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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Oct 21. 2018

면접의 기술_

결과가 어떠하든 모든 것은 경험이다.

#_ 가족 같은 회사에서 살아 남기


이십 대의 나에게는 없는 것이 참 많았다. 반복되는 야근에 시간이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박봉에 돈이 없었다. 굳이 솔직해지자면 괜찮은 성격이라든가 미모라든가 하는 것들도 없었고, 직장 생활에 필요한 사회성이라든가 정치력이라든가 하는 것들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바꿔보려는 의지가 없었고, 고로 나는 능력이 없었다.


짧았던 방송 작가 생활을 그만두고 의지 없는(능력 없는) 잉여 생활을 보낸 것이 두어 달. 눈이 떠질 때 일어나서 밥을 먹고 다시 누워 티비를 보다가, 허리가 아파올 때쯤이면 구인 광고를 뒤져 한 두 개씩 이력서를 보낸 것이 전부였던 백수 시절이었다. 얼마 안 되는 저금을 야금야금 까먹으며 집안의 식량만 축내는 것이 눈치가 보일 때쯤 한 회사에서 면접 제의가 들어왔다. 여기가 어디였더라?? 순간 구인 광고의 한 대목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작지만 알찬 ****에서 가족처럼 일하실 여자 카피라이터를 모집합니다_ 

가족? 여자?? 짧지만 강한 의문이 남는 구인 광고였지만, 이것저것 가릴 만큼 여유로운 백수가 아니었으므로 일단 면접을 보러 가기로 했다.


학동역 인근에 있던 건물 5층의 실내는 한 겨울이었음에도 반팔을 입어야 안성맞춤일 정도로 후끈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를 맞이한 중년의 신사, 그러니까 사장은 본인의 부친이 손수 사무실 바닥에 온돌을 깔았기 때문이라며, 회사가 아닌 건물의 자부심으로 면접의 포문을 열었다.

시작은 순탄했다. 사장은 부드럽고 교양 있는 목소리로 회사 소개와 함께 업무의 내용을 설명했다. 그곳은 굴지의 광고 기획사 출신인 그가 만든 작은 부띠끄로, 6명의 디자이너들과 4명의 디렉터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벽을 따라 디귿자 모양으로 놓여있는 데스크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외로운 섬처럼 놓여있는 또 다른 데스크. 사무실은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한눈에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작고 오픈된 공간이었다. 기업 사보와 브로슈어 등 지면 광고 위주의 작업을 하던 그 회사가 꿈에 그리던 직장은 아니었지만, 현직 백수에 동종 업계 경험이 전무했던 나에게는 새로운 출발을 하기에 적당해 보였다.

몇 가지 예상했던 질문과 대답이 오갔고, 짧은 시간 안에 광고 문구를 만들어보는 테스트를 거쳤다. 면접이 어느 정도 끝나간다고 생각할 즈음, 나의 자소서와 이력서를 바라보던 사장이 말했다. 이력서 사진이 잘 나왔네... 웃는 표정이 참 좋아 보여요. 제가 관상을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고개 좀 살짝 돌려볼 수 있어요? 사람은 귀 생김새도 아주 중요하거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실없는 농담일까? 나는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돌려 보았다. 사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업무의 경계를 넘은 질문들을 서슴없이 꺼내기 시작했다. 안동 권 씨라... 제가 참 좋아하는 성이에요. 옛날로 치면 아주 양반이거든. 형제는 어떻게 되시나? 혈액형은? 저는 B형 하고는 잘 안 맞거든요, 하하하_

