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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윤숙 Oct 17. 2023

다다이즘 - 전쟁으로 과열된 시대에 던지는 해열제

무정부주의적 아방가르드 "그것은 필경 똥이다."

 1916년, 취리히에 ‘카바레 볼테르’가 개장했다.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었다. 다양한 국적의 예술가들이 그곳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다다(DaDa)’라고 지었다. ’다다'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무엇을 지칭하기 위한 단어가 아니라 부정하기 위한 단어였다.  


논리의 폐기, 창조 불능자들의 춤, 다다. 우리의 하인배들이 새로운 가치관을 위해 설정한 모든 가치관과 사회적 등식의 폐기, 다다. 대상 하나하나, 모든 대상, 감정과 어둠, 환영과 평행선의 정확한 충돌이 싸움의 수단인 다다. 기억의 페기, 다다. 고고학의 폐기, 다다. 예언자의 폐기, 다다. 미래의 폐기, 다다.

- 크리스탕 차라, 다다 선언, 1918


이들은 왜 이렇게 모든 것을 부정하고 폐기하겠다고 외치는 것일까? 이들의 본거지 카바레 볼테르로 가보자.     



카바레 볼테르 : 국적 없는 예술가들의 놀이터


1차 세계대전 중에 개장한 카바레 볼테르는 매우 특별한 공간이었다. 전쟁터에서 만났다면 서로 총을 겨눴을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그곳에서는 함께 공연을 벌였다. 시를 낭독하고, 이상한 가면을 쓰고 괴상한 춤을 추고, 과감한 퍼포먼스를 펼쳤다.  


1916년 5월, 주인 독일 출신 시인이자 카바레 볼테르의 주인인 후고 발(Hugo Ball, 1886–1927)은 이상한 옷을 입고 무대에 등장했다. 그는 옷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의 친구들이 그를 들어 무대로 옮겨주었다. 그렇게 무대에 선 후고 발은 근엄하게 시를 낭독했다.


가드지 베리 빔바
글란드리 라울리 로니 카도리
가드자마 빔 베리 글라싸라


좌) 그림 1. 후고 발, 1916년 카바레 볼테르 공연/ 우) 그림 2. 후고 발, typography of the first publication


후고 발은 의미 없는 소리로 이루어진 이 글을 음향시(Lautgedichte)라고 불렀다. 그리고 시를 출판할 때는 시가 지닌 음향의 억양과 느낌을 살리기 위해 다양한 글자체를 사용했다. [그림 2] 공연부터 출판까지 일련의 과정은 자못 진지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소리를 음미하겠다고 달려드는 순간 당신은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자기 틀에 갇혀 도무지 움직이지 않는 정치인들과 그들이 내뱉는 무의미한 말을 조롱하는 퍼포먼스이기 때문이다.


다다이스트들이 공연과 출판물을 넘나들며 이렇게 정성 들여 풍자극을 펼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전쟁을 피해 도망 온 예술가들이었다. 전쟁은 국가의 명령이나 이념에 목숨을 거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통감하게 해 주었다. 장군들은 무능했고 정치인들은 위선적이었다. 전쟁을 둘러싼 모든 것이 부조리했다. 예술가들의 임무는 그것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민족과 국가의 이름으로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현실. 다다는 그런 현실에 저항하고자 국가를 버리고 무정부주의자가 되었고 전쟁으로부터 탈주했다. 그중 사미 로젠스톡(Sami Rosenstock)은 여러 언어가 섞인 국적 없는 글을 썼다. 그는 자기 이름마저 바꿔버렸다. '고향에서 슬픈’이라는 뜻을 지닌 트리스탕 차라(Tristan Tzara, 1896 ~ 1963)가 그가 선택한 이름이었다. 차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다 선언문을 쓰고 새로운 예술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우연, 레디메이드, 포토몽타주


다다는 국제적인 성격을 지닌 운동이었다. 취리히 뿐 아니라 중립지대였던 뉴욕과 바르셀로나가 다다의 활동무대가 되었고, 전쟁으로 삼엄했던 파리와 독일에서도 활발한 운동이 펼쳐졌다. 이렇게 다양한 곳에서 다다라는 이름으로 공연과 전시가 행해졌지만 이들에게 공통된 양식을 발견하긴 어렵다. 다다는 새로운 형식을 제안하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 부정하고 도발하는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 작가들은 참신한 기법들을 창안하여 미술에 획기적인 길을 터주었다.


그림 3. 한스(장) 아르프, <Untitled(우연의 법칙에 따라 배열된 사각형 콜라주)>, 1916–17. 색상지에 찢어서 붙인 색종이, 48.5 x 34.6 cm


취리히에서 활동한 한스 아르프(Hans Arp-프랑스 이름: Jean Arp, 1886–1966)는 손으로 찢은 색종이를 떨어뜨린 뒤 그대로 종이에 붙여 <우연의 법칙에 따라 배열된 사각형 콜라주>를 완성했다. [그림 3] 입체주의자들이 세련되고 숙련된 솜씨로 구사했던 콜라주를 차용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아르프는 콜라주를 예술가의 의식적인 활동을 배제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 이것은 매우 부조리한 행위였다. 이제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조차 자신의 의지대로 만들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역으로 예술가는 우주적인 질서를 담아낼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트리스탕 차라는 이와 같은 우연의 법칙을 시인들에게도 안내했다.     


