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쇠라와 분할주의, 감상자의 눈에서 완성되는 그림
‘후기 인상주의(Post-Impressionism)’라는 단어는 후기 인상주의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 단어는 인상주의를 계승했다는 느낌을 주지만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에게서 인상주의의 흔적을 찾는 건 쉽지 않다. 폴 세잔,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툴루즈 로트레크 등 후기 인상주의자로 분류되는 화가들 중 인상주의 기법이 남아있는 화가는 짧은 붓터치를 사용한 반 고흐뿐이다.
자고로 어떤 이들을 묶어 ‘~주의자’라고 칭할 땐 주제와 기법에 있어 어떤 통일성을 지녀야 한다. 그런데 후기 인상주의자들에겐 그마저도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공통점이라고는 인상주의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갔다는 것뿐이다. 이런 까닭에 어떤 번역자들은 후기 인상주의라는 말 대신 ‘탈인상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헌데 후기 인상주의로 분류되는 화가들이 모두 인상주의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들 중에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 1859-1891)와 폴 시냐크(Paul Signac, 1863-1935)는 스스로를 ‘신인상주의(Neo-Impressionism)’라고 불렀다. 사실 이들이 사용한 ‘신인상주의’라는 말은 이들의 가치를 알아본 한 평론가가 붙여준 이름이었다. 쇠라는 처음에 신인상주의라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시냐크는 이 단어를 좋아했다. 색에 주목한 인상주의자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스스로를 “구세대” 인상주의자들과 구분 지을 수 있는 적정한 단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신세대” 인상주의자들은 인상주의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으면 또 어떤 새로움을 만들어냈을까?
인상주의 화가들이 중장년이 되어가던 무렵 파리에 등장한 청년 화가 조르주 쇠라는 매우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는 종종 거만해 보일 정도로 자부심이 강했고 때로는 매우 소심해졌으며 어떨 땐 몇 주 씩 은거하며 아무와도 만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를 새로운 유파의 리더로 여겼다. 그에겐 완전히 새로운 자신만의 미술을 완성하겠다는 포부와 끈질기게 새로운 이론을 정립해 가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쇠라 역시 처음 미술을 시작했을 때엔 평범한 미술학도로서 석고상을 데생하며 아카데미의 화풍을 익혔다. 성실하고 차분했지만 그쪽으로는 특별한 재능도 흥미도 없었던 그는 폭넓은 연구와 독서를 통해 호기심을 채워나갔다. 많은 그림을 분석하고 과학 서적들을 보면서 쇠라는 미술에도 음악처럼 법칙과 질서가 있다는 생각에 매료되었다. 작곡가들이 대위법이나 화성학에 따라 곡을 짓듯 화가들도 어떤 법칙에 따라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쇠라를 흥분시켰던 과학자들의 색채 이론이나 그가 만든 채색 법칙은 사실 우리에겐 매우 익숙한 것들이다. [그림 1] 색에는 빨, 파, 노 3 원색이 있고, 3 원색을 각각 2개씩 섞으면 주황(빨+노), 녹색(파+노), 보라(빨+파)가 된다. 이런 색들로 만들어진 색상환에서 마주 보는 두 색은 보색관계가 되고, 보색은 나란히 있으면 서로를 돋보이게 하고 섞으면 어두운 회색이 된다. 이런 간단한 색채 원리는 당시에도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들라크루아와 인상주의자들도 가급적 물감을 섞지 않았고 색을 돋보이게 하려고 보색을 이용했다. 그런데 쇠라가 그들과 다른 점은 수학적 엄격성을 가지고 색채의 체계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채색법이 “광학적 혼합”이다. 말은 어려워 보이지만 이 역시 원리는 간단하다. 예를 들어 빨간색 점과 파란색 점을 고르게 찍어서 보라색처럼 보이게 하는 병치시키는 방법이 이에 해당된다. 사람들은 이런 방법에 주목하여 그를 점묘파(pointillism)라고 불렀다. 그러나 쇠라는 ‘분할주의(divisionism)’라는 말을 고집했다. 예를 들어 자연에서 보이는 보라색을 보다 근원적인 색인 빨강과 파랑으로 분할하는 것이 화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때 분할 된 색을 다시 혼합하는 역할은 감상자에게 맡겨진다. 그렇다면 이들의 그림이 완성되는 곳은 캔버스가 아니라 감상자의 망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색과 선은 회화의 언어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이 젊은 도전자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런데 쇠라보다 스무 살 가량 많은 피사로가 이들의 이론을 듣고는 자신의 화풍을 전향하고 두 화가를 인상주의 전시회에 초대해 주었다. 하지만 인상주의자들조차 이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르누아르는 쇠라가 참석한다는 이유로 인상파 전시회에 불참했다.