유능한 카피라이터가 되기 위한 맞춤형 혈액형이라도 존재하는 것일까? 면접의 정석과는 거리가 먼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까. 어색한 웃음과 함께 온 몸을 쭈뼛거리는 순간, 너는 상사의 비위를 맞춰줄 수 있는 융통성이 없어서 문제,라고 말하던 옛 직장 동료가 떠올랐다. 사장의 부드러운 말투는 면접과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들도 그 상황에 맞는 농담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내려 나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그래, 모난 돌 같은 내가 문제인 거지. 이미 면접은 끝을 향하고 있었고, 그저 웃자고 하는 말들에 내가 너무 민감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융통성 있는 사회인이 되고자, 나도 함께 웃어 보였다. 다행이네요, 전 AB형이라서. 하하하_


테스트에서 만든 광고 문구 때문이었을까, 관상이 좋아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안동 권 씨에 AB형이었기 때문일까. 사장은 나를 무척 마음에 들어하는 듯했다. 끝이 없을 것 같았던 실없는 이야기도 지나가고, 면접을 마무리하면서 그는 내게 회사에 궁금한 것이 있는지 물어봤다. 왜 여자 카피라이터만 뽑으시려 하나요? 이곳은 가족이 운영하는 회사인가요?라고 되묻고 싶었지만, 내 입에서는 어색한 웃음만 다시 흘러나왔다.


그리고 한 달 뒤. 디귿자 모양을 완성시키는 가장 끄트머리 데스크는 내 자리가 되었다. 회사 내의 유일한 남자였던 사장은 한가운데에 놓여 있던 외로운 데스크에 앉아 모든 직원들의 동태를 한눈에 파악하곤 했다. 혈액형이 B형인 직원은 존재하지 않았고, 어쩐지 모든 직원들의 성은 조선 시대 양반들의 후손 임직 한 느낌을 갖게 했다. 야, 너 왜 사장이 B형 아닌 여자만 골라 뽑는 줄 알아? 전에 B형 남자 직원이 사장이랑 대판 싸우고 그만뒀잖아. 그 뒤로 고분고분할 거 같은 여자들만 뽑는다니까_ 고분고분함 보다는 씩씩함이 어울리던 옆자리 선배의 친절한 설명은 면접에서 해결하지 못한 의문을 깔끔하게 풀어주었다.


사장은 우리 모두가 자신의 딸들 같다며 (사장에게는 두 아들만 있었고, 우리는 사장의 딸이 되길 원치 않았다.) 예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직함 대신 **야, 하고 이름을 불렀다. 직원들의 사생활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그의 모습이 선을 넘은 지나친 행동이었는지, 정말 가족 같은 마음에서 비롯한 선의의 행동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그 누구도 가족 같은 마음으로 사장 가족을 위한 소소로운 심부름을 수행하진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중 나에게 주어진 소소로운 심부름은 주로 건강식품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건강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사장의 주문은 주로 이러했다. **야, 내가 오늘 아침에 티비를 보니까 암 예방에 좋은 자연성분이 담긴 무슨 제품이 좋다더라. 어느 방송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고, 제품 이름도 잘 생각이 안 나. 그 시간대 프로그램들 검색해서 어떤 제품이었는지, 어디서 파는지 한 번 알아봐라_ 그리고 그는 강조했다. 네가 방송작가 출신이니까, 그거 찾는 거 어렵지 않겠지_


가족 아닌 가족 같은 회사 생활을 한 기간은 정확히 일 년.

능력에 대한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시기에 준비 없이 시작했던 이직이었다. 면접을 보던 순간부터 많은 의문이 들던 회사였지만, 내게 나름 인생의 발판이 될 만한 다양한 경험을 준 곳이기도 했다. 업무에 대한 지식과 나만의 포트폴리오, 실력이 좋아 배울 것이 많았던 직장 선배뿐 아니라 싫어도 좋은 척 적당히 분위기를 맞출 줄 아는 사회성도 얻었다.

타성에 젖어 사장과의 가짜 가족 행세도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 어쩌면 더 오래, 목표도 없이 다녔을지 모를 그 회사를 나온 계기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평소 믿고 따르던 직장 선배가 나에게 자신의 퇴사 계획을 말해주었던 것이다. 그녀와의 긴긴 대화 끝에 내 머리 속에 남은 짧은 내용은 이러했다.