다다 시를 쓰기 위해

신문을 들어라.
가위를 들어라.
당시의 시에 알맞겠다고 생각되는 분량의 기사를 이 신문에서 골라내라.
그 기사를 오려라.
그 기사의 모든 낱말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잘라서 포대 속에 넣어라.
조용히 흔들어라.
그다음엔 자른 조각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어라.
포대에서 나온 순서대로 정성 들여 베껴라.
그럼 시는 당신과 닮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무한히 독창적이며, 매혹적인 감수성을 지닌, 그러면서도 무지한 대중에겐 이해되지 않는 작가가 될 것이다.

- 트리스탕 차라, <연약한 사랑과 쓰라린 사랑에 관한 선언> VIII, 1920     



그림 4. 마스셀 뒤샹, <자전거 바퀴>, 금속 바퀴와 나무 의자, 129.5 x 63.5 x 41.9 cm, 1951(세 번째 버전, 1913에 발표된 첫 작품은 유실됨)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 1887~ 1968)은 더욱 도전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파리와 뉴욕에서 활동한 뒤샹은 입체주의와 미래주의, 초현실주의를 넘나들며 매우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중 레디메이드(readymades)는 기존의 문법을 파괴하는 다다를 따르고 있었다. 기성품이라는 뜻을 가진 레이메이드는 일상적인 사물을 재조립하거나 있는 그대로 전시에 내보내는 기법으로 사물이 가진 의미와 형태를 환기시켜 주었다. 하지만 장인의 손기술을 강조해 온 미술의 문법을 공격한다는 점에서 반反미술에 가까웠다.


<자전거 바퀴>[그림 4]는 의자 위에 자전거 바퀴를 연결한 작품으로 레디메이드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완성하는데 작가의 역할은 사물을 선택하고 사인을 남기는 것이 전부였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뒤샹은 예술가의 역할이 ‘제작’이 아닌 ‘발상’에 있음을 강조했다.


독일의 다다이스트들은 진지하고 정치적이었다. 웃기는 퍼포먼스나 대중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레디메이드로는 이들이 가진 정치적 다급함을 담아낼 수 없었다.


1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 지식인들은 19세기에 제시된 아름다운 청사진이 거짓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1917년 미국의 참전은 전쟁이 길어질 것이라는 우려를 낳았고. 러시아에서는 혁명은 독인 군대에서 반란의 불씨를 넘겨주었다. 군대는 반란을 일으켰고 베를린 폭동이 이어져 결국 종전에 이르게 했다. 독일 다다는 이렇게 정치적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1918년 독일에서 출범했다.


그림 5. 라울 하우스만, <미술 비평가>, 1919~20, 포토몽타주, 31.8 x 25.4 cm, 테이트 갤러리, 런던


거의 좌익 혁명가와 같았던 베를린 다다에겐 보다 직접적으로 정치인들의 부정과 위선을 직접적으로 조롱할 표현법이 필요했다. 이들이 주로 사용한 기법은 포토몽타주였다. [그림 5] 사진은 조각나고 왜곡되어도 그 생생함 때문에 사실적인 느낌을 주었고, 문자를 이용하여 보다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충돌과 싸움을 걸어오면서 다양한 것의 폐기를 선언하는 다다의 행위는 미래주의의 행보와 비슷한 면이 많았다. 혼란을 야기하는 그들의 퍼포먼스도 미래주의자와 통하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다다는 미래주의와 정 반대편에서 전쟁을 바라보았고 예술의 지향점도 달랐다.


미래주의는 미학을 동원해 미래에 대한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정치적 질문을 멈추고 전쟁에 뛰어들게 했다면, 다다는 모든 점잖은 체하는 권위를 조롱하고 정치적 문제를 야기하면서 전쟁에서 달아났다. 또 미래주의가 자신들의 사상을 예술을 통해 재현해 내려고 했다면, 다다는 예술까지 농담과 우스개로 만들면서 갑갑한 정치 상황 속에서 자유의 영역을 넓혀갔다. 그들이 던진 무의미한 소리 ‘다다 다다 다다’는 정치적 논쟁과 전쟁으로 과열된 시대에 던지는 ‘해열제’였다.     


다다는 우리들의 강렬함이다. (…) 그것은 통일성에 대해 찬성도 하고 반대도 하며, 또 미래에 대해서는 결정적으로 반대한다. (…) 또 우리는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자유를 외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그래서 우리는 인류에 대하여 침을 뱉는다.
다다는 유약한 유럽적 테두리 속에 있다. 그것은 필경 똥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앞으로 영사관의 온갖 깃대와도 같은 예술로써 동물원을 다양한 색깔로 장식하기 위해 배설을 하고 싶다. - 트리스탕 차라, <안티피린 씨의 선언>, 1916년 (안티피린은 해열제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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