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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윤숙 Aug 02. 2023

폴 세잔 - "현대회화의 아버지"의 두 가지 역설

아둔한 눈으로 이룩한 회화의 혁명

 

그림 1. 폴 세잔, <자화상>, 1885-87, Oil on canvas, 93 x 73 cm, 개인소장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그림 1]은 흔히 “현대회화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매우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미술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런 표현은 세잔의 회화를 이해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20세기 회화의 문을 연 앙리 마티스[그림 3]와 파블로 피카소[그림 4]가 모두 세잔을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고 고백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 두 화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강렬한 색을 사용한 마티스는 색채혁명을 이룩한 야수파의 개척자였고, 피카소는 형태를 해체하고 재결합하는 규비즘(입체주의)의 창시자였다. 이처럼 성향이 다른 두 사람이 모두 세잔을 자기 예술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고 고백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세잔의 그림 안에 이질적인 두 화파로 분화될 수밖에 없는 모순적인 특징이 우글거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의 예술을 통해 그가 "현대미술의 아버지"가 된 까닭을 알아보자.


그림 2. 앙리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 1905 / 그림 3.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1907




마음을 따라 움직이는 아둔한 눈 - 원근법을 해체하고 다시점을 도입하다


세잔의 아버지는 프랑스 남부 엑스라는 지역의 부유한 은행가였는데 아들에게 법학을 전공하라고 요구했다. 세잔은 화가가 되고 싶었으나 아버지의 바람대로 법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열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는 22살에 법학을 포기하고 그림을 전공하기 위해 파리로 간다. 하지만 심약하고 내향적인 세잔은 화려한 도시 파리에 적응하지 못했다. 한동안 그는 고향과 파리를 오가며 아버지의 은행 일과 그림 그리는 일 사이에서 진로를 결정하지 못했다. 그러다 결국 세잔은 화가가 되기로 결심을 굳히게 된다.


명예를 소중히 여겼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에콜 드 보자르(국립 예술 학교)에 입학해 명망 있는 화가의 길을 가길 바랐으나 그마저도 이룰 수 없었다. 세잔이 예술학교 입학시험에 계속 떨어졌기 때문이다. 나중에 세잔은 자신이 낙방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단순한 인물이고 아둔한 눈을 가졌소. 두 번이나 보자르에 응시했지만 들어가지 못했지. 머리가 내 관심을 끌기에 그걸 너무 크게 그려 버렸거든.”


이 사연은 이 우직한 화가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잔의 말대로 그는 ‘아둔한 눈’을 가졌다. 그것은 지금까지 화가들이 가졌던 ‘세련된 눈’과는 다른 눈이었다.  그의 눈은 다른 사람들이 보라는 대로 보는 법을 모르고 자신의 마음을 따라 덜컹거린다. 그런데 이런 눈 덕분에 그는 고전주의의 원근법과 결별할 수 있었다.


그림 4.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 원근법에 따라 하나의 소실점으로 향하는 공간이 수학적으로 잘 구현되어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원근법이 정착된 이래로 화가들은 수학적으로 잘 재단된 공간을 평면에 재현해 왔다. [그림 4] 이렇게 표현된 공간에서 사물들은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규칙적으로 작아진다. 카메라로 찍은 사진처럼 사실적인 이런 공간을 우리는 매우 자연스럽게 여기지만, 사실 두 개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인간의 시각과는 맞지 않는 방법이다. 그럼에도 수백 년 동안 화가들을 통해 전수된 원근법은 그와 다른 방법으로 공간을 보는 감각을 둔화시켰다. 그런데 세잔의 아둔한 눈이 마침내 원근법을 익히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을 따라 세상을 보고야 말았다.


그리 5.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 1895-1900, Oil on canvas, 74 x 93 cm, 오르세 박물관, 파리


 <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그림 5]에는 여러 개의 시점이 공존한다. 사과가 담긴 접시는 위에서 내려다본모습이고, 오렌지가 담긴 그릇과 물병은 옆에서 본 모습니다. 이전의 화가들이라면 회화의 기초도 모르고 그린 그림이라 하겠지만 사실 이것이 우리가 보는 방식이다. 우리는 정지된 카메라가 아니라서 관심이 가는 사물을 자세히 보려고 계속 시점을 옮긴다. 그런데 이렇게 옮겨 다니면서 본 대로 그림을 그리면 물체의 형태를 표현하는데 문제가 생긴다. 특히 다양한 곳에서 다 볼 수 있는 커다란 사물들이 문제였다. 이 그림에서는 테이블이 문제였다. 세잔은 뒤틀린 테이블의 형태를 감추고자 멋진 꼼수를 썼다. 테이블에 하얀 천을 드리워 형태가 어긋난 것을 감춰 버린 것이다.


<석고 큐피드가 있는 정물>[그림 6]은 다양한 시점이 공존하는 세잔의 특징이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원근법은 안중에 없다. 멀리 있는 사과가 가까이 있는 사과보다 더 크고, 심지어 하얀 면이 바닥처럼도 보이고 벽면처럼도 보인다. 이렇게 세잔의 회화는 원근법과 결별했다.      


