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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윤숙 Aug 07. 2023

고흐 - 너무나도 성실하고 이성적인 미치광이

 “마음을 달래주는 어떤 것을 그리고 싶다”

가난, 불화, 무능함, 광증(狂症).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90)를 수식하는 말들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반 고흐는 그림을 팔지 못해 동생 테오가 보내 주는 생활비로 살아갔으며, 정신병을 앓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로 인해 그는 불운한 천재 예술가의 전형이 되었고 그의 작품들은 광기의 산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반 고흐는 미치광이로 보기엔 너무나도 성실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9년 남짓한 기간 동안 화가 생활을 하면서 반 고흐는 약 800여 점의 유화와 700여 점의 스케치를 남겼다. 그리고 동생 테오에게 보낸 600통이 넘는 편지를 통해 자신이 본 것, 그리고 있는 것, 그리고 싶은 것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 편지들은 반 고흐가 스스로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고 매우 계획적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게다가 그 글들은 너무나도 설득력이 있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그의 꿈틀대는 붓질과 강렬한 색조는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 그의 때 이른 죽음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광인(狂人)이라는 낙인을 지우고 그의 그림과 삶을 다시 보자. 무엇이 보이는가?    

  


흙투성이 구원자와 흙냄새 나는 그림


고흐는 준데르트라는 네덜란드의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6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온순하고 성실한 개신교 목사였고 어머니는 그림과 글쓰기에 재주가 있는 외향적인 성격의 여인이었다. 반 고흐의 첫 직업은 화상(畫商)이었고 두 번째 직업은 전도사였다. 벨기에의 탄광촌 보리나주가 전도사가 된 반 고흐의 부임지였는데 그곳의 가난한 사람들은 이 조용하고 예민한 청년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이 세상의 맨 밑바닥 심연에 빠진 사람이 바로 광부야. (나는) 점점 이 가난하고 슬픈 노동자들, 소위 최하층 인간들, 가장 경멸받는 사람들, 보통사람들이 전혀 근거 없이 마치 범죄자나 악당처럼 생각하는, 그 가장 불쌍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감동적인 무엇, 비통한 무엇을 발견하게 되었어.” -반 고흐 (1879)


반 고흐는 탄광촌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교회 당국의 허가도 없이’ 헌신하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권위를 내려놓고 그들을 아꼈는데 그로 인해 해고되었다. 사람들을 돌보는데 몰입한 나머지 ‘탄광촌 사람들보다 더 끔찍한 몰골로’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그림 1.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Nuenen, Oil on canvas, 73 x 95 cm, 크뢸러 뮐러 미술관


이후 반 고흐는 네덜란드의 헤이그와 안트베르펜을 비롯한 몇몇 도시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화가가 되어도 그의 관심은 여전히 가난한 사람을 향해있었다. <감자 먹는 사람들>[그림 1]은 먹을 것이라고는 뜨거운 차와 삶은 감자뿐인 가난한 농민의 저녁식사를 그린 것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사람들, 노동자 농민의 현실을 그렸다는 점에서는 사실주의적 그림이라 할 수 있으나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많이 달랐다.


좌) 밀레, <이삭줍기>, 1857 / 가운데) 밀레, <씨 뿌리는 사람>  1850 / 우) 반 고흐, <씨 뿌리는 사람>, 밀레의 그림을 모사함, 1889


반 고흐는 농민을 숭고하게 그려낸 밀레(장 프랑수아 밀레 Jean-François Millet, 1841~1875)를 존경했지만 밀레처럼 농민의 모습을 우아하게 미화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농민화에서 ‘향수 냄새’가 난다면 그것은 실패한 그림이다. 고흐는 자신의 그림에서 ‘찐 감자 냄새’나 ‘거름 냄새’가 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보이는 대로 그려서는 전달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반 고흐는 사실이 아니라 자신이 느낀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 왜곡을 선택했다. 색을 덜어내고, 형태를 과장하고, 붓질은 거칠게 남겨두었다. 그래서인가 비쩍 마른 농민의 굵은 손마디에서는 땅을 파고 감자를 캐낸 흙냄새가 날 것만 같다.   

  


파리 – 아를 – 생 레미 요양원


화상(畫商)이었던 테오는 형의 그림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사실주의는 이미 지나간 사조였고 어둡고 무거운 그림은 인기가 없었다. 반 고흐도 변화의 필요성을 느꼈는지 1886년에 안트베르펜을 거처 파리로 가게 된다. 루벤스의 화려한 걸작들, 색채가 진동하는 들라크루아의 작품들, 일본 판화, 새로운 유행이 된 인상주의가 반 고흐의 그림을 변화시켰다. 그는 일본 판화의 영향으로 원근법을 파괴하고 단순하고 선명한 색조를 사용하게 되었고, 인상주의의 짧은 붓터치를 익혔다.


그림 2. <탕기영감>, 1887, Paris, 캔버스에 유채, 92 x 75 cm, 로뎅 갤러리, 파리


<탕기 영감>[그림 2]이 이 시기에 그려졌다. 그림의 모델이 된 탕기 영감은 화랑을 운영하며 인상주의 화가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그는 파리 코뮌을 지지했던 사회주의자였는데 젊은 화가들은 그의 화랑을 사교장처럼 이용하며 예술에 관한 토론을 벌이곤 했다. 그중에 반 고흐도 있었는데 고흐는 자신에게 새로운 화풍을 가르쳐준 이 노인을 눈을 내리깔고 두 손을 맞잡은 부처와 같은 모습으로 표현했다. 탕기 영감 뒤로 고흐에게 영향을 준 일본 회화 작품들이 보인다.


