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3), 마음의 치유제

인류는 삶의 마디마디 마다 신화를 찾았다.

by 구윤숙

“옛날에 카오스에서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생겨났어. 가이아는 하늘 신 우라노스를 낳았지. 그런데 …

“그런 말 하면 이단이에요.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셨어요.”


어느 비오는 날, 초등학교 2학년 교실에서 수업을 하게 된 나는 재밌는 이야기 해달라는 아이들의 요구에 신화를 꺼내들었다. 당돌하게 선생님의 말을 가로막은 9살 소녀는 자신의 종교적 상식과 어긋난 나의 이야기에 심판을 가했다. 자신의 신앙을 의심하지 않는 확고하고 단호한 표정은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 난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10세 미만의 아이들을 논리로 설득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라는 것을. 그 아이의 종교를 무시할 수도 없고 나쁜 이야기를 들려줘서 미안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단지 웃으며 신화는 이단이 아니라 지혜를 전달해 주기 위해 옛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말만을 덧붙였다. 그러나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의 질타를 면치 못했다. 신앙을 증거하는 일은 9살 인생에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실 돌이켜 보면 그 어린이의 반응은 놀라운 것이었다. 9살 기독교인은 그리스 신화를 ‘종교적 텍스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신화의 본질과 더 어울리는 반응이었다. 세계문학전집에서 신화를 읽는 이에게 신화는 문학이겠지만 그것은 엄연히 종교적 텍스트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현대적 의미의 신학적 텍스트는 아니다. 신화는 일점일획도 바꿔서는 안 되는 경전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신이한 이야기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대로 신화를 변형시켰다. 그들은 신화를 믿지 않고 이용했다. 신화는 세상을 이해하는 방편으로써 유용한 이야기였고, 때론 제의에서 신성한 힘을 불러내는 무가(巫歌)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연례적으로 특정 신화의 내용을 재연하여 엄혹하고 고통스런 삶의 진실을 마주했다. 특히 창조 신화는 신성한 힘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낭송되었다. 여행을 시작할 때, 새해 첫날, 대관식이나 결혼식과 같은 의식에는 어김없이 신화가 등장했다. 지금도 가톨릭은 혼배 미사에서 창세기 중 여자(이브)의 창조신화를 낭독한다.


미켈란젤로, 이브의 탄생,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1509년 - 1510년, 출처: https://upload.wikimedia.org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기 2장 22-24)


논리적으로 따져 묻기도 민망하고, 과학적 사실과는 맞지 않으며, 서사적 재미도 찾을 수 없다. 부모도 없이 만들어진 태초의 인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살아야 한다니 도무지 앞뒤가 안 맞는다. 그러나 이 짧은 대목이 결혼식에서 낭독되면 사정이 다르다. 지금까지 가장 친밀하게 지냈던 이들과 결별하고 꽃길이 될지 전쟁터가 될지 모를 새로운 가정을 향해 출발하는 일은 심리적으로 큰 도전거리다. 이럴 때 신화는 헤어짐의 고통과 출발의 불안을 위로 해주는 치유제가 된다. 신성한 시공간에서 배우자란 같은 뼈와 살을 나눈 협력자이며, 신이 빚어준 신성한 존재라는 것이 공표되고, 이어 자식과 부모가 서로 떨어져 살아야한다는 행동지침도 일러준다.


요즘 결혼식에서 낭독되는 성경 구절은 여기까지지만 창세기의 결혼 이야기는 좀더 이어진다. 태초의 남자와 여자가 뱀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었다. 신은 이들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하며 남자는 노동을, 여자는 출산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저주처럼 들리는 신의 가혹한 판결. 이것은 인간 삶의 어두운 면을 부각시킨다. 성인이 된 이후 너희는 고통스러울 것이다! 아잇적 즐거움과 유희는 사라지고 어른의 고뇌와 노동이 기다리고 있다. 인간이라면 이런 운명을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된다. 그러니 견뎌야한다. 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최대한 윤리적으로.


신화는 이런 방식으로 인간 삶의 진리를 엿보게 해주었고 인류는 삶의 마디마디 마다 신화를 찾았다. 그 중 최고(最高)의 신화이자 최고(最古)의 신화 중 하나인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그리스인의 성서”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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