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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윤숙 May 16. 2017

숄로호프 단편선

혁명은 심장에 관한 것이다

2017년 3월 10일 촛불 혁명은 탄핵을 이끌었고 역사는 갈 길을 가고 있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들간에 벌어진 틈은 메워질 수 있는지 많은 이들이 묻는다. 아마도 화해는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존은 가능하다. 우린 적어도 우리와 생각이 다른 이들과 같은 하늘 아래서 살 수 있다. 다른 생각을 가졌다고 해서 상대를 완전히 내쳐야 할만큼 눈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이 우리의 혁명은 정치적 의견과 생존을 바꾸도록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20세기의 거의 모든 혁명은 민중의 피를 먹고 자랐다. 숄로호프(미하일 숄로호프 1905-1984)는 그런 혁명의 증언자다. 



1938년경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숄로호프(1905년 ~ 1984년)  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D%95%98%EC%9D%BC_%E

고요한 돈강 유역에 부는 혁명의 바람


숄로호프는 러사아 남부의 비옥한 돈강 유역에 살았고 주로 그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썼다. 돈강은 수량이 풍부했고, 사람이 먹을 작물을 기르고 수많은 말을 먹일 만큼 땅은 비옥했다. 때문에 대지주들과 쁘디 부루주아 같은 농민들이 많았다. 또 그만큼 아무것도 갖지 못한 채 기아에 허덕이는 날품팔이나 노예와 같은 취급을 받는 소작농들도 넘쳐났다. 대도시 공장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혁명의 바람이 그들이 있는 곳까지 불어왔다.


1917년 2월혁명으로 억압적이고 부패한 차르 전제 정부가 전복되고, 온건파 자유주의 내각이 세워졌다. 그러나 민중의 불만을 해소하지 못했고 10월혁명(볼셰비키 혁명)이 이어진다. 레닌이 이끄는 사회민주노동당(후에 러시아 공산당) 내 볼셰비키(다수파라는 의미)는 무산 계급에 의한 정권 탈취와 체제 변혁을 위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서서히 민중의 지지를 넓혀 나간 볼셰비키는 1917년 11월 7일(당시 러시아력으로 10월)에 무장봉기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정권의 향방은 결정되었으나 옛 체제의 관료나 군인 출신이었던 지방 대지주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자기 땅을 갖고 있는 소농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구체제를 신봉하며 자신들이 독점한 땅과 권위를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내전은 불가피했고 농민이 많은 가장 비옥한 땅, 돈강유역에서 가장 치열하게 치뤄졌다.


어떤 전쟁도 아프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내전은 외부와의 전쟁에서는 생겨나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 숄로호프는 그 가장 아픈 상처를 힘겹게 드러낸다.혁명은 아프고 아프다


오랜 전투에 지친 혁명군(적군) 중대장 니콜라이는 공부가 하고 싶은 청년이다. 그러나 우선 반혁명도당(백군, 카자크인)을 진압해야한다. 중년의 백군 수장 역시 과로중인 건 매일반이다. 그는 혁명군과 싸우느라 7년간 집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 둘이 전장에서 만나 니콜라이가 죽었다. 적군의 수장은 니콜라이의 몸에서 가죽신을 전리품으로 벗겨내다 발목에서 베넷점을 발견하고 오열한다. 니콜라이가 그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자리에서 자결한다.[베넷점]


위에 요약한 [베넷점]은 숄로호프의 첫 단편이다. 내전이 불러온 우연한 비극은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그러나 더한 비극은 한 인간 스스로 비극의 길을 밟아 가는 것이다. 다음에 소개할 작품의 주인공이 그러했다.


바닥이 썩은 배를 몰면서 살아가는 돈강의 뱃사공인 사내는 자식 아홉을 홀로 돌보는 아버지였다. 큰아들과 둘째 아들은 그의 큰 자랑거리였는데 둘 다 혁명의 바람을 타고 고향을 떠난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포로가 되어 카자크 마을 광장에 차례로 잡혀왔다. 아버지의 갈등이 시작된다. 그들은 어차피 죽는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 마을에서 아직 어린 7명의 자식과 살아야 한다. 그리고 살기 위해선 두 아들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이 먼저 죽여야 한다. 그는 아버지로 살기위해 아들들을 죽인다. 그 후로 사내는 자신을 역겹다고 말하는 딸과 함께 한 식탁에 앉아 밥을 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썩어 가라앉은 그의 배는 분명 혁명의 강을 건너다 난파된 가족과 국가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처자식이 있는 남자] 


뱃사공 사내의 선택을 두고 도덕적 비판을 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는 권력자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고 종교인도 아니다. 단지 제 새끼를 돌보는 동물들처럼 자식들을 길러내야하는 홀아비일 뿐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그의 딸은 오빠를 잃은 슬픔과 자신도 어떤 경우에 살해될지 모른다는 공포로 아버지를 비난할 수 있으나 독자는 그럴 수 없다. 우리의 몫은 그저 그 가족의 운명과 슬픈 역사에 관해 아파하며 관찰자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와 인내를 갖는 것이다.




혁명의 정서


그렇다면 숄로호프는 혁명과 전쟁을 그저 비극으로만 그리고 있는가? 혁명은 그저 아픔일 뿐인가? 아픈 내전이후 이어진 스탈린의 폭압적인 정치상황은 차르의 전제정치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혁명은 부당했나? 숄로호프는 이에 손 쉬운 답변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혁명의 이유와 혁명 과정중에 생겨난 다양한 결을 가진 마음들을 보여준다.


