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르렁 거리는 자동차는 <사모트라케의 니케>보다 아름답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중에서, 1845
마르크스가 철학자들에게 세계를 ‘해석’ 하지 말고 세상을 ‘변혁’하라고 요구한 지 반세기가 흘렀을 즈음에 예술가들도 서서히 새로운 소명을 느꼈다. 예술은 오랫동안 삶을 기록하고 마음을 정화하는 기능을 담당해 왔다. 그런데 19세기를 통과하면서 예술의 역할은 서서히 달라졌다. 기술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했고 정치 상황은 급변했다. 그런 시대에 화실에서 고전적 미학을 따라 그림을 그리는 것은 매우 반동적이라고 느끼는 화가들이 생겼다. 그리고 마침내 20세기 초에 아방가르드(avant-garde: 전위)가 등장하게 된다.
아방가르드는 군대의 선두에서 적군의 상황을 알아보거나 장애물을 제거하는 부대를 의미하는 군사용어였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자처한 역할이 이와 같았다. 이들은 사회 변혁에 방해가 되는 전통을 부수기 위해 매우 도발적인 작품을 세상에 던졌다. 그것은 낡은 정치와 문화를 향한 전쟁이었다.
물론 과거에도 뛰어난 예술가들은 늘 문화의 선두에 서있었고, 예술은 정치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황제의 얼굴을 조각하던 고대 예술가부터 노동자를 그리는 쿠르베까지 예술은 꽤 선동적이었다. 그러나 세계를 변혁하는 것을 자신들의 과업으로 천명하는 예술가들은 아방가르드가 처음이었다.
미래주의자들은 아방가르드라는 말과 가장 잘 어울리는 그룹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표명한 ‘미래주의’ 이념을 따라 거침없이 미래를 향해 나아갔다.
(…) 제기랄! 아야! (…) 나는 순간 치를 정지시켰는데, 그만 차가 뒤집혀서 도랑으로 처박혔다. 속이 메스꺼웠다. (…..) 오, 어머니 같은, 진흙탕으로 가득 찬 하수구여! 사랑스러운 공장의 배수구여! 나는 당신의 영양 가득한 구정물 찌꺼기를 꿀꺽꿀꺽 마셨다. (…) 그렇게 유쾌한 공장의 오물로 범벅된 얼굴들-금속폐기물로 떡칠이 되어서, 땀이 흘러내리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거룩한 검댕을 잔뜩 묻힌-우리, 멍들고, 팔은 삼각붕대로 감아 걸쳤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대지에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우리의 고귀한 의도를 선언한다. -마리네티, <미래주의 선언> 중,
1909년 파리의 <르 피가로>지에는 매우 도발적인 <미래주의 선언>이 발표되었다. [그림 1] 욕설과 기괴한 일화로 시작되는 이 선언문의 작성자는 시인이자 극작가로 활동했던 필리포 마리네티(Filippo Tommaso Marinetti, 1876–1944)였다. 그는 교통사고를 깨달음의 순간으로 묘사하고, 공장의 배수구와 구정물을 신처럼 찬미했다. 그 글은 낡은 현실을 분개하는 외침이자 정치적인 선동이었다.
이들은 아름다움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정의를 내렸다.
우리는 새로운 아름다움, 다시 말해 속도의 아름다움 때문에 세상이 더욱 멋있게 변했다고 확언한다. 폭발하듯 숨을 내쉬는 뱀 같은 파이프로 덮개를 장식한 경주용 자동차-포탄 위에라도 올라탄 듯 으르렁 거리는 자동차는 [사모트라케의 니케]보다 아름답다. (…) -마리네티, <미래주의 선언> 중 네 번째 조항,
고대의 조각 [사모트라케의 니케]보다 자동차가 아름답다고 선언하는 미래주의자들. 그들은 속도를 새로운 미학의 기준으로 내세우며 변하지 않는 모든 것을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물관, 아카데미는 물론 도덕주의와 페미니즘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보기에 성장과 발전을 저해하는 모든 것들은 파괴해야 할 적이었다.
언뜻 보아도 극단적인 이 선언의 배경엔 엄청난 콤플렉스가 있었다. 마리네티를 비롯한 미래주의자들은 대부분 이탈리아 사람들이었다. 이탈리아 반도는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약 1500년 동안 분열된 상태에 놓여있었다. 그마저도 유럽 열강에 의해 지배받는 지역이 많았다. 그런데 프랑스혁명의 여파로 이탈리아 안에 민족주의가 심어지면서 독립과 통일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고 오랜 전쟁 끝에 하나의 근대 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유럽 내에서는 산업화에 뒤쳐진 후발 국가였다. 빨리 미래로 나아가야 했다. 이렇게 마음이 조급한 마리네티에게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 시대의 성과는 영광이 아니라 걸림돌처럼 느껴졌다.
