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는 좋은데 노력이 부족한 줄만 알았지
#_ 변명 하나, 졸음이 많아서 공부를 못했을 뿐
내 몸에는 알람시계가 숨어있다. 몇 시에 일어나야지, 하고 마음에 되새기면 알람이 없어도 정확한 시각에 저절로 눈이 떠지는 것이다. 문제는_ 문제는, 눈을 뜨고 있는 내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졸음을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
그러한 연유로 친구들 사이에서 내 별명은 오초빵이었다. 수업 시작과 동시에 5초만 세면 총 맞은 듯 빵, 하고 졸음에 쓰러진 까닭이었다. 모든 교과서에는 졸음과의 사투에서 패배한 펜 자국이 소나기처럼 죽죽 흐르고 있었고, 공책마다 어느 나라 언어인지 모를 글자들이 춤을 추곤 했다. 때때로 마음속 생각이 본능적으로 나와 나도 모르게 적고 있는 순간도 있었다. 수학 공책에 공식 대신 적혀 있던 '매점 컵라면...' 같은 글들은 늘 졸리고 배고팠던 나의 십 대를 대표했던 본능의 처절한 표현이었다.
단 한 번도 그럴듯한 성적을 보이지 못했던 내가 학창 시절 내내 세뇌받은 말은 '우리 딸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이 부족해서'였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큰 잔소리를 한 적이 없을 정도로 내게 별다른 기대가 없어 보였던 엄마 아빠도 (우리 딸은 공부는 못해도 건강하니 다행이다,라고 생각하자) 대외적으로 딸을 옹호할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명분은 매번 성적표를 받을 때마다 나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는 위안이 되었다.
그래, 난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하지 않았을 뿐이야_
수능을 코앞에 둔 고3 시절, 나는 드디어 큰 마음을 먹고 좀 더 노력하기로 했다. 지금부터 하루에 영어단어를 5개씩 외우고, (100일이면 500개나 되는 단어들을 알 수 있다! Amazing!) 모르는 수학 문제를 5개씩 풀자! 나름 거대한 목표를 세운 배경에는 반에서 언제나 일등을 놓치지 않았던 친구의 든든한 지원이 있었다. 항상 웃는 얼굴로 누구에게도 화를 내 본 적이 없던 이 친구는 (그러니 그녀를 보살이라 칭하자) 반 아이들이 모르는 문제의 답을 그 어떤 선생보다도 쉽게, 그리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수업시간에 열심히 졸아버린 나 자신을 한탄하며, 쉬는 시간이면 교과서를 부여잡고 보살에게 달려가길 몇 차례. 보살은 작은 손바닥을 오므렸다 폈다, 공중에서 훠이훠이 젓기를 반복하며 내게는 우주의 신비와 같은 수학 문제를 온몸으로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한참 뒤면 나는 왜? 그게 왜 그렇게 돼?라고 되묻고, 보살의 손은 다시 여기저기 허공을 휘저으며 바쁘게 움직이기 일쑤였다.
이제 알겠어? 보살의 지쳐가는 목소리와 왜? 왜 그런 건데??라고 말하는 나의 목소리가 무한 반복되던 어느 날. 허공을 찌르던 보살의 손끝이 급격히 힘을 잃는가 싶더니 탁, 하고 힘차게 펜을 내려놓았다.
야, 오초빵! 내가 진짜 속 터져서 더는 못하겠다! 그만하자 이제!
그 날 나는 처음으로 보살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충격이어서, 당시의 나는 스스로가 노력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머리도 좋지 않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도 이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보살의 분노한 모습을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엄마가 된 보살이 딸아이의 끝없는 왜?라는 질문에도 지치지 않고 조목조목 설명해주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그래, 역시 보살이구나. 그런 보살도 분노케 했으니,
내 머리는 결코 좋은 게 아니구나_
#_ 변명 둘, 방향치만 아니었어도 잘 했을 텐데
호주의 워킹 홀리데이 생활이 익숙해져 갈 무렵, 나는 주중의 스시집 알바 외에도 주말의 경기장 청소 알바를 병행하기 시작했다. 장소는 시드니 시티에서 버스를 타고 조금만 가면 자리하고 있던 제법 큰 경기장으로, 호주의 대표 스포츠인 크리켓 시즌이 다가오면 하루 열 시간 노동은 기본으로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청소 알바는 자주 사람이 바뀌었다. 육체적인 노동의 강도를 떠나 비위가 약한 이들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비록 빡빡한 워킹 생활에 가뭄의 단비 같은 현금을 쥐어준 알바였지만, 나 역시 몇 번이나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곤 했었다. 다만 나의 경우엔 약한 비위가 아니라 방향치라는 현실이 문제였다.