그림 6. 폴 세잔, <석고 큐피드가 있는 정물>, 1895, Oil on paper on wood, 71 x 57 cm, 코톨드 미술관, 런던




고전주의와 인상주의의 만남


그림 7. 폴 세잔, <아쉴 엥프레르>, 1867-70, Oil on canvas, 201 x 121 cm, 오르세 박물관, 파리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화가들은 카페에 모여 한담과 토론을 즐겼다. 세잔도 지인을 따라 그곳을 찾았지만 내성적인 성격 탓에 어울릴 수가 없었다. 마네와 드가와 같은 화가들의 눈에도 그는 지방 사투리를 쓰는 촌뜨기 괴짜였다. 그런 그가 예술학교도 떨어지자 마땅한 스승을 찾을 수 없었다. 루브르 박물관은 그런 세잔에게 멋진 학교가 되어 주었다. 그는 박물관에 걸린 작품들은 모사하며 그림을 익혔는데, 특히 들라크루아와 쿠르베에게 매료되어 강렬하고 어두운 그림을 그렸다.


1870년 살롱에 출품한 <아쉴 엥프레르>[그림 7]가 이 무렵에 그려졌다. 왕좌와 같이 높은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앉은 난쟁이 아쉴의 모습은 매우 기괴하다. 어디를 바라보는지 알 수 없는 남자는 매우 무력해 보이는데, 나이프로 두텁게 칠해진 물감에서는 강한 힘이 느껴지고 색채의 대비는 매우 강렬하다. 무엇보다 모든 색을 품고 있는 듯한 검은색은 공간을 묵직하게 채우고 있다. 이 작품은 살롱에서 낙선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난쟁이 아쉴의 모습은 기이했고 아쉴을 감싸고 있는 검은색은 관람자를 짓누를 것만 같았다.


세잔의 그림에서 검은색을 거두어낸 사람은 인상주의 화가들 중에 성격 좋았던 피사로였다. 그는 세잔에게 “자연과 접촉하며 느낀 감각을 표현하라”는 조언을 해주며 인상주의 기법을 전수한다. 이후 세잔이 그린 <목 매달아 죽은 사람의 집>[그림 8]은 이전보다 훨씬 밝아진 색조로 표현된 진동하는 빛이 담겨있다. 하지만 인상주의자들의 그림과 비교해 보면 훨씬 견고하고 단단한 형태를 느낄 수 있다.


 

그림 8. 폴 세잔, <목 매달아 죽은 사람의 집>, 1873, Oil on canvas, 56 x 66 cm, 오르세 박물관, 파리


피사로의 권유로 세잔은 인상주의 전시에 참여했지만 본질적으로 인상주의자가 될 수 없었다. 망막에 맺힌 영상을 담아내는 인상주의는 대상이 무엇이든 반짝이는 빛으로 환원해 버린다. 바위와 인체, 나뭇잎과 바다와 같이 각기 대상들은 모두 인상주의 그림 안에서 일렁이는 빛이 되어 사라진다. 세잔은 그런 기법으로는 대상의 본질을 담아낼 수 없다고 여겼다. 그는 자신의 목표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사물의 본질적 구조를 드러냄으로써 인상주의를 미술관의 작품처럼 견고하고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다.” - 폴 세잔



세잔의 역설: 견고한 형태와 일렁이는 빛 그리고 색으로 복원된 원근법


세잔은 사물의 기저에는 변화하지 않는 본질적인 구조가 있다고 믿었고 그것을 재현하려 했다. <생 빅투아르 산>[그림 9]에서는 원추형으로 우뚝 솟아있는 산이나 단순한 입방체로 묘사된 집과 같이 기하학적 형태로 그려진 사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의 신기한 점은 거대하고 단단한 바위산에서 인상주의 그림이 보여주는 일렁이는 빛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 그림은 견고한 형태와 유동적인 색채의 생동감을 모두 지니고 있다. 이것이 세잔 그림이 지닌 첫 번째 역설이다.


그림 9. 폴 세잔, <생 빅투아르 산>, 1892–1895, oil on canvas, 73 x 92 cm, 반스 미술관, 필라델피아


색에 있어서도 세잔은 자연을 그대로 재현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보색대비를 통해 윤곽선을 표현하고 정확한 색조를 통해 대상을 또렷하게 드러나게 했다. 이런 작업은 화면 전체에 배치된 색의 상관관계를 함께 고려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색으로 윤곽은 물론 거리감도 표현했다. 뒤로 물러나는 느낌을 주는 푸른 계열의 색은 원경에, 전진하는 느낌을 주는 붉고 노란 계열의 색은 앞에 배치되었다. 이로 인해 색면으로 채워진 화면에서 원근법이 적용된 것처럼 깊이감이 느껴진다. 이것이 세잔의 그림이 지닌 두 번째 역설이다.


이렇게 인상주의의 방식으로 고전회화를 완성하겠다는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달성한 순간, 세잔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현대미술의 예언자가 되어 있었다. 기하학적 형태로 형태를 단순화하고 다시점으로 공간을 해체하는 방법은 피카소의 마음을 자극하여 입체주의를 열었고, 대상의 실제 색을 재현하지 않고 색으로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은 마티스를 거치며 색채를 해방하게 된다. 이것이 세잔이 현대회화의 아버지가 된 방식이다.


미술평론가 존 버거는 세잔의 회화를 이렇게 요약했다.


이 모든 것에 담긴 비밀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눈으로 지각하는 대상은 그렇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구축되는 것, 자연과 우리 자신에 의해 조합되는 것이라는 세잔의 확신이었다. - 존 버거,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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