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윤숙 Oct 16. 2019

혜환 이용휴, 산문 전집

문장가의 한 자루 붓만 있으면 된다

 

이용휴(李用休, 1708년 ∼ 1782년)는 평생 글을 썼다. 성호 이익에게 배웠으나 스승의 글처럼 체계를 세우거나 세상의 향해 가르치려는 계몽적 태도는 없었다. 그는 남인 출신으로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원고와 피고가 뒤바뀐 것은 천하의 커다란 원통함이 아니라고 말한다. 제도 개혁, 올바른 사법권 쟁취 등은 ‘전업 작가’ 이용휴의 타깃이 아니었다. 세상의 다스림이 불공평하기 그지없으나 권력과 지위를 얻어 바로잡고자 한다면 그 또한 요원할 것이다. 이용휴는 그래서 붓을 든다. 권력이 아니라 붓을 잡고, 지위가 아니라 필력을 얻어 자기 뜻을 펼친다.    


  


짧게, 꼼꼼하게, 기발하게


뜰 앞에 원추리, 패랭이, 접시꽃이 한꺼번에 꽃을 피웠다. 원추리에는 노랑나비, 푸른 나비, 호랑나비가 날아들고, 패랭이꽃에는 흰나비가 날아드는데, 접시꽃은 나비가 모두 지나치고 돌아보지 않는다. 대개 꽃의 향기가 같지 않고, 나비의 성질이 각각 들어맞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대충 나비가 꽃을 그리워한다고 말하는 것은 꼼꼼하지 못한 말이다. (꽃과 나비를 기록하다, 37)
신사임당, 초충도


문집의 첫글은 이것이 전부다. 서론, 본론, 결론, 이렇다 할 글의 구성이 없다. 시도 아닌 것이 간결하고 맛깔나다. 경험한 것을 말하고, 하고 싶은 말로 곧장 날아간다. 경전을 인용하지도 않고, 중언부언 설명도 없다. 꽃과 나비도 성질에 맞는 짝이 있으니 글을 쓸 때도 그에 맞게 써야한단다. 꼭 써야할 말만 골라 딱 그것만 쓴다. 그래서 한편으로 건조한 것 같지만 "꼼꼼하여" 허술하다는 느낌이 없다. 그렇다면 평범한 주제도 참신함과 기이(奇異)를 얻을 수 있다.

 


이 거처는 이 사람이 사는 이곳이다. 이곳은 바로 이 나라 이 고을 이 마을이고, 이 사람은 나이가 젊으나 식견이 높으며 고문을 좋아하는 기이한 선비이다. 만약 그를 찾고 싶으면 마땅히 이 기문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비록 무쇠 신발이 다 닳도록 대지를 두루 다니더라도 마침내는 찾지 못할 것이다.(차거기, 65)


특이한 글이다. 어떤 선비가 지은 정자 혹은 서재에 써준 기문인데 번역문에 ‘이(this)’라는 글자가 자주 눈에 들어온다. ‘이’는 차(此)의 번역어인데 안대회 선생님에 의하면 이렇게 此(차)를 강조한 것은 사람을 판단할 때 彼(피-신분 가문, 외모 등)에 너무 신경을 쓰는 것을 비판하기 위함이란다. 원문을 살펴보니 전문이 53자요, 그중에 此(차)가 6분에 1에 해당한다. 주제를 떠나서 말을 즐기게 된다. “차거, 차인거, 차소야. 차소즉 차국 차주 차리, 차인년소…” 소리내어 읽을 때면 마치 잘 써진 랩처럼 ‘라임’이 맞는다. 이렇게 글을 쓰니 특별하지 않은 주장에도 귀가 솔깃하다. 이런 이용휴의 글을 사람들은 기이(奇異)하다 했다. 분명 칭찬이다.