사람들은 같은 원리로 그려진 신인상주의자들의 그림이 다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화가의 개성은 사라지고 작은 점으로 채워진 그림은 차가운 인쇄물처럼 느껴졌다. 평론가들은 새로운 기법이 화가들의 개성을 완전히 파괴했다고 일갈했다. 이들의 눈에는 “쇠라의 절대적 차분함과 자제, 시냐크의 화려한 열렬함, 카미유 피사로의 상당히 우직한 서정성”이 구분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림 2, 3]
쇠라의 <그랑자트 섬의 오후>[그림 4]가 이때 전시되었다. 파리 사람들에게 인기 있었던 주말 휴양지 풍경을 그린 이 그림은 인상주의의 주제와 색채를 계승했지만 한 순간의 인상을 포착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쇠라는 인상주의처럼 무계획적이고 무분별하게 색을 사용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본질적이고 영구적인 형태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의 의도대로 이 그림에 우연적인 요소는 하나도 없어 보인다. 모든 형태는 그것이 있어야 할 위치에 놓여있다. 사람들은 이집트 그림처럼 하나의 패턴이 되었으며 색점들은 매우 과학적으로 고르게 찍혔다. 심지어 이 작품의 가장자리에는 색점으로 채워진 테두리가 있는데, 쇠라가 그림의 색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주변 색의 보색들을 찍어 놓은 것이다. 이런 세심한 배치 덕분에 견고 원색의 색점들은 고유의 색을 잃지 않고 빛 알갱이처럼 반짝인다.
쇠라는 특정한 색채와 선이 관람자의 마음을 자극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서커스>[그림 5]는 이런 믿음 하에 만들어졌다. 노란색과 상승하는 곡선으로 표현된 곡예사는 가볍고 경쾌한 느낌을 주고, 관람석의 평행선과 파란색은 조용히 가라앉는 느낌을 준다. 쇠라는 이렇게 정성껏 배치한 화면이 액자에 의해 망가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이전처럼 작은 색점으로 캔버스에 작은 테두리를 그려 넣어 그림과 액자 사이에 완충지대를 만들고 마지막에는 액자마저 자신만의 방법으로 채색해 버렸다. 그래서 이 그림은 액자까지 작품의 일부가 되어 미술관에 걸려있다.
신인상주의의 화풍은 피사로를 제외하면 다른 화가들에게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런데 피사로도 얼마 안 가 이 냉정한 기법에 회의를 느끼고 다시 인상주의로 돌아갔다. 이런 회의적인 반응들은 이들의 발상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누가 누구의 화풍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는 시대는 끝이 났다. 이제 저마다 자기만의 방식을 제시하고 세상의 동의를 구하는 시대로 돌아선 것이다. 어느 평론가의 말마따나 “더 이상 화파는 존재하지 않는다. 계속 갈려나가는 무리들이 있을 뿐이다.” 이런 시대에 신인상주의자들은 자신만의 방법을 구축했고 끈질긴 실험을 통해 회화라는 세계에 새로운 영역을 더했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히 예술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