파리에서 생활하게 된 반 고흐는 조금씩 변해갔다. 그는 시끄럽고 난잡한 대도시의 술집에서 신을 저주하는 사람들과 밤새 술을 마셨고, 밀레가 아니라 고갱의 강렬한 그림과 화려한 입담에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고독했고 화가들의 경쟁에도 지쳐있었다. 새로운 공간이 필요했다.

 

그림 3. <포룸 광장의 밤의 카페>, 1888 / 그림 4. <해바라기>, 1888


따뜻한 태양이 있고 생활비도 싼 프로방스의 작은 마을 아를이 그의 해방구가 되었다. <포룸 광장의 밤의 카페>[그림 3], <해바라기>[그림 4]가 그곳에서 그려졌다. 그는 서서히 자신의 독특한 필선을 선보이기 시작했고, 형태가 아니라 색 자체에 의미를 담아 표현하게 된다. 예를 들어 노란색은 태양과 삶의 상징이자 신의 빛이었고, 진실한 감정의 색이었다.


아를에 도착한 반 고흐에게는 멋진 그림을 그리는 것만큼이나 설레는 꿈이 있었다. 바로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성향이 강했던 고흐는 화가란 모름지기 노동자라고 생각했고, 조합을 만들고 함께 생활한다면 세파에 상관없이 예술가로서의 삶을 지켜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염두에 둔 동반자는 단연 고갱이었다. 그는 고갱과 함께 “슬픔으로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는 예술”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둘은 전혀 맞지 않았고,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을 끝으로 2달 만에 파국을 맞았다.


그림 5. <별이 빛나는 밤>, 1889 / 그림 6.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밀밭>, 1889


고갱이 떠나고 아를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마친 고흐는 이후 반복적인 환각에 시달리다 스스로 생 레미 요양원에 자진해서 입원을 한다. 그곳에서도 고흐의 붓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가끔씩 발작에 시달렸지만 그림을 그리는 일이 최선의 치료책이라고 생각하여 정신이 온전할 때면 언제나 붓을 들었다. 생 레미에서 <별이 빛나는 밤>[그림 5],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밀밭>[그림 6]을 그리며 고흐의 필선은 더욱 대담해지고 색채는 더욱 강렬해졌다.




건강한 정신과 사랑으로 찾아낸 현실 -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애처롭다


병원을 나온 고흐의 마지막 행선지는 파리 인근의 오베르 쉬아즈였다. 그즈음 그의 그림은 서서히 파리 화랑에서 전시되며 주목을 받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반 고흐는 그곳에 도착한 지 두 달여 만에 권총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사람들은 고흐의 자살을 손쉽게 정신병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 1898~1948)는 전혀 다르게 해석을 내놓았다.


“우리는 반 고흐의 건강한 정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는 평생토록 단 한 번 손을 그을렸고, 남은 인생 동안, 단 한 번 왼쪽 귀를 잘랐을 뿐이다.”
"미치광이란 사회가 듣기도 싫고, 표명되는 것도 원치 않았던 넌더리 나는 진실들을 말하는 사람이지요."
- 앙토냉 아르토,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1947


아르토가 보기에 반 고흐는 위선과 거짓말, 저열한 차별과 부조리로 가득한 사회의 공범자가 되기보다 차라리 미치광이가 되기를 선택한 사람이었다. 그는 평범한 대상들을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려냈다. 그로 인해 사회는 그를 살해했다. 살해 도구는 간단했다. ‘남들처럼 살아라.’ ‘이제 돈 되는 일을 해야 하지 않느냐.’ ‘보이는 대로 그려라.’ 이런 말들이 그를 자살시켰던 것이다.


반 고흐는 죽기 전까지 그런 상투적인 목소리와 싸웠다. 그는 남들처럼 살기 않고 사람들을 구원하려 했고, 돈 되는 일 보다 의미 있는 일을 하려 했으며, 보이는 ‘인상’이 아니라 느껴진 것을 ‘표현’하려 했다. 그 과정은 참으로 고달팠으나 매우 아름다웠고, 그는 어디서나 쉽게 사랑에 빠졌다. 해바라기, 밀밭, 의자, 사이프러스, 붓꽃, 아몬드나무, 시골길, 가난한 농부, 슬픈 여인. 그의 캔버스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을 그는 사랑했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사람만 찾아낼 수 있는 그들의 애처로운 현실을 발견했다.


 “어디를 보든 그에게는 존재하는 것들의 수고가 보였고, 그렇게 알아본 수고가, 그에게는 현실을 구성하는 것들이었다.” - 존 버거, <초상들>


별이 빛나는 밤의 소용돌이는 별이 빛을 만드는 수고로운 과정이고, 사이프러스 나무의 흔들림은 나무가 초록을 만드는 수고로운 노력이었다. 사랑하는 대상에 깊이 빠져든 반 고흐는 자신이 발견한 그런 현실을 캔버스에 담았고 마침내 우리가 그것들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우리가 그토록 그의 그림을 사랑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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