이용휴의 말마따나 “학문을 함이 지극한 곳에 이르면 평범하여 기이함이 없다.”(349) 지혜는 평범하다. 공자가 나고 그의 말이 전해진지 이천 여년이요, 이미 수 백년 전에 주자에 의해 정통해석도 내려졌다. 성인의 말씀은 너무 익숙하여 평범하게 들리고 그것을 풀어쓰는 학자의 글도 고루하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그것을 벗어나 다른 가르침을 구할 수도 없다. 성인의 지혜는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이고 조선 유학자들이 벗어날 수 없는 지평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인의 가르침을 날마다 새롭게 새기고 실천할 수 있게 전달하는가’ 하는 문제만이 남는다. 문장가들이 할 일이 그런 일이다. 참신한 언어로 평범한 지혜를 전하기! 읽는 자의 몸과 마음이 동하게 하는 글쓰기! 써보려고 하면 알겠지만 이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런데 이용휴는 이런 난해한 도전에 성공했다.     



요강 잘 닦는 효부


효자와 효부를 찬(讚-칭찬하다)하는 글은 제목을 보는 순간부터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용휴의 글을 보며 가장 웃겼던 글이 바로 효자, 효부를 찬하는 글이었다.


박사중은 (…) 그의 부친 필윤이 이웃 사람에게 살인을 했다는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힌 지 오래 되었는데, 말이 여러 차례 바뀌어 일이 점차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박사중이 혈서를 써서 원통한 사정을 아뢰고자 하여 두루 왼쪽 다섯 손가락을 깨물었지만 피가 나지 않았다. 가슴을 두드리고 크게 통곡을 하여 하늘을 향해 네 번 절하고 다시 두루 오른쪽 다섯 손가락을 깨물었더니 다섯 손가락 모두에서 피가 나왔다. 손가락으로 글자를 썼지만 잘 되지 아니 하자 곧 붓을 찾아 피에 적셔서 글을 썼다. (박사중전, 59)


이런 장면에서 웃으면 안 되는데, 좀 웃겼다. 십대 후반 소년이 아버지를 위해 혈서를 쓰기 위해 여린 손가락을 다섯이나 깨물었는데 피가 안 났다! 난감했을 게다. 결국 하늘에 절하고 다른 다섯 손가락을 마저 깨물어서 피를 냈건만 글씨가 또 안 써진다! 피가 다섯 줄기로 나오니 글씨가 써지지 않는 게 당연하다. 작가가 이렇게 ‘꼼꼼하게 쓰니’ 효자 얘기도 “얼굴빛을 고치고 읽게 된다.” 그냥 ‘혈서를 썼다’했으면 알지 못했을 것들이 보인다.


아버지는 걱정되나 차마 자기 손을 깨물 정도로 모질지 못했던 소년, 그럼에도 혈서 쓰기를 멈추지 못했던 정황, 그러다 다섯 손가락에서 모두 피가 나서 더욱 당황했을 ‘효자 박사중’. 그는 그저 평범한 소년이었을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이런 저런 효행이 더 감동적이다. 평범한 아이가 애써 뭔가 해보려는 그 노력이 짧은 글 사이사이에서 읽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읽힌 효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이러하다.


혜완 이용휴의 글과 [혜완시초]  http://www.iheadlin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403


시서(詩書)를 배우지 않았고, 명예를 탐하지 않았으나, 허씨 집 딸은 시부모 잘 섬겼도다. 가려우면 긁어드렸고, 요강도 깨끗이 씻어 드렸으며,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였고, 잿물로 빨아 바늘로 꿰매었도다.(효부허씨찬, 39)


효부를 찬하며 쓴 글에 "요강"이 등장할 거라 생각도 못했다. 자기 허벅지 살을 도려내어 부모에게 고기반찬 해준 효자 얘긴 들어 보았으나 ‘요강을 깨끗이 씻어 드린’ 효부 이야긴 금시초문이다. 효부하면 우울하고 답답하고 느껴지는데, 허씨 부인은 배운 것 없지만 소매를 걷어 올리고 매일 반짝이게 요강 닦는 쾌활한 아낙인 듯하다. 요강 닦는 그 손으로 시부모의 가려운 등도 잘 긁어 드린다! 내가 부모라도 이런 ‘손맛’있는 효부가 있으면 좋겠다. 일단 편하다. 자기 허벅지살을 자르고, 죽기 살기로 겨울날 눈밭에서 딸기 따오고, 봄날 홍시 구해오고. 자식들이 이러면 좀 무섭지 않겠는가?


