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파와 청기사파, 독일에서 시작된 새로운 예술운동
표현주의는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19세기 내내 예술의 중심지가 파리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독일은 15-16세기에 인쇄술과 동판화 등으로 문화혁명의 기술적 영역을 이끌었다. 그러나 낭만주의 이후에 기록될 만한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었다. 19세기 초반부터 크고 작은 나라들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진통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은 19세기말에 비로소 하나의 민족국가를 이룩했고, 표현주의라는 새로운 예술의 발상지가 되었다.
표현주의라는 말은 뭉크의 작품을 인상주의와 대립시키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망막이 외부 세계를 포착하는 그대로를 담으려 했던 인상주의와 달리 뭉크는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며 영혼을 그림에 담았다. 그는 노르웨이 출신이었지만 독일에서 최초로 순회 전시를 열었고, 여러 논란 속에서도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독일인들은 뭉크의 번뇌에 가장 진지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었다. 표현주의는 바로 그처럼 정신적인 것에 몰입하는 독일인들에 의해 탄생했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뭉크와 표현주의자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둘은 모두 과장된 형태와 색채를 사용하여 인간의 감수성을 표현했다. 다만 뭉크가 개인적인 경험과 우울을 중심에 두었다면 독일 표현주의자들은 보다 폭넓은 주제에 접근하며 유럽 예술을 선도하는 국제적인 아방가르드가 되었다.
드레스텐 대학 건축과에 재학 중이던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년)와 에리히 헤켈(Erich Hecke, 1883–1970)을 비롯한 4명의 학생들 [그림 1]은 건축보다는 미술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이들은 가장 연장자였던 키르히너가 25살일 정도로 매우 젊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초인에게 영감을 받은 이들은 과거와 미래를 잇는 다리가 되겠다는 포부를 갖게 되었다. 이에 1905년 첫 전시회를 개최하며 스스로를 ‘다리파(Brücke, 영어:bridge)’라고 명명하고 짧은 강령을 발표했다.
우리는 모든 젊은이들을 불러 모으고, 미래를 가져다줄 젊은이로써, 공고하게 자리 잡은 낡은 세력으로부터 우리의 삶과 행위를 만들어낼 자유를 탈취하기를 원한다. -키르히너, [다리파 강령] 중에서, 1905년
다리파 화가들은 생활을 같이하며 혁명적이고 새로운 모든 요소들을 한데 모아 공동의 표현 양식을 만들어나갔다. 남태평양과 아프리카 미술품의 원시성과 고딕 예술, 그뤼네발트, 15-16세기 독일 판화의 전통이 그들의 캔버스에서 혼합되었다. 그 결과 심리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적인 색채와 형태가 완성되었다.
다리파가 드레스덴 머물던 시기의 주된 주제는 누드였다. 벌거벗은 인체는 문명의 때가 묻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리파의 관심을 끌었다. [그림 2] 그러나 1910년 무렵에 더 넓은 무대를 찾아 베를린으로 건너간 다리파는 각기 다른 주제와 개성적인 표현으로 나아갔다. 그럼에도 처음에 함께 연구했던 표현요소들은 이후 작품에도 남아 있었다.
헤켈의 <탁자에 앉아 있는 두 남자>[그림 3]의 배경엔 그뤼네발트의 예수처럼 고통 속에서 죽어간 그리스도를 암시하는 그림이 있다. 두 남자는 칼이 놓인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두려움과 불신으로 가득 찬 얼굴로 서로를 바라본다. 누군가 곧 칼을 잡고 상대를 공격할 것이다. 오른쪽 벽에 걸린 초상화 속 남자는 숨 막히는 순간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하지만 관람자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비어있는 몇 개의 의자와 붉은 바닥은 이미 희생자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며 근심과 의혹을 키운다.
키르히너의 <거리풍경>[그림 4]은 베를린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의 움직임을 묘사하고 있다. 전면에 그려진 남자들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모자를 쓴 채 스쳐 지나간다.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인들은 고딕 조각처럼 과장되게 늘어난 몸을 하고 있는데 매우 닮아 보인다. 그런데도 도시인들은 서로를 외면한다. 대도시에서 익명의 무리 속에 숨은 개인은 더욱 고독한 존재가 되었다.
1910-12년 사이 뮌헨에서 결성된 청기사파의 이름은 매우 단순하게 지어졌다.