<미래주의 선언>을 발표한 이후에 마리네티는 이탈리아 도시들을 돌며 선전 운동을 벌였다. 매우 도발적이었던 그의 공연은 많은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움베르토 보치오니(Umberto Boccioni, 1882–1916)는 그에개 크게 감화되어 화가로서 미래주의에 동참하게 된다. 얼마 후 보치오니는 카를로 카라(Carlo Carrà, 1881–1966), 루이지 루솔로(Luigi Carlo Filippo Russolo, 1885-1947)와 함께 <미래주의 화가 선언>을 발표하며 미래주의에 어울리는 회화를 만들고자 했다.
미래주의 화가들의 포부는 거창했다. 그들은 우주의 역동성 그 자체를 담아내고, 미친 듯한 속도와 빠른 진동처럼 변화하는 형태를 구현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큰 모순이 자리하고 있었다. 첫째, 이들은 이탈리아 민족주의를 지향했지만 유럽 내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기를 바랐다. 마리네티가 <미래주의 선언>을 이탈리아가 아닌 파리에서 발표한 것은 미래주의가 유럽 전역에 퍼져나가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외국의 간섭을 원치 않는 민족주의를 지지했다. 둘째, 미래주의는 과거에 파리에서 시작된 신인상주의와 입체주의 등을 절충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예술 형식을 만들어갔다. 말은 미래를 지향했으나 형식은 과거에서 빌려 온 것이다. 이런 모순 속에서 탄생한 것이 보치오니의 <일어나는 도시>[그림 2]다.
이 그림은 폭이 3미터에 달하는 대작이다. 굽이치는 파도처럼 표현된 전면의 움직임은 혼란스러울 정도로 격렬하다. 군중은 멀리 보이는 새로운 도시를 향해 돌진한다. 그런데 이들의 속도와 어울리지 않게 도시는 고정되어 있다. 화면 전체는 신인상주의의 분할주의 기법(몇 개의 원색의 점으로 묘사하는 방식)으로 채색되어 반짝이는 색채가 돋보인다. 그런데 이리저리 날뛰는 말의 형태와 사람들의 과장된 움직임은 자세히 볼수록 어딘가 어색하다.
미래주의에 동참했던 다른 화가들의 작품은 형식적으로 더 조야했다. 자코모 발라(Giacomo Balla, 1871–1958)의 <줄에 매인 개의 역동성>[그림 3]은 미래주의가 찬양한 속도의 미학을 담아내려 했다. 그러나 그 포부와 달리 잔망스러운 움직임만을 담고 있다. 루솔로의 <The Revolt(봉기)>[그림 4]도 뭔가 거북하다. 이 그림은 혁명의 열정과 힘의 충돌을 담고 있다. 그러나 강렬한 색채 대비와 웅장한 구성과 어울리지 않게 군중은 우스운 만화처럼 표현되었다.
다행히 보치오니는 미래주의와 어울리는 형식을 찾아냈다. 그는 파리에서 입체주의를 연구하며 조각에 매진한 끝에 <공간에서의 독특한 형태의 연속성>[그림 5]을 제작했다. 이 웅장한 청동 조각은 육체의 팽창된 힘과 근육의 움직임을 복잡한 형태로 분할하여 만든 것으로 미래주의의 목표에 상당히 다가서고 있었다.
미래주의 예술 양식은 조금씩 발전했고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만 끝이 분명한 운동이었다. 그들은 세상을 오염시키는 낡은 과거를 청산할 방법으로 전쟁을 예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쟁-세상에서 유일한 위생학-, 군국주의 애국심과 자유를 가져오는 이들의 파괴적 몸짓,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이념, 그리고 여성에 대한 조롱을 찬미한다. -마리네티, <미래주의 선언> 중 아홉 번째 조항
미래주의자들은 전쟁을 위생학이라고 외치는 이 어처구니없는 조항에 진심으로 헌신했다. 그들은 발전된 기술 문명으로 가능해진 대량 파괴를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으로 여겼으며 파시스트가 되어 전쟁에 참여했다. 그중 일부는 화염 속에서 전사했다. 살아남은 자들의 미래도 어두웠다. 미래주의는 파시스트에 동조했으나, 파시스트는 미래주의를 탄압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래주의는 자신의 형식을 지키지 못한 채 점차 변해가다가 1930년경에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