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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윤숙 Jul 04. 2023

인상주의 - 찰나의 빛, 순간의 색채

지성을 덜어내고 지각으로 그리는 그림

1863년 살롱에서 낙선했던 일군의 화가들은 점점 더 살롱의 심사 제도를 경멸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후에 몇 번 살롱에서 상을 받았지만 결국에는 출품 자체를 거부하고 화가들끼리 조합을 만들어 직접 단체전을 열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그 꿈은 1874년에 마침내 실행되었다.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 192),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1919) 등이 이 전시에 참여했다. 이들은 단체 이름을 멋지게 지어보려 노력했으나 좀처럼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결국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 예술가들의 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를 열었다.


전시를 준비한 신진 화가들은 꿈에 부풀었지만 신문에 실린 기사는 조롱에 가까웠다. “너무 충격적이니 임산부가 보면 안 된다,”, “역겹고 멍청하고 더럽다.”, “대단히 웃기는 전시회”, “미에 대한 선전포고”, 등 비난이 쏟아졌다. 그 속에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라는 평이 있었다. 그림을 정교하게 완성하지 못한 채 스케치와 같은 순간적인 인상만을 그렸다는 야유였다. 하지만 화가들은 이를 받아들여 스스로를 “인상주의자”라고 불렀다. 현대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화파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무엇이 보이는가’보다 ‘어떻게 보이는가’가 중요하다


인상주의자들은 들라크루아의 다양한 색채 사용법과 ‘사실을 그린다'는 쿠르베의 선언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 시대의 현실을 그리는 것과 더불어 그 현실을 ‘보이는 대로’ 그리는 문제에 천착했다. ‘무엇이 보이는가’보다 ‘어떻게 보이는가’가 중요했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인상주의자들은 우리 눈이 보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그 표면이 반사하는 각양각색의 빛 자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때문에 이들은 풍부한 빛을 찾아 야외로 나가 사물이 반사하는 빛, 그 순간적 이미지를 담았다.


그림 1 모네, <인상-해돋이>, 1873, 캔버스에 유화, 48x63 cm, 오르세 박물관, 파리


인상주의 첫 번째 전시회에 걸린 모네의 <인상-해돋이>[그림 1]는 인상주의의 선언문 같은 작품이었다. '인상주의'라는 말도 이 작품에서 유래했다. 모네는 이 그림을 르 아브르에 있는 자기 집 창가에서 그렸는데 ‘르 아브르 풍경’이라고 제목을 붙일 수 없었다. 그의 눈앞에 있었던 것은 분명 붉은 태양과 태양빛이 일렁이는 물, 배와 사람이었을 테지만, 모네는 그것의 구체적 형태를 볼 수 없었고 정확한 형태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형태를 알아내고 재현하는 일, 그것은 지성의 작용이다. 모네는 지성이 아니라 시각만을 이용하려 했다. 순간적으로 눈에 들어온 빛을 스케치도 하지 않고 바로 캔버스에 색으로 표현한 것이다. 세잔은 그런 모네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모네가 가진 것은 오직 눈 밖에 없다. 그러나 얼마나 위대한 눈인가!”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검은 점이 인간이고, 붉은 선 몇 개가 노을이 될 수 있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모네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림은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어떤 측면의 인상을 얻는” 것이라 말했다. 인상이란 순간순간 변하는 자연의 이미지이며, ‘순간성’이야말로 회화가 추구해야 할 목표라 여겼던 것이다.




찰나의 빛, 순간의 색채


같은 이름으로 불렸지만 인상주의자들의 면모는 정말 천차만별이었다. 인상주의자 그룹에서 분란을 중재하는 아버지 같은 역할을 했던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는 짧은 붓터치로 야외 풍경을 그렸는데, 특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도시 풍경을 매력적으로 그렸다. [그림 2]


좌) 그림 2. 카미유 피사로, <흐린 아침 몽마르트르 대로>, 1897, 캔버스에 유채 / 우) 그림 2.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춤>, 1876


르누아르는 풍경보다는 인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불쾌한 것이 너무도 많은 세상에서 “그림이란 즐겁고 유쾌하고 예쁜 것이어야 한다.”라고 말하며 행복한 야유회[그림  2], 관능적인 여성 누드를 많이 그렸다. 그러다 조롱받던 인상주의가 세상의 찬사를 받게 될 무렵 르누아르는 오히려 화풍을 바꿔 보다 윤곽이 뚜렷하고 단단한 형태의 기법을 모색했다.


좌) 그림 3 베르트 모리조, <요람>, 1872, 캔버스에 유화, 56 x 46 cm / 우) 그림 4 에드가 드가, <스타, 무대 위의 무희>, 1878


여성 화가였던 모리조(Berthe Morisot, 1841-1895)는 풍경이나 아이와 함께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많이 그렸다. [그림 3] 이는 살아있는 모델을 직접 그리는 것이 당시 여자들에게 금지되었기 때문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하지만 이 같은 소재는 자기 시대의 삶의 단면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인상주의에 가장 어울리는 것이기도 했다.


