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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Jul 02. 2018

스무 살과 서른 살이 된다는 것_

시작과 도전, 같은 듯 다른 느낌

#_ 스무 살의 독립


나이의 첫머리가 1에서 2로 바뀌면서 내가 내린 중대한 결정은 독립이었다. 태어난 동네에서 초등학교 (사실은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내게는 큰 도전이었던 셈이다. 그래 봤자 한 시간 남짓 떨어진 대학교 앞에 조그마한 자취방을 얻고, 매 주일마다 본가로 돌아와 밑반찬만 잔뜩 가져가는 무늬만 독립이었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면, 나의 스무 살 독립은 엄마에게도 큰 도전이었을 것이다. 늘 걱정 많고 (취미가 걱정 하기인 나는 엄마를 닮은 것일까), 동네 밖 세상은 위험천만한 곳이라고 여기었던 우리 엄마. 대학 새내기였던 언니의 귀가 시간이 저녁 여덟 시를 넘기면 여지없이 언니의 삐삐에 (삐삐라니!) 연락번호 44444444444를 남기던 우리 엄마. 그런 엄마가 나의 독립을 허락한 것은 나의 꺾을 수 없는 고집 때문이었을까, 첫째를 키우면서 생긴 유연함 때문이었을까.


시작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었다.

입학 초기에 먼저 친해진 동기와 학교 앞 원룸을 계약했고, 아주 간단한 주방 도구와 옷 짐 정도를 옮겨둔 것이 전부였다. 강의가 끝난 후 친구들과 다니던 맛집과 술집이 내 배를 채워주었고, 그게 아니면 엄마의 밑반찬으로 대충 끼니를 해결했다. 용돈도 밑반찬도 남아나지 않았을 땐 라면 하나면 충분했다. 집에는 독립, 이라고 거창하게 선포했지만, 정작 스무 살의 내가 혼자 힘으로 한 것은 어쩌다 하는 빨래와 한 뼘짜리 자취방 바닥 쓸기 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시작이 그렇게 쉽기만 하다면 '시작'과 '도전'이라는 단어의 연관성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학과 동기였던 룸메이트와는 서로 부딪히는 일이 잦아졌고, 강의가 끝나면 으레 모여드는 친구들과 나의 게으름으로 인해 집 안은 늘 엉망이었다. 이제 어른이라며 당당하게 외치던 스무 살의 내가, 여전히 당당하게 요구하던 용돈은 단 한 번도 여유 있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사소하게 여겼던 현실적 문제들이 점점 심각하게 느껴지던 순간, 나의 독립은 새로운 시작이 아닌 도전이 되었다. 내 인생 첫 룸메이트와는 반년도 되지 못해 갈라서게 되었고, 일 년 치 월세를 선불로 내야 했던 나는 그 금액을 충당하기 위해 다른 룸메이트를 구해야만 했다. 평생을 다르게 살아온 타인과 공간을 함께 한다는 것. 너무나 단순하게 생각했던 그 시작은, 스무 살을 지나 서른이 넘을 때까지 다양한 룸메이트들을 만나면서,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수많은 도전들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쟨 왜 저래, 우린 맞지 않아_라는 생각을 떠나 아, 나는 이렇지만 쟤는 저럴 수도 있구나_라고 다름을 이해하고 있는 나 자신이었다. (물론 끝끝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안녕을 고했던 룸메이트도 존재했다.) 그리고도 오랫동안 늘어나지 않는 요리 실력 덕에 집에서 조달해 온 반찬으로 대충 연명하는 끼니는 여전했지만, 내가 사는 공간에 대한 애착과 예의를 담은 정리정돈 실력은 눈부시게 발전한 듯 싶다.


그리고 금전적인 문제. 이제 어른이라고 외치면서도 부모님께 받는 용돈을 당연하게 여기던 스무 살. 철 없어서 꿈 같았던 그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서는 무언가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그렇게 시작된 내 스무 살짜리 싱싱한 노동력은, 오늘날까지 꾸준히 그 무언가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매일매일 자본 시장에 팔려 나가고 있다. 예쁜 옷과 맛집 정도로 간단히 표현할 수 있었던 '원하는 것'이 이젠 종이 한 장을 꽉 채울 수 있을 만큼 그 종류가 무궁무진하고, 싱싱한 노동력이었던 '대가'는 더 이상 싱싱하지 못해 아침 출근 길마다 나를 힘들게 하지만 말이다.







#_ 서른 살의 독립


회사가 망했다. 아니, 서서히 망해가고 있었다. 고만고만한 건축 회사들이 줄줄이 도산하기 시작하면서, 그들로부터 외주를 받아 여러 가지 디자인 작업을 하던 우리 회사도 돈줄이 막히기 시작한 것이다. 스물아홉의 나는 그곳에서 카피라이터라는 명목으로 월급을 받고 있었다. 사장님 이마에 드리워진 암막이 온 얼굴을 뒤덮으려는 찰나 회사의 공식 입장이 나왔다. 앞으로는 제때 월급이 나온다는 보장이 없고, 떠나고 싶은 사람들은 언제든 떠나도 좋다_


그 무렵의 나는 사춘기보다 더 한 열병으로 힘들게 스물아홉을 견디고 있었다. 보잘것 없이 느껴지던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 서른 살이라는 무게는 스물아홉 나의 양쪽 뺨을 한 여름 소나기처럼 후드려 치는 중이었다. 여자, 곧 서른, 미혼, 재산 없음, 그리고 조만간 무직_ 누군가가 나를 객관적으로 설명한다면 이 정도일 것이다,라고 생각하니 내 자존감은 길가에 일렁이는 낙엽보다도 가볍게 여겨졌다.