이용휴의 효자, 효부는 평범한데 지극하다. 꼼꼼하게 보면 효자, 효부는 제각기 자기 멋대로 효를 행한다. 그래서 더 빛난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것이 '전업 작가' 이용휴의 탁월함이다. 부럽구나. 그의 사람 보는 눈이!     



그 사람을 기억하다


유가에서 군자가 갖추어야 능력 중 가장 귀한 것이 사람 알아보는 능력이다. 그래서인가 [논어]의 시작은 학(學)이고 그 끝은 지인(知人-사람을 알아보다)이다. 사(士)는 임금이 섬길만한 임금인지 알아봐야 하고, 임금은 사(士)가 등용할만한 사람인지 알아봐야 한다. 이용휴는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사람을 알아보고 글로써 그를 세상에 드러나게 해 주는 방식으로 군자의 삶을 살았다.


이용휴의 작은 아버지이자 스승인 성호 이익 https://www.mk.co.kr/opinion/columnists/view/2017/02/114194/


공은 평소에 야위었으나 배움에 힘쓰고 고심으로 생각하여 얻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아서 병이 생기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권하기를 과거 시험장에 나가서 답답한 기분을 없애 버리라 하였고, 부모님의 명령이 있기도 하여 비로소 뜻을 굽혀 과거에 응시하여 두 차례 향시에 합격하였다.
무신년에 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는 건강이 나빠져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고, 또 여러 차례 묏자리를 살펴서 면례를 거행하니 정신이 매우 소진되어 병이 다시 났다. 칠 년 만에 비로소 평소와 같게 되니, 사우( 師友)들이 시로써 축하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목옹이공과 윤유인을 합장한 지명, 324)


죽은 이공이라는 사람을 기억하는 글이 소소하게 아름답다. 이공이 얼마나 예민한 분이셨을지 보이는 것 같다. 공부가 너무 힘드니 과거 시험 보러가서 바람이나 쐬고 오라고 권유 받는 사람. 어머니 상 치르고 칠년이 지나서야 그 슬픔을 이겨낸 사람. 그랬던 그가 죽었고 아내와 합장하여 땅에 묻힌다. 특별한 공적은 없으나 그렇게 극진한 마음으로 한평생을 살았던 이공의 삶을 이용휴는 그의 지극한 문장으로 기억해준다. 공식 연보로는 드러나지 않는 일상을 보여주고, 경서의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마음을 전하고, 간결한 단어들 사이에 여운을 느끼게 한다.


앞서 말했듯 이용휴가 애통해 한 것은 관직을 얻지 못하거나 재판을 바로잡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재주가 있었으나 요절하여 성취하지 못한 경우”와 “이미 성취했으나 글이 사라져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한다. 앞의 것은 하늘 때문이요, 뒤의 것은 세상 때문이다. 이에 이용휴는 말한다. “만일 그런 사람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세력과 지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문장가의 한 자루 붓만 있으면 된다.”(267)라고. 그래서인가 그의 호는 혜완(惠寰-은혜로운 경기고을에 사는 사람)이다. 평생 당파의 벽을 넘지 못해 관직 한 번 못한 양반이 자기가 사는 곳을 은혜로운 땅이라 한다. 그저 꾸며 지은 호일지 몰라도 그와 잘 어울린다. 문장가에겐 세상에 대한 원망은 없고 붓 한 자루로 인재를 세상에 알릴 자유가 있을 뿐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