이 회사에서 내가 배운 것은 너무 잘하지 말라, 는 거야. 너무 잘하면 더 많은 일을 줘. 그런데 그에 대한 보상은 없더라. 사장식으로 말하면, 내가 무슨 살림 밑천 큰딸도 아니고 말이야. 어느 순간부터 더 잘할 수 있는데 적당히 하는 내가 보였어. 더 잘하고 싶니? 더 잘할 수 있는 곳으로 가.


사장은 얼마 안돼 살림 밑천 큰딸을 잃었고, 머지않아 고분고분 말 잘 듣던 막내딸도 잃었다. 나는 일 년 전보다 열심히 이력서를 다듬고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이직을 했고 (그리고 이직한 회사는 몇 년 안가 망했지만), 선배는 작은 광고 회사를 차려 알차게 꾸려 나갔다. 하지만 두 딸 모두 사장의 회사가 잘 굴러갈 수 있을까, 따위의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구인 사이트에는 종종 가족 같은 직원을 찾는 익숙한 광고가 올라왔으니, 누군가는 다시 그의 가짜 가족 역할을 해주지 않았을까 짐작했을 뿐이다.






#_ 그룹 면접에서 살아 남기


삼십 대의 나에게도 없는 것이 참 많았다. 이십 대에 없던 돈이 나이 먹었다고 저절로 생기지도 않았고 (유학 생활 일 년 만에 더 가난해졌다), 괜찮은 성격이라든가 미모라든가 하는 것들이 어느 날 반짝 생기지도 않았다 (반짝하고 나타난 건 주름과 기미뿐). 스몰 토크는커녕 하이, 한 마디도 부끄러운 영어 실력으로 사회성이 있을 리 만무했고, 정치력 따위를 활용할 직장 자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언젠가는 나도 가질 수 있겠지, 라는 근거 없는 희망 또는 어차피 가질 수 없는 거, 라는 깔끔한 포기를 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십 대의 내게는 단순한 희망이나 포기로 해결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캐나다 영주권이었다.


밴쿠버 생활 일 년. 컬리지 졸업과 함께 받은 post-graduation work permit은 합법적으로 일을 하며 캐나다에서 지낼 수 있는 또 한 번의 일 년을 의미했다. 유학 후 이민의 방법을 택한 나로서는 그 일 년 안에 외국인인 나를 고용하고 영주권 신청을 위한 서류 지원이 가능한 회사를 찾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길은 쉽지 않았다_

 

졸업 후 석 달째. 매일 아침 새로 올라오는 구인 광고를 뒤져 이메일을 보낸 곳이 총 백 군데를 찍었다. 시간 여유가 있을 때 이력서를 들고 직접 방문한 곳들을 합하면 훨씬 더 많은 수의 이력서가 뿌려졌을 것이다. 그중 인터뷰 요청이 온 곳은 삼십여 군데. 다시 절반은 짧은 전화 통화만으로 내 영어 실력을 감지하고 바로 거절의 신호를 보냈다. 

나머지 절반의 회사들과 여러 번의 면접을 거친 끝에, 나는 한 daycare에서 sub teacher(정규직 교사의 휴가 시 일하는 대체 근무 교사)가 되었다. 이는 영주권 신청이 불가능한 조건이었지만 내겐 별다른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회사들은 비자나 영주권과 관련한 귀찮은 일을 하면서까지 굳이 외국인을 뽑지 않을뿐더러, ECE(유아교육) 계통의 경험이 전무한 (영어마저 부족한) 졸업생을 뽑을 가능성은 더욱 희박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중에 있던 돈은 바닥을 보이던 상태였으므로 당장 일이 필요하기도 했다. 