나 보러 오는 건 어때?

시작은 그랬다. 그냥 가볍게 잠깐 왔다 가_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나의 신세 한탄을 듣다 못한 대학 동창이 말한 '잠깐 왔다' 가란 곳은 호주 시드니였다. 친구의 말인즉슨, 난파선이 되어버린 회사에 붙어 있을 바에야 하루속히 백수가 되어 시드니로 여행을 오란 말이었다. 돌아간 뒤 구직을 해도 늦지 않아. 아, 혹시 길게 있고 싶어 질지도 모르니까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해서 오는 게 좋을 거야. 너 서른 넘어가면 워홀 자격도 없다_


친구에게는 모든 것이 쉽게 느껴졌다. 역시 작은 광고 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던 그녀는 재미 삼아 참여한 공모전에서 종종 수상을 하곤 했다. 그렇게 조금씩 모이던 수상금과 함께 어느 날 훌쩍, 나랑 맞지 않는 것 같다_며 퇴사를 한 그녀는 시드니로 날아갔다. 그래, 너에게는 새로운 시작이 별 것 아니겠지. 부러움 반, 질투 반. 스물아홉의 얄팍한 자존감은 생각지 않았던 가능성을 앞에 두고 돌 맞은 연못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결정은 쉽지 않았다. 스무 살의 나와는 다르게 스물 아홉의 나에겐, 시작이란 곧 도전이요, 도전이란 내가 싸워야 할 무수한 형체의 적들을 의미했다.  

그렇게 며칠간 장단점을 저울질하던 중 월급날이 돌아왔고, 내 통장에 입금된 것은 반쪽짜리 월급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는 사직서를 썼고 오후에는 영어학원 등록원서를 썼다. 퇴사와 함께 시작된 3개월 간의 백수 시절은 빠르게 흘렀다. 영어 기초 문법을 다지기 위해 등록한 'Grammer in use, Basic' 수업은 한 번도 거르지 않았고 (영어 바보에게 주어진 최선의 선택!), 비교적 규모가 큰 유학원을 찾아다니며 호주 워홀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해외 거주 근 십 년 차인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호주 워홀 비자만큼 간단한 절차가 없지만, 영어는 그림과도 같았던 당시의 나에겐 그리 쉬이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가족, 무엇보다 엄마를 설득하는 일에 할애했다. 친구들의 자식처럼 서른이 되기 전에 착실히 돈을 모으고 시집을 갈 줄 알았던 딸이, 본인이 생각하는 정상 궤도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삶을 택하는 것이 못내 못 미더웠을 터였다. 하지만 절대 반대를 외치던 엄마도 별 수는 없었다. 결국은 원하는 대로 해버리는 둘째 딸의 고집과 함께, 이젠 스스로의 잔소리가 아주 오래전 첫째 딸 삐삐에 새기던 444444보다 약한 효력을 지녔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9년 3월 1일_

서른의 나는 10여 시간의 비행을 거쳐 시드니에 도착했다. 스무 살의 독립보다는 더 준비되었다고 여긴 서른 살의 독립. 하지만 나의 첫 해외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네 명의 룸메이트가 함께 하는 마스터 룸의 공간은 간단한 짐을 푸는 것조차 여유롭지 않았고 (세컨 룸에 두 명, 거실에 또 다른 두 명이 살고 있다는 것은 그다음 문제였다.), 방 안의 풍경은 방금 누군가가 침입해 금품을 찾아 도망간 범죄의 현장을 보는 듯 정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층 침대 한 공간은 시드니 시티 한 복판에 존재한다는 이유로 격주로 $300이라는 어마 무시한 방세를 요구했다.


그렇게 호주 생활의 시작과 동시에 새로운 도전이 펼쳐졌다. 친구의 조언과 달리, 가볍게 잠깐 왔다가 갈 마음이 없었던 내게는 일 년간 머물 수 있는 안정적인 공간 (은 이후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한 환경 (은 스스로의 의지가 만드는 것),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이뤄주기 위한 돈 (을 왜 진작 모아 오지 못했을까), 즉 일자리가 필요했다. 예쁜 옷과 맛집이 원하는 것의 대부분이었던 나의 스무 살이 그리워지던 순간. 누군가의 스무 살은 서른 살 나의 모습보다 더욱 치열했을 것이고 (철이 들었을 것이고), 지금은 나보다 더욱 그럴듯한 삶을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머나먼 타국에서 이력서를 뿌리다 지쳐 공원에 앉아있던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때 내가 생각했던 그럴듯한 삶은 무엇이었을까. 서른이라면 가졌으리라 짐작할 그럴듯한 직장, 그럴듯한 집과 차, 그럴듯한 배우자? 무엇을 꿈 꾸었는지 조차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름 준비성 있게 시작했다 여겼던 나의 서른은, 부끄럽게도 그럴듯하게 포장된 현실 도피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한국을 떠나 시드니를 찾아온 내가 서른이라는 나이의 무게마저 고스란히 짊어지고 왔다는 사실, 그리고 단기에 해결되지 않을 이 해외 생활 도전은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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