당시의 나는 함께 알바를 하던 동생들과 시티에서부터 경기장까지 늘 함께 이동을 하곤 했다. 한 평생 방향치라는 운명의 굴레에 묶여 살고 있는 내게 있어 스마트폰과 구글맵이 없던 그 시절의 길 찾기는 (게다가 언어의 장벽까지) 출구 없는 미로를 빠져나가는 것과 맞먹는 미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늘 경기장 안에서 벌어졌다. 두 개의 큰 경기장을 돌아다니며 청소를 하기 위해서는 내부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필수였는데, (첫 번째 필수조건인 든든한 비위만큼은 일등) 나는 매번 돌아서면 나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다시 돌아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매니저로부터 '어디가 더러우니 지금 가서 치워라'라는 지시가 떨어지면, 그 '어디'를 찾는데 걸리는 시간과 '지금'이라는 명령어의 부조합에 온 신경이 바짝 타버리곤 했다. 방향치도 하루 이틀이지,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면 어느 정도 익숙해질 법도 한데 길을 배우는 나의 기술은 단 한치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랬다. 사람들의 흔한 생각과 달리,
반복 학습은 내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았다_
크리켓 시즌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던 날, 나의 방향치는 클라이맥스를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엄청난 인파가 빠져나간 밤늦은 시각에서야 다시 텅 빈 경기장을 청소하기 시작했고, 맑은 별들이 총총이 떠 있는 새벽이 되어서야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힘든 하루 값진 현금, 이제 집에 가자_ 하고 돌아서는 순간, 나를 부르는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렸다. 3층 동쪽 끝 화장실 마무리가 안 되었다는데 확인 좀 해주겠나? 완벽한 hearing이 되는 한국어가 원망스러운 순간. (그렇다. 청소 매니저도 한국인이었다) 3층은 알겠는데, 동쪽은 어디일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더듬더듬 동쪽을 찾아가면서 나는 어느 순간 미지의 세계에 도착해 있었다. 눈 앞에 보이는 화장실을 청소하고 돌아서니, 유독 어둡고 음침하게 느껴진 그곳은 몇 개월간 일을 하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듯한 기분이었다. 다시 걸어온 길을 돌아가려 했지만, 아무리 주변을 살펴도 내가 지나온 곳은 이미 기억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핸드폰 배터리는 진작에 나가버렸고 함께 일하던 동생들은 경기장 입구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얼마를 헤매었을까. 텅 빈 경기장이 이상한 생물체라도 살고 있는 동굴처럼 느껴지면서 무서움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서움이라는 감정은 내가 이 먼 곳까지 와서 왜 이러고 있나, 라는 원초적 서러움으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_ 마음속으로 초저가 한국행 비행기 표를 클릭하는 순간 저 멀리로 익숙한 표지판이 보였다. 반 미친 모습으로 표지판을 따라나가 나를 기다리던 동생들의 얼굴을 보자, 반가운 마음에 마지막 긴장의 끈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아아, 녀석들.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리고 그때 빨리 집에 가고 싶었던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어디에 있었어? 누나 뺑뺑이 치는 바람에 우리가 3층 동쪽 끝 화장실 청소하고 왔잖아_
그렇다면 내가 청소한 그곳은 어디였을까...
그때 배웠다. 옛말 틀린 것 하나도 없다는 것을.
머리가 나쁘면 진정 고생하는 것은 손발이구나_
#_ 변명 셋, 성실하면 기본은 간다고 했는데
일 년 간의 호주 워킹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흘러갔고, 내 인생의 변화를 줄 만한 화려한 이력 따위는 더해지지 않았다. 워킹을 죽어라 해서 수중에 많은 돈을 남긴 것도 아니었고, (정확히 200만 원을 모았다) 호주 곳곳을 여행하며 추억을 남긴 것도 아니었으며, (시드니를 벗어난 본 적이 없었다) 영어가 늘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나이만 늘었다) 뻔한 결과였지만 막막했다. 시작이 현실도피였다고 해서 이 처참한 결과가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시드니 생활을 정리하는 내내,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과 반성을 반복해야 했다. 다시 하면 잘할 수 있을 텐데_ 무작정 떠나와 목표도 방향도 알지 못한 채 걸어온 지난 일 년의 시간을 되감고 싶었다. 그래서,
2010년, 나는 다시 학생의 신분이 되어 캐나다에 왔다.
