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yKwon Jan 21. 2019

차별, 어디까지 겪어봤니_

쓰면서도 화가 나는 차별의 경험 풀기

눈을 감고 상상해본다. 

세상 사람들이 전부 똑같은 외모를 갖고, 똑같은 언어를 쓰고, 똑같은 재능과 부를 지니고 있다면 어떨까_

나와 같은 얼굴의 사람들이 전 세계에 와글와글하다고 상상하니 어쩐지 소름이 돋는다(나의 얼굴과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아). 모두가 똑같은 언어를 쓴다면 적어도 외국어를 공부하느라 골머리를 앓을 필요는 없겠지. 똑같은 재능이라. 나는 제육볶음을 기가 막히게 만드는 대신 숫자에 젬병인데. 모든 식당에서는 제육볶음만 팔 테고, 은행은 내가 맡긴 돈을 다 날려먹을지도 모른다. 흠, 하지만 모두가 똑같은 부를 지닌다면 어차피 개인 재산이란 건 의미 없는 것일지도.


자, 이제 눈을 뜬다. 이건 모두 쓸데없는 상상. 현실 속 세상에는 (다행히도) 나와 완벽하게 똑같은 사람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다양한 언어를 쓰고 서로 다른 재능을 지니고 있다. 높은 건물 옆 작은 틈새가 오늘 누군가의 잠자리가 되는가 하면, 그 틈새를 만들어 준 건물 안 아늑한 공간도 누군가의 잠자리가 된다. 

퍼즐 조각 하나하나처럼 다양한 개개인이 모여 만들어 가는 세상. 서로의 다름을 존중할 때 그 다채로움은 더욱 화려해진다. 문제는 그 '다름'에 누군가가 제멋대로 등급을 매기는 순간이다. 그리고 나의 '다름'이 낮은 등급을 받는 순간, 차별은 시작된다. 

차별. 당신은 어디까지 경험해봤는가. 나의 경험은 이렇다. 




#_ 성적 차별


중학생 시절, 중간고사를 끝낸 어느 날. 담임선생은 반 아이들의 이름이 적힌 A4 용지를 칠판 한쪽에 붙였다. 

김고은, 앞으로 나와 봐. 고은이가 우리 반 일등이자 전교 일등이다. 다 같이 박수!

꼴등이 갑작스럽게 일등 하는 이변이라면 모를까, 단골 일등이 또 일등 하는 건 큰 화젯거리가 아니었기에 우린 모두 형식적인 박수를 쳤다. 사실 담임선생이 준비한 진짜 화제는 그다음이었다.

그럼 이제 고은이가 여기 붙인 종이를 보고 2등부터 순서대로 불러 봐. 자, 본인 이름을 들으면 자신의 등수를 말하고 앞자리부터 순서대로 앉는다. 오늘 바뀐 자리는 기말고사 성적 나올 때까지 유지할 거야.

성적순 자리 배치의 파급력은 엄청났다. 등수가 뒤로 갈수록 아이들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티 나지 않게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때 내 등수가 정확히 몇 번째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키 순서대로 앉아도, 이름의 가나다 순서대로 앉아도 늘 교실 앞자리를 놓치지 않았던 내가 처음으로 교탁보다는 교실 끝 사물함과 가까운 곳에 앉았다고만 말해두자. 


고등학교 3학년, 야간 자율학습 시간. 정규 수업을 마치고 나면 전교 100등(당시 3학년 수는 700명이 넘었다.) 안에 드는 아이들은 가방을 들고 학교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신축건물이었던 도서관에서는 100명의 정예 학생들을 위해 여름이면 에어컨이, 겨울이면 히터가 아낌없이 돌아갔다. 하지만 내가 나머지 600여 명과 남아있던 교실에서는 여름이면 낡은 선풍기가, 겨울이면 장작을 태우는 난로가 날씨에 버티며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나는 성적에 따른 차별 대우에 분노했지만 수능을 볼 때까지 에어컨 바람을 쐬어볼 기회를 얻진 못했다. 만약 나에게도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더욱 쾌적한 환경이 주어졌다면 어땠을까? 성적이 더 올랐을 거라고 장담은 못하겠다. 다만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등수가 낮은 학생들도 더위와 추위는 똑같이 느낀다는 사실이다.




#_ 부의 차별


캐나다 밴쿠버에 온 지 정확히 일 년째, 통장의 돈이 똑 떨어졌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300 정도가 남아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면접을 보러 다니던 시절. 코인 런드리 샵의 파트타임 만으로 정기적인 지출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고민 끝에 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해봤지만 돌아온 것은 '버틸 돈이 없으면 짐이나 싸라'는 쿨한 대답뿐. 나는 파트타임으로 일해서 받은 $400 정도의 수표를 들고 은행을 찾았다. 수표를 입금하고 다시 방세 $450을 출금하면 $250이 남는구나. 이 마저 다 쓰는 날이면 (카드로) 비행기표를 끊자.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가며 은행원을 마주했다. 

