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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윤숙 Oct 15. 2019

코바야시 타끼지, 게 가공선(加工船)

 분노하고 희망하라

고바야시 타끼지

2016년 구의역 비정규직 노동자 사망. 당시 나이 19세. 2018년 태안 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 사망. 당시 나이 25세. 믿을 수 없는 근무 조건에서 사망하는 청년들이 21세기 대한민국에 아직도 존재한다. 이 시대는 시민의 발인 지하철을 멈출 수 없어서, 국가의 동력인 발전소를 멈출 수 없어서 우리 시대의 가장 어리고 백 없는 청년들을 제물로 바치고 있다. 그렇다면 여전히 우리에겐 코바야시 타끼지(小林多喜二, 1903~33)의 글이 유효하다. 일제 강점기 일본 노동자들의 현실을 묘사하면서 조선인 징용자들의 현실도 조망한 차갑고도 뜨거운 소설 [게 가공선]을 들여다보자.



어디서 본 듯한 지옥     


"어이, 지옥으로 가는 거야."

소설은 배에 오르는 한 선원의 인사로 시작된다. 이 한 마디를 건네고 소설은 작정한 듯 지옥도를 펼쳐 보인다. 단테의 지옥은 죽은자들이 가는 곳인데 이들이 말하는 지옥엔 산 사람들이 간다. 탄광 매몰에서 간신히 살아난 사내, 거간꾼들에게 휘둘려서 온 사내, 부모를 돕고자 떠나는 소년들, 촌장에게 아무것도 모르고 뽑혀나온 정직한 농부들이 지옥으로 간다. 홋까이도 남부의 항구도시 하꼬다떼에서 러시아 인근 깜찻까 바다로 떠나는 ‘게 가공선’이 바로 ‘지옥’이다.

     

"게 가공선은 '공장선'이지 '항해선'이 아니다. 그래서 항해법은 적용되지 않는다. …… 더구나 게 가공선은 완전히 '공장'이었다. 하지만 공장법의 적용도 받지 않는다. 그러니 이토록 편안하게,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영리한 중역은 이 사업을 '일본제국을 위해'와 연결했다. 막기 어려울 정도의 돈이, 그것도 몽땅 그의 품으로 들어온다."(31-32)     


모든 착취는 법과 법 사이에서 시작되어 국가를 위한 일로 포장된다. 그러나 결과는 재벌의 배를 불리는 일일 뿐이다. 그 끔찍한 착취 현장의 고통을 독자가 느낄 수 있게 작가는 꼼꼼하게 게 가공선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똥통’으로 칭해지는 더럽고 냄새나는 노동자들의 숙소, 노동자들의 몸과 침구에 기어 다니는 이, 구역질 날 것 같은 식사, 감독관의 학대와 노동자들 간의 밀고와 경쟁, 소년 노동자에 대한 성적 착취 등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노동 상황이 거기에 있다. 작가는 소설에서 치밀하게 노동 현장을 묘사하고 있다. 그의 관심은 자국민에서 끝나지 않는다. 일본 어딘가에서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조선인들도 소설에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노동자들 사이에 등장하는 짧은 대화이지만 작가가 학대받는 모든 이들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식민의 시대, 국경을 넘어선 착취의 시대. 이를 깨기 위해 분노가 필요하다. 이 소설에서 그것을 극적으로 끌어올리는 기폭제는 한 노동자의 죽음이다. 각기병에 걸려 죽은 선원의 장례식에서 노동자들은 그가 “살해당했다”고 정의한다.      


“나는 경(經)은 몰라. 그러니 경을 읽어서 야마다의 영혼을 위로해 줄 수는 없지. 하지만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어. 야마다는 얼마나 죽고 싶지 않았을까 하고. -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얼마나 살해당하고 싶지 않았을까 하고. 분명히 야마다는 살해당한 거야.”(97)     


죽은 어부는 이전까지 ‘각기병 어부’이라고 묘사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노동자들은 이름 없이 그저 특징으로만 묘사된다. 이름이 있는 사람은 회사에서 파견된 감독관 아사까와 뿐이었다. 그런데 죽는 순간 노동자의 이름이 등장한다. 야마다. 이름 없는 노동자들이 얼마나 착취당하는 지를 보여주려고 했던 작가도 차마 죽는 순간까지 그를 이름 없이 보내고 싶진 않았던 모양이다. 혹독한 노동 환경에 희생된 노동자를 대표하는 인물 야마다. 그는 비참한 노동현장에서 자본에게 살해되어 추운 바다에 수장된다. 그는 간신히 이름을 찾았으나 묻힐 곳을 얻지 못했다.      



자기편이 없는 이들의 각성 – 살해당하지 않겠다


‘각기병 어부’로 불리던 야마다의 죽음을 계기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각성하게 되고 복수를 결의한다. 더불어 결코 “살해당하지 않겠다”는 삶의 욕망도 커진다. 복수와 생존을 위한 단체 행동에 들어가는 노동자들. 그러나 그들의 첫 궐기는 순식간에 실패로 끝난다.

