) 해변에서 사랑을 회상하는 <목소리>, 이어 육체적 사랑에 눈뜨는 내용인 <키스>와 사랑의 고통을 보여주는 <뱀파이어>, 섹스의 신비를 담은 <마돈나>, 그리고 <질투>로 이어지다가, 마지막으로 절망감을 표현한 <절규>로 끝난다.” - 수 프리도, <에드바르 뭉크-세기말 영혼의 초상>


<생의 프리즈> ‘사랑’은 뭉크가 최초로 선보인 연작으로 각기 다른 시기에 태어난 작품들을 새롭게 배열한 것이었다. 부연하자면 각각의 그림들은 화가의 품을 떠나 자신의 삶을 살다가 우연히 다시 만나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래서인가 뭉크는 자신의 작품을 ‘자식들’이라고 불렀다.


화가의 역할 중 하나는 ‘자식들’의 각기 다른 영혼이 서로 공명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뭉크가 번쩍이는 유약으로 표면을 덮는 것을 혐오하면서 마무리가 덜 된 것 같은 그림을 그리게 된 것도 이런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처럼 ‘자식들’의 삶을 억누르고 싶지 않았다. 그림을 가두는 황금색 액자도 치워버렸고, 그림의 의미를 규정하는 제목도 짓지 않으려 했다. 작품들은 각기 다른 제목으로 불리다가 나중에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때로는 같은 주제를 다른 버전으로 그리면서 작품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사했다. 그래서인가 그의 그림들은 다양한 해석을 낳는다.


좌) 그림 6 <질투>, 1895 / 우) 그림 7 <절규>, 1893, Tempera and casein on cardboard


<절규>를 보며 어떤 이는 화가를 따라다녔던 ‘죽음의 그림자’를 떠올렸고, 다른 이는 “신은 죽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를 대신할 아무것도 없다”라고 외치는 니체의 선언이 가져온 파장을 느꼈다. 누군가는 모든 창조가 시작되는 카오스(패닉)로 해석하기도 했다.


뭉크의 그림처럼 그의 삶도 쉽게 규정할 수 없다. 그는 죽음의 징후를 매달고 태어났지만 81살까지 살아냈고, 노르웨이에서 배척되었지만 노르웨이의 국민화가가 되었으며, 표현주의의 창시자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었지만 표현주의자로 묶어둘 수 없는 다양성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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