예를들어 [타인의 피]에서는 적군에게 아들을 잃고 적군을 증오하며 살아가는 노부부가 부상당한 적군 소년병이 상처를 입고 쓰러져있는 것을 보자 당파에 관한 것은 모두 잊고 그를 돌본다. 그 덕에 죽은 아들을 잊고 새 아들을 얻은 것 같은 기쁨으로 살아간다. [일류하]에서는 결혼을 강요하는 부모 곁을 떠나 도시에 온 청년이 우연히 길에서 한 여인을 구한다. 지적인 공산당원인 그 여인은 그를 다정하게 대해주고 글도 가르쳐준다. 청년이 그녀에게 연정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 그녀는 시골 청년에게 혁명이 안겨준 아름다운 미래와 같았다. 그러나 안타까움은 두 이야기 모두에 존재한다. [타인의 피]에 나오는 적군 소년 병은 몸이 낫자 부모같은 노인들을 남겨둔채 자신을 키워낸 북쪽의 공장으로 돌아가고, [일류하]에 등장하는 공산당 여인은 유부녀여서 시골 청년의 연정은 짧은 열병을 겪고 허망하게 끝난다. 농민적 정서를 가진 이들과 혁명적 정서를 가진 이들이 일상에서 만났을 때 이들은 앞에서처럼 격하게 서로를 물어뜯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아끼고 보듬는다. 그러나 미묘하게 엇갈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마음, 그렇다 어쨌든 그 마음이 중요하다. [알료시카의 심장]은 그 혁명의 마음이란걸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쟁의 상흔 옆에서 뛰고 있는 [알료시카의 심장] 


알료시카는 돈강유역에 살고있는 가난하지만 착한 아이다. 그런데 가난의 비극이 상상을 초월한다. 여동생은 굶주리다 음식을 잘못 먹고 죽었는데, 그와 어머니는 땅을 팔 힘이 없어서 간신히 흙만 조금 얹은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그걸 동물들이 파해쳐 동생의 시신을 띁어 먹었다. 그리고 누나와 어머니도 연이어 죽어갔다. 홀로 살아남은 알료시카는 먹을 것을 찾아 여기저기를 헤메다 우연히 안경 쓴 청년에게 발각된다. 그런데 이 청년이 여느 이웃과 달리 그를 때리지 않는다. 시골에 파견된 볼셰비키였던 것이다. 그는 알료시카에가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 먹을 것을 주고 글도 가르쳐준다.


어느날 백군이 마을을 공격해 왔다. 알료시카는 안경 쓴 청년과 함께 전투에 참가한다. 전투의 끝무렵, 승리는 적군쪽으로 기울었고 백군 잔당들은 창고 같은 건물 안으로 피해들어갔다. 그 건물 안으로 알료시카가 슈류탄을 던져넣기만 하면 모든 것이 종결된다. 그런데 건물 앞까지 다가간 알료시카가 안전핀을 뽑는 순간데 건물안에서 어머니와 딸인 듯한 사람이 손을 들고 나온다. 소년은 차마 그들을 향해 수류탄을 던질 수 없다. 소년은 수류탄을 자신의 품에 끌어안는다. 그 모습을 본 볼셔비키 청년이 달려와 수류탄을 뺏어 먼곳으로 던져버린다. 죽음은 면했으나 알료시카는 심장 옆에 파편을 맞는 심각한 부상을 당한다.


한참 뒤 소년이 깨어났을 때 안경 쓴 청년은 소년에게 "노동자와 농민의 정권을 위해 네 심장이 여전히 고동칠 수 있게" 우리가 널 치료했다고 말한다. 노동자와 농민의 정권을 위해 고동칠 소년의 심장. 그런 심장을 지닌 소년은 가족을 다 잃고도 상대를 증오하지 않고, 승리를 위해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일을 차마 할 수 없다. 차마 할 수 없는 마음. 유가(儒家)에선 이를 인(仁)이라 했다. 일상적인 우리말로 바꾸면 그것이 '양심'이리라. 양심이 살아있는 소년의 심장을 살려내는 것, 그것이 숄로호프가 본 러시아 혁명의 의미는 아니었을까. 내전 과정은 참혹했고, 스탈린 독재라는 결과는 허망했으나 러시아 혁명은 기아 상태로 죽어가던 [알료시카의 심장]을 다시 뛰게 했다. 이런 혁명을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심장은 권좌 아래서 뛰고 있다.


다행히 2017년 우리의 촛불 혁명은 참혹하지 않았고, 수백만의 살아 있는 심장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심장이 없는 권력을 도려낸 그 자리에 누구를 앉힐 것인가의 문제가 남았다. 우리는 그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이들에게 질문한다. 세월호 문제는? 기본 소득은? 사드 배치는? 강정마을은? 위안부 문제는? 이같은 문제에 그가 인간의 심장을 갖고 답하는지 계산적 두뇌만 가지고 답하는지 지켜봐야 한다.


그런데 권좌에 누가 오르든 그 자리에선 심장이 멈추기 쉽다. 굳이 이권에 욕심내지 않더라도, 혹은 선의로 가득 차 있더라도 권력의 자리에 앉으면 양심이 아닌 합리성이 주도권을 쥐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연한 이야기지만-  결국에는 권력의 토대가 되는 수백만의 양심이 살아 뛰고 있는게 더 중요하다. 부연하자면 이는 단지 정치적 양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적이라도 다친자를 보면 치유해주고, 배우기를 원하는 이를 보면 가르쳐주고, 아무리 좋은 목표를 위해서라도 무고한 이들을 차마 희생시킬 수 없는 인간적인 양심이다. 우리의 양심은 안녕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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