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력을 팔고 내가 얻는 것
#_ 인생 첫 알바
내가 선택한 인생 첫 알바는 '신문 돌리기'였다.
1992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당시의 국민학생들에겐 핸드폰이나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일까. 우리는 늘 하루가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 긴 하루를 '배달 알바'에 투자하는 것이 6학년 2반의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남자 아이들은 제법 키도 크고 힘도 쎄서 (라고 기억한다.) 대부분 우유 배달을 했고, 여자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신문을 돌렸다. 소심했던 나는 그들을 지켜보던 호기심이 선망으로 바뀌던 순간, 그 유행의 막차를 타고 신문을 돌리기 시작했다.
유행을 따라가는 쿨한 국민학생이 되는 길은 험난했다.
한달 내내 10부를 돌리면 만원, 중도에 그만 둘 시 내가 받을 수 있는 돈은 없음_ 친구들을 따라간 신문 보급소의 소장은 탐탁치 않은 눈초리로 나를 훑어 보더니 30부의 신문을 주었다. 또래에 비해 최소 한 뼘은 작은 키에 자전거조차 타지 못한다는 사실에 그마저도 건네주기 싫은 눈치였다. (다른 친구들은 최소 50부의 신문을 돌렸다.) 나에게 주어진 배달 지역은 지금은 재개발로 사라진 6층짜리 아파트 단지였다. 자전거 없이 무거운 신문을 짊어진 채 엘리베이터 없는 6층 건물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사이, 알바를 시작한 이유가 무색해질 만큼 내 몰골은 유행과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신문지 잉크로 얼룩진 얼굴도, 내가 지나야 했던 수많은 계단들도 아닌 나의 작은 키였다. 보급소의 소장이 내게 내린 임무는 신문을 바닥에 두는 것이 아니라 현관문 위쪽 경첩 사이에 끼워두는 것이었다. 6학년이 되어서야 3,4학년 쯤으로 보이기 시작한 작은 키 덕분에 나는 여러 번의 점프 끝에야 간신히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괜히 시작했다, 그만두고 싶다, 라고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유행을 따라가는 쿨한 국민학생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엄마의 레이더에 걸린 나는 비 오는 날 먼지나도록 맞고 알바를 그만두어야 했다. (엄마는 정말 먼지 털이개로 나를 때렸다.) 매일 더러운 얼굴로 서너 시간씩 늦게 돌아오는 딸래미가 수상했던 엄마는, 하교 시간에 맞춰 집 앞 골목길에 서 있다가 지나가는 아이들을 붙잡고 심문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엄마의 '6학년 2반, 아무개 아니?'로 시작한 질문에 누군가는 '걔 신문 돌리는데요.' 라는 대답으로 끝을 냈던 게 분명했다. 한참을 혼나면서 들었던 말 중 기억나는 대목은 '얘가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줄 모르고' 였다. 개구리 소년들의 실종 사건 이후 엄마의 세상 걱정은 끝이 없는 듯 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엄마가 반대해서_ 라는 명분은 힘들어서 못하겠어_ 보다 알바를 그만두기에 그럴 듯해 보였다. 어차피 오래 버티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할 때 쯤, 엄마의 매 타작은 끝이 났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엄마의 부품 조립 알바를 거드는 무보수 조수가 되었다. 그렇게 내 인생 첫 알바는 정확히 20일 만에 끝이 났고, 예상한대로 신문 보급소로부터는 단 한 푼도 받을 수 없었다.
미처 제대로 영글지 못했던 노동력을 팔고 내가 얻은 것은, 끝까지 하지 못할 바에야 시작도 말라_ 는 교훈이였다.
#_ 인생 첫 직장
나를 선택해준 인생 첫 직장은 '방송국'이었다.
2003년, 종편 채널은 커녕 케이블 채널도 다채롭지 못했던 그 해,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공중파 방송작가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내게 있어 크나 큰 행운이었다. 누군가로부터 무슨 일 해요? 라는 질문을 받으면, 왠지 모를 부끄러움과 자부심이 섞인 목소리로 방송작가에요, 라고 대답하며 묘한 기분을 느끼던 시기였다. 책 읽기가 좋고, 글쓰기가 좋았던 나_ 작가라는 타이틀에서 오는 성취감은 기본이요, 연예인들과 자연스럽게 스쳐갈 수 있는 기회, 점심 시간이면 증권맨들과 경쟁하듯 여의도의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은 덤이었다.