출근을 준비하던 어느 날 아침, 또 한 번의 인터뷰 요청 전화가 걸려왔다. 어느 정도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던 나의 입에서는 평소 마지막까지 아끼다 조심스럽게 꺼냈던 말부터 터져 나왔다. 내 work permit은 몇 개월밖에 남지 않았고, 나는 영주권을 위한 스폰서가 필요해. 너희 회사에서는 외국인을 지원해줄 수 있니? 그리고 전화기 너머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럼, 네가 이 포지션에 적합한 사람이라면 해줄 수 있어. 우선 인터뷰부터 해볼까?

구글맵으로 검색해 본 인터뷰 장소는 참으로 멀었다. 내가 살고 있던 곳과 임시로 일하던 daycare, 그리고 인터뷰를 볼 daycare는 광역 밴쿠버 중심에서 크고 정확한 삼각형 구도를 이루고 있었다. 인터뷰 시각은 저녁 일곱 시. 퇴근이 다섯 시였으니 먼 거리일지라도 여차저차 가능한 일정이었다. 구제 불능 길치에 스마트폰도 없었던 나는 프린트한 지도를 고이 접어 가방에 넣어두었다. 이번만큼은. 이번만큼은 잘 될 거야_


결론부터 말하면, 잘 되지 않았다.

근처 다리에서 벌어진 교통사고로 인해 학부모들은 제시간에 아이들을 픽업하러 오지 못했고, 나의 퇴근 시간은 삼십 분 이상 늦춰졌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헐레벌떡 인터뷰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십분 이상 늦은 상태였다. 소심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열명이 넘는 사람들의 눈이 나를 향했다. 뭐지, 이 많은 사람들은? 그들은 교실 안에서 큰 원을 그리며 앉아 있었고, 그중 하나가 나에게 손짓을 하며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자, 그럼 각자 자기소개부터 해볼까? 그랬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처음 경험한 그룹 면접. 누군가가 지목을 당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자발적인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인종은 다양했지만 그들의 영어는 완벽했다. 나는 마지막 주자가 되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다. 제발. 제발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취업에 대한 기대는 진작에 포기하고 그저 이 순간을 모면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그룹 면접은 밤 아홉 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면접은 토론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진행자가 몇 가지 질문을 던져주면 자신의 의견을 알아서 말하는 식이었다. 한 아이가 계속적인 폭력 성향을 보이며 다른 아이들을 물고 때린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말을 하는 바람에 토론이 여러 번 중재되기도 했다. 진행자가 대답을 듣기 위해 누군가를 지목할 필요도 없이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나서지 않으면 내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두 시간 내내 조용히 자리만 꿰차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룹 면접이 끝나갈 즈음 주최 측은 갓 주문한 피자와 음료를 제공했다. 이렇게 늦게까지 함께 해줘서 고마워. 마지막으로 피자를 먹으면서 우리 센터를 둘러보는 건 어때? 다 돌아보고 난 뒤에 좋은 점이든 나쁜 점이든, 어떤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알려줘. 그리고 여기 종이에 아이들의 시각으로 오늘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려볼래? 한 조각의 피자는 퍼석해진 목구멍으로도 술술 넘어갔고, 이내 하루 종일 참고 있던 시장기를 폭발시켰다. 그래, 어차피 안될 거, 대충 마무리하고 어서 집에 가자_ 구름만 잔뜩 끼어 있던 그날의 내 마음과 달리, 나는 무지개를 그렸다. 눈 앞에 형형색색의 크레용이 놓인 게 단순한 이유였으나, 아이들과 함께 할 때 생기는 행복의 무지개라는 식으로 둘러대었다. 센터에 대한 장단점을 토론하던 열띤 분위기도 사그라질 때쯤, 진행자가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던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지나치게 조용하니 오히려 눈에 뜨였던 것일까. 나는 마지못해 교실 한쪽에 마련되어 있던 construction corner를 가리키며 말했다. 진짜 톱이나 망치를 전시한다는 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 아이들이 가지고 놀다가 사고라도 난다면 어떡해? 그래, 적당한 대답이야. 이제 집에 가자. 하지만 나의 짧은 대답은 끝나가던 분위기를 다시 한번 토론의 장으로 몰아갔다.