  

하이! 반가워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미소가 부드러운 은행원이 어쩐지 나에게 존댓말을 하는 느낌)

이 수표를 입금하고 $450을 출금하려고 하는데요... (고객이지만 어쩐지 죄인인 듯한 느낌)

수표를 받아 든 은행원이 모니터를 통해 내 통장 잔액을 확인하더니 나를 슬쩍 쳐다봤다. 그의 시선이 위아래로 옮겨가며 나의 행색을 체크하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너 지금 바로 돈을 출금하겠다고?? (미소가 사라진 은행원이 급 반말을 하는 느낌)

응, 수표 입금하고 나면 그만큼 돈이 될 텐데?? (기분이 나쁘니 나도 따라 반말하고 싶은 느낌)

그건 어렵겠는데. 이 수표에 적힌 금액이 네 통장에 정확히 입금될지 확신을 못하겠어. '규칙'에 따라 일단 수표 먼저 입금하고 나면 이주일 뒤부터 출금이 가능할 거야. 


생각지 못한 상황에 나는 꽤 당황했다. 나의 통장 잔고를 본 후 확 달라진 은행원의 태도가 기분 나빠도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지금이라면 매니저를 불러 컴플레인을 하겠지만 당시의 나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게다가 규칙이라고 하니 어쩌겠는가. 나는 어쩔 수 없이 수표만 입금 한 뒤 집주인에게 늦은 월세에 대한 양해를 구해야 했다. 

밴쿠버 생활 9년째. 늘 같은 은행을 이용하고 있지만 이런 불쾌한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수표를 입금할 때마다 바로 원하는 만큼의 현금을 출금할 수 있었고, 통장 잔고에 따라 고객 서비스에 차등을 두는 은행원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의 은행원이 언급한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이제는 잘 알고 있다. 

그 은행원은 지금 어디에서 일하고 있을까? 그는 여전히 통장의 숫자를 통해 제멋대로 고객을 판단하고 있을까? 수년이 지난 지금. 그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위아래로 나를 훑던 그 눈빛은 여전히 내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_ 인종 차별


벚꽃이 막 피기 시작했던 봄날, 나는 오랜만에 트레인을 타고 다운타운을 나갔다. 역 출구를 향한 긴 에스컬레이터에 올랐을 때 어느 동양인 할아버지가 왼편으로 기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에스컬레이터의 왼편에 있는 사람들은 멈춰 서 있지 않고 걸어 올라가야 하는 법이지만, 역 안에는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았다. 그때였다. 

아 뭐야, 짜증 나게. 저리 비키라고! (사실 이외에도 잡다한 욕설이 앞뒤로 붙어있었다.)

어느샌가 나타난 젊은 백인 남자 둘이 할아버지 뒤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빨리 걸어 올라가고 싶었는데 앞을 가로막고 있던 할아버지가 영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안 들려? 귀라도 먹은 거야? 저리 비키란 말이야. 아니, 아예 너네 나라로 가버리던가. 

Yeah, why are you even here? Go back to your country!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그 누구도 덩치 큰 남자들에게 쉽게 맞서지 못했다. 현장에는 적은 수의 사람들이 있었고 우린 모두 동양인이었다.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그들의 말은 한 사람만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조용히 오른편으로 움직여 백인 남자들에게 길을 터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당당하게 우리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Go back to your country' 사건은 나에게도 벌어졌다. 한국인 친구와 대화를 하며 올드타운을 걷고 있을때 뒤에서 따라 걸어오던 백인 할머니가 우리를 멈춰 세웠다. 

여긴 너네 나라가 아니야. 영어를 쓰라고. 이상한 말 쓰고 싶으면 너네 나라로 돌아가란 말이야. 

할머니의 지팡이 끝이 나를 향해 파르르 떨렸고, 나는 순간 이러다 할머니가 쓰러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많은 영국계 백인들이 초기 이민 시절부터 정착해 살고 있는 올드타운에는 고지식한 어르신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더러 존재한다는 말을 들어왔지만 내가 직접 겪게 될 줄이야. 하지만 그때도 나는 바보같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이민국가 캐나다는 다양한 문화와 인종을 존중하는 곳이다. 특히나 개인적으로는 동양인이 많이 거주하는 밴쿠버에서 인종차별이란 흔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다양성에 대해 배우고, 학교나 직장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은 매우 엄격한 처벌을 받는다. 하지만 어느 곳이나 나쁜 사람들은 있기 마련. 그나마 go back to your country라고 외치는 이들은 대놓고 나쁘기나 하지. 티 안나는 척 은근히 다른 인종을 깎아내리는 사람이나 높은 직급일수록 백인의 비율이 우세한 유리천장의 사회가 더 무서운 법이다.