내가 처음 맡은 일은 일년 정도의 사전 준비 기간을 거쳐 연말에 방송되는 특집 프로그램이었다. 나와 또 다른 동갑내기 동기는 방송국 5층 끝자락에 마련된 사무실에서 은퇴 직전의 부장PD와 차장PD를 '모시고' 이것저것 자료를 수집하거나, 출연자 섭외를 진행하거나, 가끔씩 프로그램에 관련한 광고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었다. 실제 방송 시기가 가까워질 때까지 메인작가도 없었기에, 사회 초년생 우리의 입지는 막내작가와 어르신들의 비서 역할의 중간쯤 되는 지점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빈도가 높았던 업무는 각 어르신들의 입맛에 맞는 커피를 타는 것이었다. 일년 여간 아침 출근 인사로 들었던 말, 나 커피 한 잔_ 진짜 방송작가의 업무가 무언인가를 생각하며 기계처럼 커피 둘, 설탕 둘을 섞다 보니 어느 순간 연말이 되었고, 우리의 긴 프로젝트도 끝이 났다. 사회 생활 딱 일년을 채우자 나는 말도 안되는 자만심에 우쭐해졌다. 회의감에 젖어 커피를 타던 내 모습은 잊어 버리고, 이제 진짜 그럴듯한 방송작가가 된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한 달 뒤, 나는 방송사를 옮겨 주말 저녁에 방송되는 정규 프로그램의 막내작가가 되었다. 시청률도 제법 안정적이었고 작가들도 내 위로 다섯 명이나 되었다. 이전 방송사에 비해 구내식당 음식이 형편없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발전적으로 보였다. 그래, 이제 내 꿈을 펼치는 거야_ 라며 호기로왔던 순간도 잠시. 일주일 단위로 해내야 할 업무량과 그 범위는 내 상상 이상이었다. 문득 스트레스성 방광염으로 일을 그만두었다는 이전 막내작가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막내작가에겐 대본을 쓸 일이 없었다. '글'을 쓴다라는 개념과 가장 가까웠던 일은 간단한 자막이나 각 코너 미리보기 멘트를 쓰는 것이었고, 구성 회의는 물론 출연자 섭외 및 관리, 관련 정보 수집, 소품 및 장소 섭외까지 온갖 잡다한 일을 하는 것이 막내작가였다. 그 중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전문적인 정보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주말 버라이어티 쇼를 표방했지만 건강과 환경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기에, 나는 많은 시간을 도서관과 인터넷의 바다에서 표류해야 했다. 시간이 부족했다. 밤 늦게서야 (때론 새벽이 되어서야) 방송국을 나서도 잠을 자는 순간까지 해야할 일들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말도 안되는 자만심으로 우쭐대던 내 모습은 진작에 사라지고 없었다. 괜히 시작했다, 그만두고 싶다, 라고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꿈을 이룬 멋진 방송작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꿈을 이루는 것은 쉽지 않고, 그 꿈을 유지하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
몇달 쯤 지났을까. 며칠 째 계속된 야근으로 지쳐 있던 나에게 비수처럼 꽂힌 한 마디가 있었다. 전문 분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정리하여 제출했던 나에게 화를 내며, 차라리 지금 나가 책의 원서를 사오라고 지시한 총괄PD였다. 눈물을 참으며 돌아서는 뒤통수에 꽃힌 그 한 마디, 무식하면 발이라도 빨라야지_ 그리고 그 말은 한동안 내 발꿈치를 조용히 따라다녔다. 인격을 모독하는 나쁜 인간, 이라고 욕했지만 스스로를 책망하는 마음이 더 커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내 인생 첫 직장은 이력서의 한줄로 남게 되었다. 꿈에 그리던 직업을 포기하는 것은 힘든 결정이었지만, 일의 질량에 비례하지 못하는 나의 능력을 깨닫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해볼 기회가 있었고 직접 겪어 보았으니까. 어쩌면 그 결정이 속단이었을지도, 경험과 노력이 더해지면 나의 능력 역시 상승곡선을 그렸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순간의 내게는 최선의 결정이었다. 덕분에 여러 다른 길을 거쳐 지금의 내가 지닌 삶이 있지 않은가.
한창 싱그러웠던 이십대의 노동력을 팔고 내가 얻은 것, 그것은 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다.
#_ 인생 첫 해외 노동
2009년 4월, 나는 시드니 어느 '스시 가게 서버'가 되었다.