게어선,  감족 사부, 2009년 제작, daum 영화 검색

러시아 인근 깜찻까 바다에서 조업을 하는 게 가공선들을 위해 국가는 구축함들을 배치했다. 혹시나 있을 러시아와의 분쟁에서 자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노동자들은 군인들이 러시아는 물론 살인적인 노동현장에서도 그들을 구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착검을 한 총을 들고 배에 오른 군인들은 노동자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대표를 연행해 갔다.      


“우리에겐 우리 말고는 내 편이 없어. 그걸 이제 알았네.”  
“제국군함이라고 허풍을 떨어봤자 재벌들의 앞잡이잖아.”


봉기는 그렇게 맥없이 끝났다.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을 지켜줄 국가는 없었다.


게 가공선의 봉기가 참으로 빠르고 허망하게 실패 하자 더욱 가혹한 현실이 이어졌다. 노동자들의 봉기 따위는 단번에 제압할 수 있다는 관리자들의 확신은 강해졌고 성과를 올리기 위해 조업 강도는 더 세졌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빠른 시간 안에 스스로를 회복했다. 노동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더 큰 단결을 결심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앞날의 승산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 사느냐, 죽느냐 하는 거니까.”
“그래, 한 번 더!”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아마도 작가가 본 현실이 거기까지였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작가는 거기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소설엔 [부기]가 붙어 있다. 드라마 말미에 등장하는 ‘그로부터 3년 뒤’와 같이 [부기]는 “한 번 더!”를 외친 노동자들의 뒷 이야기를 기사처럼 빠르게 요약한다.


태업이 성공했고 다른 가공선들에서도 그와 유사한 태업이 있었다. 노동자들을 괴롭히던 감독들은 생산량이 적다고 비참하게 잘렸다. 다행히 게 가공선 노동자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고 살 방도를 찾았다.



[부기], 실패로 마무리 할 수 없는 이야기


노동자들의 태업 투쟁 성공. 이는 실제 일본 노동자들의 저항이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일본 공산당은 우익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철저히 탄압받았고 노동자들의 현실은 여전히 참혹했다. 그런데도 작가는 [부기] 추가했다. 그 때문에 소설이 이전까지 일정하게 유치되던 고발 다큐멘터리와 같은 서사 톤이 일시에 무너지고 희망적인 판타지가 되고 만다. 개연성 없이 붙여놓은 사족. 분명 문학적 실수다. 하지만 코바야시 타끼지는 희망을 말하지 않고서는 소설을 끝낼 수 없었다. 그는 '노동자적으로 써야한다'고 생각했다.


일본공산당 활동으로 감옥에 가서 혹독한 고문 끝에 숨진 타끼지는 ‘다시 한 번’을 외치는 혁명가였다. 그래서인가 그는 문학적 성공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게 가공선]엔 위대하고 선한 주인공이 없이 자본 대 노동자라는 단순한 대립만이 존재한다. 너무나 직설적이고 아마추어적인 비유법 등도 몰입을 방해한다. 주인공을 굳이 찾자면 처음부터 이름을 갖고 등장했던 감독관 아사까와일 것이다. 노동자인데 자본가인 줄 알고 노동자들을 착취하다 비참하게 몰락한 인물. 그를 보고 생각해야 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위치를 반드시 자각해야 희망이 있다고.


[부기]는 작가가 소설적 재미보다 주제를 강조한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그래서인가 글을 읽다보면 소설을 읽는다기보다 자극적인 선동 팸플릿을 보는 것 같다. 이것이 이 글의 특이점이다. 타끼지에게 문학은 재밌으라고 쓴 글이 아니다. 철학이 세상을 평가하기만 하고 세상을 변혁시키지 못했다고 한탄했던 마르크스의 심정으로 그는 문학에 대해 생각했다. 문학이 세상을 변혁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한들 무슨 쓸모가 있을까? 타끼지는 혁명을 위해 글을 썼고 참혹한 노동자들의 현실을 바꾸고자 투신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서른 살 젊은 나이에 감옥에서 죽어갔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2008년, [게 가공선]은 열악해지는 일본의 노동 환경 속에서 다시 주목받았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새롭게 출판 되었다. 법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있는 한 [게 가공선]은 다시 항해를 시작한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게 가공선]의 문학적 성공이 아니라 서사의 어색함을 감수하고서라도 희망적인 [부기]를 얹을 용기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든 해피 앤딩을 만들어 보고자 하는 용기. 그 용기를 우리는 가지고 있는가? 분노하고 희망하라. 그러면 상황이 다 끝난 뒤에도 희망의 [부기]가 붙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게 가공선]들, 현실과 가상 사이에서 지옥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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