 



#_ 언어 차별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고 드디어 이민 절차를 마쳤을 때, 나는 다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퇴근 후 이어지는 수업과 과제는 꽤 부담스러웠지만 커리어를 쌓기에는 좋은 출발점이 되었다. 문제는 종종 주어지는 그룹 과제였는데, 영어가 모국어인 캐네디언들과 한 그룹이 되면 나도 모르게 위축이 되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나의 부족한 영어가 그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나름 더욱 열심히 준비했지만, 그것이 언제나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네 명의 조원이 함께한 프레젠테이션. 주어진 시간은 20분. 우리는 각자 파트를 나눠 자료를 정리하고 수업 외의 시간을 할애해 다 같이 과제를 준비했다. 대부분 풀타임으로 일했기 때문에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특히 그중 한 명은 결혼식을 앞두고 있어 더욱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주어진 시간 내에 본인이 맡은 임무를 끝낼 수 없었고 종종 모임을 결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특수한 그녀의 상황을 이해한 우리는 그녀의 몪까지 나누어 대신 준비했고, 그렇게 모든 것은 순조롭게 풀리는 듯했다. 

프레젠테이션 당일. 우리는 각자 5분씩 발표를 하기로 하고 순번을 정했다. 결혼식을 앞둔 조원이 세 번째, 나는 마지막. 두 명의 정해진 발표시간이 지나고 세 번째 조원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녀는 화려한 언변술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약속했던 5분이 흐르고 내 차례가 되었지만 그녀의 발표는 끝이 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그 끝에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이는 강사가 보였다. 그렇게 20분이 지났다. 결국 내 차례는 오지 않았다.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엉거주춤 서 있다가 다 같이 인사를 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순간 누가 프레젠테이션을 어떻게 준비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날 사람들이 본 것은 열심히 준비해 성공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마친 그녀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원들에게 조용히 얹혀간 내 모습뿐이었다.  


더욱 화가 나는 일은 그 뒤에 벌어졌다. 그 수업을 이끈 강사가 나를 제외한 다른 세 명의 조원들에게 이메일 보낸 것이다. 나를 안쓰럽게 여긴 조원 하나가 내게 알려준 이메일의 내용은 이러했다.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각자가 준비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알려달라. 내가 보기에는 조원 한 명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팀 과제에 협조적이지 않은 사람은 같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_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강사의 입장에서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를 제외하고 이메일을 보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나도 한국어였다면 유창하게 풀어갈 수 있었을 텐데. 그녀의 발표가 길어졌을 때 그 자리에서 직접 상황을 설명하지 않은 내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날 밤, 나는 억울한 마음에 눈이 퉁퉁 붓도록 울다 잠이 들었다. 결국 나는 고민 끝에 이번엔 조용히 넘어가지 않고 차별에 맞서기로 했다. 강사의 눈 밖에 나면 어쩔까 싶은 불안도 있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담아 이메일을 보냈다. 

네가 다른 조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혹시 궁금할까 봐 여기 내가 준비했던 프레젠테이션 내용을 첨부한다. 내가 제일 마지막 차례였지만 시간이 부족해 발표를 할 수 없었을 뿐, 나는 성실하게 과제를 준비했다. 보다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면 당사자인 나에게 확인하는 것이 당연한다고 생각한다. 나를 제외하고 다른 조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낸 것은 부당한 일이고, 나에게 몹시 큰 상처가 되었다. 혹시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나에게 직접 물어봐 주었으면 한다_


결론을 말하자면 강사는 내게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고, 나의 항변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하지만 프레젠테이션 점수가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내 주장이 타당성 있게 들렸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 강사는 내게 사과를 할 용기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차별은 다양한 영역에서 존재한다. 주류가 아니라고 해서, 나와 다르다고 해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지는 않은가. 어쩌면 너무 당연하게 여겨서 차별인지도 모르고 벌어지는 일들도 있을 것이다. 편을 가르지 않고 등급을 매기지 않는 것. '다름'은 '틀림'과 같은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어떤 차별을 경험해 봤는가. 그 차별을 통해 어떤 상처를 받았는가. 나는 이제 다시 눈을 감고 내가 누군가에게 범했을 차별을 떠올려 본다. 내가 그들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도. 


문득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라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무릎 수난사_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