목표는 일 년 간 유아 교육을 공부하고 무사히 졸업하는 것. 졸업 후 취업을 통해 이민을 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고,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새로운 전공을 살려 취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진로였지만 아이들을 좋아하는 내게 잘 맞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비자를 신청하던 순간부터 첫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이번엔 정말 열심히 노력하는 만학도가 되겠노라 다짐한 것이 백만 번쯤은 된 것 같다.
그리고 수업을 들은 지 일주일째.
울었다. 차마 사람들 앞에서 못 울고, 홈스테이 집에 돌아와 방문을 닫는 순간 펑펑 울었다. 반 이상의 수업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채 흘려보낸 건 기본이었고, 간단한 과제의 내용조차 숙지하기 못해 한국인 학생들에게 매달리며 재차 물어봐야 했다. 당장 오늘 해결해야 할 과제와 며칠 뒤에 있을 프레젠테이션을 생각하니 참으로 막막했다. 미세한 역경의 순간마다 나오는 뻔한 레퍼토리, 이 나이에 나는 뭘 하는 걸까, 한국에 돌아갈래_ 가 머릿속 어딘가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하지만 돌아갈 수 없었다. 굳건하게 다짐한 목표를 이루기 위함은 아니었고, (나는 나약한 인간이므로) 단순히 지인들에게 쪽팔려서,였다. (일주일 치 수업을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학비가 절반밖에 환불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결정적인 이유였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에 쪽팔린 짓은 못하겠다, 라는 생각이 자아실현에 끼치는 영향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그랬다. 그 날, 눈물 콧물을 흘려대며 엄청나게 못생겨진 얼굴로 내가 한 일은 새벽까지 과제를 끝내는 것이었다. 문법도 내용도 엉망이었지만 어떻게든 끝을 내야 했다. 그리고 다음 날엔 쪽팔리지 않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맨 앞자리에 앉아 수업을 들었다. (사실 맨 앞자리에 앉는 것은 키가 작아 항상 앞에 앉아야 했던 학창 시절에서 온 반사적 행동이었다) 그렇게 매일매일, 하루를 버틴다는 느낌으로 지냈다. 가장 속상했던 것은, 내가 공부하던 과정 자체가 객관적으로 전혀 힘든 것이 아니었고 다른 학생들은 (많은 인터내셔널 학생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여유가 있어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남들이 한 시간에 끝낼 수 있는 과제를 위해 나는 밤을 새야 한다는 것. 그 현실이 속상해서 지질하게 울다가, 다시 못생겨진 얼굴로 과제와 씨름을 하고, 다음날이면 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 수업을 듣는 것이 일 년 가까이 반복되었다.
그래, 결국은 성실한 사람이 이기는 거야_
그것은 나를 세뇌시키기 위한 주문이었다. 그럴 줄 알았지,라고 손가락질당할까 봐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저 나이에 왜 저래, 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매일 아침 열심히 출석을 했다. (나이 서른 넘으면 그냥 늙었다고 생각했다. 참 귀여운 생각이다)
덕분에 나는 아주 성실한 학생이 되었다. 일 년 여의 과정 동안 유일하게 지각도 결석도 하지 않은 학생이었고, 늘 앞자리를 사수하는 학생이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목표한 바대로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아주 아주 성실하게_ 나 자신에 뿌듯함을 느끼며 수료증을 받던 날, 나를 잘 챙겨주던 instructor가 말했다. 그동안 수고했어. 넌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니 앞으로도 좋은 곳에 취업해서 잘할 수 있을 거야. 일단 이력서 좀 잘 고쳐 쓰고, 면접 보려면 영어 공부 좀 더 하고... 그녀는 함박 웃는 얼굴로 내가 노력해야 할 수 만 가지를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그 수만 가지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성실함은 기본일 뿐이야. 기본만으로 이 험한 세상 살아갈 수 있겠어?
그렇구나. 나는 기본만 있으면 어디서든 버틸 수 있는 줄 알았다. 학교만 무사히 졸업해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본을 닦은 후에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그것들을 나만의 능력으로 만들어야 '잘' 살아갈 수 있는 게 현실이라는 것은 생각치 못한 것이다.
어려웠다. 그리고 지금도 어렵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