호주 생활 첫 한 달, 어학원이 끝나면 시드니 한복판을 돌아다니며 보이는 가게마다 이력서를 뿌리는 것이 내 하루의 주요 업무였다. 그리고 그 절박함이 끝에 다랐을 때, 어느 한국인 사장이 운영하는 스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내 구직 활동을 마무리 해 준 것은 수없이 반복한 Are you guys hiring?_ 끝에 나온, 여기 사람 구해요?_ 한 마디였다.
그렇게 나는 외국인 노동자가 되었다.
나의 일터는 하버 브릿지를 건너자마자 자리한 놀스 시드니의 한 고층 건물에 자리했다. 샐러리맨들을 상대로 한 푸드코트 안 스시 가게로, 오전 아홉 시부터 열한 시까지 정해진 양의 스시롤을 말고, 오후 세시까지 그날 만들어진 음식들을 팔았다. 스시 롤을 만드는 구석 자리 한 켠에는 5분 단위로 만들어야 할 롤의 종류와 양이 적힌 타임 테이블이 있었다. 자자, 서두르자고. 저 밖에는 1분에 스시 롤 두 개를 말 수 있는 중국 아줌마들이 줄을 섰다고. 그 양반들은 한 시간에 5불만 받아도 일한단 말이야_ 서버들의 손이 늑장을 부릴 때면 등 뒤에서 사장의 간담서늘한 농담이 들렸다.
나는 시드니의 이 일터가 맘에 들었다. 시급은 $10로 시작했고 3개월 마다 한번 $1씩, 최고 $14까지 올랐다. 법적 미니멈 웨이지는 시간 당 $15 가량이었지만, 한국인 사장 밑에서 미니멈 웨이지를 받는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스시 가게 사장은 훨씬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장은 그날 만들고 남은 음식을 모두 서버들의 손에 들려주었다. 그것 또한 맘에 들었다. (시드니 생활 일년 내내 먹은 스시는 내 체중을 10kg 가까이 불려 주었다.) 일이 손에 익고 난 후론 힘들단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전 9시 출근 오후 3시 퇴근은 마치 복지 좋은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 즈음엔, 로컬 가게에 취업해 호주인들과 상대하며 돈도 벌고 영어 실력도 쌓겠다던 나의 포부는 저만치 사라진지 오래였다. 한국인 룸메이트들과 한 집에 살며, 한국인 사장 밑에서 한국인 서버들과 일을 했다. 한 블록 건너마다 존재했던 한국마트 덕에 한국 음식을 해 먹는 것 또한 어렵지 않았다. 심심한 저녁에는 조금 비싼 값을 주고 한국 술집에서 소주를 마시면 그만이었다. 한국에서 내가 처한 상황을 외면하고자 도피한 이곳 시드니에서, 나는 그렇게 나만의 작은 한국을 만들어 안주하고 있었다.
외국인 노동자의 두번 째 일은 간간이 주어지는 청소 알바였다. 건너 건너 소개로 시작된 이 간헐적 알바는 고된 육체적 노동과 든든한 비위를 요구했다. 한국에서 안부를 주고 받던 한 친구는, 나이 서른의 내가 한국에서도 안하던 일을 왜 그곳에서 하고 있는가_ 라는 질문을 했다. 음, 나는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어_ 라고 대답했다. 친구는 음, 과 나는, 사이에 어색하게 자리하던 침묵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더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음 날은 경마장을 청소했다. 수트를 제대로 차려입은 남자들과 파티용 드레스에 망사로 장식된 모자까지 곁들인 여자들이 모여 들었다. 경마장이 격식을 차리고 사교 활동을 하는 곳이라는 사실에서 적잖은 문화적 충격을 경험했다. 나는 기분좋게 들떠 있는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쓰레기를 치웠다. 그때 내 옆의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젊은 신사가 웃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온 몸이 경직됨을 느꼈다. 그가 하는 말을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cume me?_ 용기내어 내 뱉은 한 마디 끝에 겨우 들린 말, I just said HOW ARE YOU?_ 그 날, 문화적 충격보다 나를 강하게 덮친 것은 내 언어 실력의 충격이었다.
한국을 벗어날 때 내가 꿈꾸었던 것은 휴식과 영어 공부였다. 한달이든 일년이든, 다시 돌아갈 한국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바쁜 일상과 재회하기 전에 누리고 싶었던 새로운 삶. 그러나 워홀 비자 1년 만기가 다 되어가도록 How are you_ 한 마디를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것이 나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시작하지 말았어야 할 도전이었을까? 이 순간 또한 내 인생의 값진 경험이 될까?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단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인생의 첫 해외 노동에서 내가 얻은 것은, 젊음의 시간을 투자하고 얻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_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