“우리는 모두 청색을 좋아했고, 마르크는 말을, 나는 기사를 좋아했다.”- 바실리 칸딘스키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 1880-1916)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 등이 소속된 청기사파는 <청기사 연감>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전시장을 공유하기 위해 모인 매우 느슨한 모임이었다. 표현주의라는 이름으로 다리파와 한데 묶이지만 이들에겐 다리파가 대도시에서 느꼈던 공포와 불안이 없었다. 공동체를 구성하거나 특정 양식을 만드는 데도 관심이 없었다. 다만 청기사파도 다리파처럼 니체의 영향을 받았다.
“창조적이기를 원하는 사람은 (...) 우선 기존의 가치를 부수어야 한다.”라고 말한 니체의 말을 따라 청기사파는 유럽의 전통으로부터 벗어나길 바랐다. 이들은 입체파를 비롯한 새로운 회화의 움직임을 모두 주시하고 있었고, ‘원시적인’ 미술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아프리카와 남미 미술품, 러시아와 독일의 민속미술, 아동미술에 이르기까지 ‘세련된’ 유럽 문명이 닿지 않은 예술을 찾았던 것이다. 이렇게 고심 속에 만들어진 새로운 예술 언어로 청기사파는 외부 세계와 교감하거나 영적인 세계를 만나려 했다.
러시아에서 태어난 칸딘스키는 파리에서 새로운 예술 조류를 많이 접하고 뮌헨으로 건너와 마르크를 만났다. 그는 매우 이른 시기부터 추상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추상을 통해 영적 세계를 표현하려 했는데 청기사파 전시회에서도 매우 추상적인 그림을 걸었다. [그림 5]
마르크의 관심을 끈 것은 나무, 동물, 대기와 같은 자연이었다. 특히 그는 동물의 영혼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동물의 눈에 비친 세상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눈에 비치는 대로 풍경과 동물을 그리는 습관에서 벗어난 마르크는 <동물들의 운명>[그림 6]에서 동물에 감정을 이입한 작가의 주관적인 인상을 그렸다. 형태는 조각나고, 비현실적인 색들이 화폭을 채우고 있지만 사슴이 직면한 고통만은 매우 생생하게 전달된다.
유럽 문명과 표현주의 그리고 전쟁
형식은 달랐지만 다리파와 청기사파는 모두 산업화된 문명에 갑자기 속하게 된 인간의 보이지 않는 내면을 표현하려 했다. 이들은 새롭게 도약하고 있는 문명에서 이상함을 감지했다. 다리파는 도시인의 심연에 자리 잡은 두려움과 긴장을 보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표현했다. 반면 청기사파는 우주와 자연이 품고 있는 순수하고 우아한 정신에서 인간의 문명보다 더 큰 가치를 보았지만 적극적으로 비판에 뛰어들진 않았다. 산업화와 기술 발전은 벗어날 수 없는 시대정신이었다. 그런데 발전한 물질문명은 전쟁으로 치닫고 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은 전례 없는 파국을 불러들였고 독일 표현주의도 서서히 사라져 갔다.
러시아가 독일과 적이 되자 칸딘스키는 본국으로 소환되다. 마르크는 독일군에 자원입대 하여 자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말을 탄 기병이 되었다. 그는 전쟁을 ‘유럽을 정화하는 자발적 속죄’라고 예찬하며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다 전사했다. 헤켈도 참전했으나 다행히 벨기에에 주둔한 의무대에 배치되어 살아남았다. 키르히너는 독일군으로 징집되어 훈련을 받은 후 발작을 일으켰고 이후 정신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하지만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37년에 나치는 입체파와 야수파를 비롯한 모더니즘 회화를 ‘퇴폐 미술’로 간주했다. 개인 소장품은 압수되었고, 박물관에 전시된 그림은 팔아버리거나 불태웠다. 나치가 개최한 퇴폐미술 전시회에서는 배우들이 동원되어 이들의 작품이 얼마나 조야하고 조잡한지 큰 소리로 비판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모더니즘을 조롱하는 쇼였다. 표현주의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표현주의도 국제적으로 확장된 모더니즘 예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표현주의는 독일 민족 고유의 예술이기도 했다. 나치는 이를 ‘잡종 예술’로 규정하고 파괴했다.
이처럼 불안한 고조되자 키르히너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런 몰락 뒤에 표현주의는 서서히 잊혔고 그들이 찬미했던 원시적인 감성은 오랫동안 예술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