_ 그럼 너는 아이들이 플라스틱 장난감만 가지고 놀길 원하는 거야?

_ 나는 보여주기 식이 아닌 직접 체험이 가능한 놀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_ 그래도 아이들이 다칠 수 있으니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전시하는 게 좋지 않을까?

_ 선생님들의 감독이 잘 이루어진다면 문제가 없지 않아?

_ Risky play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좋은 영향을 생각해봐.

......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적당히 내뱉었던 한 마디가 그렇게 큰 파장을 불러올 줄이야. 논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나는 정작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자유 토론을 벌이는 이들을 지켜봐야 했다. 나는. 나는 그저 집에 가고 싶었을 뿐이야_


면접을 마치고 나왔을 땐 이미 어둠이 한참 깔린 뒤였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왔던 길을 되돌아 버스를 탔다. 늦은 시각 때문인지 승객들은 많지 않았고, 그마저도 하나둘씩 하차를 하자 버스 안은 금세 운전기사와 나만 남게 되었다. 물 흐르듯 고요히 흐르는 차창 밖의 풍경. 적당하게 움직이는 승차감에 몸을 싣자 꾹꾹 눌러왔던 모든 감정들이 한순간에 폭발하는 느낌이 들었다. 몸도 마음도 지쳤고,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그룹 면접을 하며 바보처럼 앉아있던 내 모습이 너무나 초라해 보여 견딜 수 없었다. 어떻게든 버텨보려 노력할수록 나는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여기가 마지막 정거장이야.

운전기사가 큰소리로 외쳤다. 한참 자학의 세계에 빠져 있느라 버스가 멈춘 줄도 몰랐던 것이다. 

여기가 어디야? 나는 East Van으로 가야 하는데? 

그럼 버스를 잘못 탔어. 

엉거주춤 일어나며 바라본 창밖 풍경은 그저 깜깜한 풀숲이었다. 오늘도 여지없이 길을 잃었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평정심이 힘을 잃고 출렁였다. 운전기사를 의식할 새도 없이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끄윽끄윽 궁상맞은 소리마저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 모습이 얼마나 지질했을까. 운전기사는 앞문으로 내리는 나를 붙잡고 어디에서 버스를 타야 할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저기 맞은편 나무들 사이에 난 길 보이지? 거기만 지나면 큰 도로가 있어. 거기서 버스를 타면 시청 앞에서 내려줄 거야. 그리고 다시 East Van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면 돼.

좀 멀긴 한데 괜찮아. 그냥 조금 돌아가는 거야_


그랬다. 돌아 돌아 간 그곳에 내가 원하는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날 힘들게 했지만,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먼 길을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는 거니까. 울다가 잠든 다음 날에도 나는 퉁퉁 부은 눈으로 구인광고를 뒤졌고, 그 날과 비슷한 경험은 여러 번 반복되었다. 그리고 몇 달 뒤. 비자 기한을 두세 달 남기고 sub teacher로 일하던 곳에서 나를 정규직으로 채용했다. 함께 일했던 매니저는 내가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해줬고, 그로부터 일 년 반 뒤에 나는 그렇게 원하던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다. 


좀 멀긴 한데 괜찮아. 그냥 조금 돌아가는 거야_

그때 운전기사는 얼마나 당황했을까. 다 큰 어른이 길 한 번 잃었다고(사실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어린애처럼 펑펑 울고 있었으니, 퍽이나 난감했을 터였다. 길도 모르고 영어도 서툰 외국인에게 보여준 단순한 호의였을지 모르지만, 나에겐 그의 마지막 한마디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그는 모르겠지. 그저 길을 알려주려 했던 한 마디가, 울며 잠든 그날 이후 나의 힘든 시간을 견디는 힘이 되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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