반면 드가는 야외에 나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싫어했다. 심지어 그는 들라크루아와 쿠르베와 대적했던 신고전주의의 대가 앵그르를 존경하고 있었다. 그의 호기심을 끄는 주제는 포즈를 취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사람들의 움직임이었다. [그림 4]  


이렇게 다양한 특징을 지닌 화가들은 함께 총 8번의 전시회를 열었는데 회차에 따라 참가자들이 각기 달랐다. 인상주의자들이 흠모했던 마네는 한 번도 출품하지 않았고, 피사로만이 모두 참여했다. 그럼에도 이들 모두를 인상주의로 부르는 이유는 이들이 아카데미 풍을 벗어나 새로운 스타일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서로 가깝게 지냈기 때문이다. 또 모두 지성을 동원하여 파악한 형태가 아니라 색채와 빛에 관심이 있었고, 찰나의 순간에 시각으로 지각한 것을 표현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모네, 인상주의의 방식으로 인상주의를 넘어선 화가


모네는 인상주의자라는 말과 가장 어울리는 화가였다. 1990년에도 그는 순간의 인상을 담아내겠다는 일관된 목표를 가지고 건초더미를 그리러 나섰다. 두 개의 화폭에 흐린 날과 볕이 든 날의 건초 더미를 그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려나가는 동안, 그는 빛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맑음과 흐림으로 양분할 수 없는 다양한 빛의 상태가 있었고 그때마다 건초 더미는 물론 땅과 대기도 다른 색을 띠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빛과 함께 사물과 공간이 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변화를 무시한다면 회화는 인간이 경험에서 시간을 그리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모네는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의 단면들을 담고자 했다. 그 결과 15점의 <건초 더미> 연작[그림 6-1,2]이 세상에 나왔다.


<건조 더미> 연작 중 - 좌) 그림 6-1 모네, <건초 더미, 눈 내린 아침>, 1990 / 우) 그림 6-2 모네, <건초 더미, 하얀 서리의 효과>, 1891


그런데 유독 인상주의 그룹만은 모네를 비난했다. 인상주의자들이 보기에 <건초 더미>는 건초 더미가 아니라 색 면에 가까웠고, 비슷하게 반복되는 15점의 연작은 하나의 패턴을 조금씩 변화시키며 찍어내는 도배처럼 ‘깊이 없는 장식’ 같았다. 때문에 화가 기요맹은 “구성의 완전한 결여”라고 비판했다. 그런데 이런 비판이야말로 오히려 지금까지 인상주의가 담아 온 순산적인 빛이라는 것 역시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 ‘구성된’것임을 자백하는 것이었다.


인상주의가 사물이 아니라 빛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회화는 더 이상 2차원 평면에 재현된 3차원 공간이 아니었다. 사물에 닿아 반사되는 빛을 순간적으로 포착한 이미지는 마치 소실점이 사라진 사진처럼 평면적인 시간의 단면, 2차원 그 자체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 빛은 여전히 어떤 사물의 빛이었다. 그들은 사물과 공간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다만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지각되는가를 질문했을 뿐이다.


모네, <초록색 드레스를 입을 까미유>, 유채, 1866


모네의 초기작인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까미유>는 인상주의가 포착한 순간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반짝이는 초록색 공단 치마는 간결하게 표현되었음에도 그 견고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1990년 건초더미를 마주한 모네는 공간을 그렇게 시간과 분리하여, 즉 시간이 멈춘 상태의 공간을 포착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시간과 더불어 공간도 계속 변화하고 있지 않은가? 건초는 공간을 이동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 시간과 더불어 변화하고 있지 않은가? 그 질적인 변화야 말로 모네가 만난 ‘사실’이었고 연작은 변화를 담기 위해 모내가 찾아낸 방편이었다.


<루앙 대성당> 연작, 1894


연작은 공간과 시간, 대상과 주체에 대한 익숙한 관념들에 대해 많은 질문을 내포한다. 순간순간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건초더미, 그것은 태양 빛이 변한 것일까 사물이 변한 것일까? 아니면 그것을 보는 내가 변한 것일까? 혹은 이 모든 것은 동시적인 변화는 아닐까? 그렇다면 혹시 시간이란 공간의 변화 그 자체이며, 공간은 그렇게 시간과 맞물려서만 존재할 수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회화는 어떻게 그 시공간을 담을 수 있을까? 2차원 평면인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회화가 시간을 담는 것은 역으로 공간의 변화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수많은 질문들을 담은 연작은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이라는 환상을 깨버렸다. 오직 시간과 더불어 변화하는 공간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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