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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Dec 25. 2018

나의 무릎 수난사_

흉터는 남아도 아픔은 사라지기 마련

#_ 롤러스케이트


처음 무르팍에 훈장을 단 건 초등학교(사실은 국민학교) 6학년 때였다. 이는 세발자전거 이후 바퀴 위에 내 몸을 맡긴다는 걸 상상해 본 적 없던 내가 처음으로 롤러스케이트를 갖게 되면서 생긴 일이었다.


롤러스케이트. 일단 앞뒤로 두 개씩, 바퀴가 네 개나 된다는 사실이 퍽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허둥대면서 앞으로 고꾸라지는 게 일쑤였던 내겐 신발 코 아래 붙어있던 브레이크도 안성맞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롤러스케이트를 탐으로써 같은 반의 주류 아이들과 방과 후에도 내내 어울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키 작은 순으로는 반에서 일등을 놓쳐 본 적이 없고, 체육대회 이후 전교에서 유일하게 허들을 넘지 못한 아이로 낙인이 찍혀 버린 나. 운동 신경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나의 비루한 몸뚱어리는 신기하게도 롤러스케이트 위에서 만큼은 보이지 않던 결박이 풀린 듯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한두 명의 아이들과 함께 방과 후 동네 골목길에서 롤러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세 명, 네 명, 다섯 명, 점점 더 많은 수의 아이들로 늘어났고, 친구들은 학교가 끝날 즈음이면 자연스럽게 내 곁으로 모여들었다.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아이였다가 어느 순간 무리의 중심에 놓인 아이가 되는 기분은 참으로 짜릿했다.


우리는 비교적 안전한 학교 주변의 평지를 돌아다니다 조금씩 활동 반경을 넓히기 시작했다. 공원을 지나 전철역 입구까지 다녀오기도 하고, 굴곡진 언덕을 찾아 내려오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겁이 없어진 우리들은 다 같이 손을 잡고 경사가 심한 도로를 함께 내려가기로 했다. 아, 이건 좀 무서운데... 쿨한 초딩이 되기 위해 숨겨온 나의 소심한 마음이 옆구리를 쿡쿡 찔렀지만, 이제 와 혼자 발을 빼는 것은 참으로 쪽팔린 일이었다. 그래, 까짓 거. 후들거리는 다리를 들킬세라 나는 세차게 롤러스케이트를 밀었다. 세차게, 좀 지나치게 세차게_ 경사면을 내려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중심을 잃었고, 친구들은 잡고 있던 내 손을 잃었다. 나는 제일 먼저 왼쪽 무릎으로 땅바닥을 찍고 한 바퀴 굴렀다. 그 순간이 영화 속 슬로 모션 같은 기분이어서 맘만 먹으면 멈춰 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내 몸은 계속 전진했다. 사포로 거친 표면을 갈듯, 도로면에 무릎을 꼼꼼하게 갈아가면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무릎은 이미 피와 함께 만신창이가 되어있었고, 아이들은 겁에 질린 채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마지막이라도 쿨하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너무 아팠다. 절뚝이며 간신히 일어난 나는 대성통곡을 하며 롤러스케이트를 벗어던졌다. 그리고 나의 짧았던 인기도 끝이 났다.


참으로 서러웠다. 무릎이 욱신거려서 서러웠고, 빼앗긴 롤러스케이트 대신 돌아온 엄마의 잔소리에 서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이상 나를 불러주지 않는 친구들 때문에 서러웠다. 희미하게 사춘기가 시작되던 열세 살. 방과 후 함께 롤러스케이트를 타러 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슬픈 일이었다. 그리고 학기가 끝나갈 무렵, 내 왼쪽 무릎의 상처는 모두 가시고 희미한 흉터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슬펐던 경험은 새 학기 새 친구들과 함께, 그렇게 조금씩 잊혔다.

  



#_ 맨홀


두 번째 무르팍 훈장을 단 건 질풍노도의 서른 살을 지날 때였다. 이는 피곤에 젖은 노동자의 노련하지 못한 신체가 시드니 한복판의 맨홀을 만났을 때 생긴 일이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주중에는 초밥집 서버로 (일분에 두 개의 롤을 만드는 신공을 발휘하며), 주말에는 크리켓 경기장 청소 알바로 (강력한 비위와 함께 엄청난 수의 변기를 닦아가며) 홀리데이 없는 워킹의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영어도 배우고, 여행도 하고, 외국인 친구들은 부록으로 따라올 것이라 믿었던 워홀 생활은 어느덧 일 년 가까이 지나고 있었지만, 나의 삶은 그 믿음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일을 그만두고 여행을 하기엔 돈이 부족했고, 영어 실력을 키우고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기엔 의지가 부족했다.


그날의 아침은 조금 달랐다. 전날 저녁, 나는 같은 마음의 (한국인) 친구들과 모여, 어떻게 해야 성공적인 현지 생활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토론을 (한국 술집에서) 하며 투지를 불사른 참이었다. 그래, 오늘은 일을 마치고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자. 날씨도 좋으니 근교에 산책도 나가야지_ 기분도 바꿀 겸 옷도 단정하게 차려 입고 책과 필기도구를 담은 가방도 챙겼다. 역시 모든지 생각하기 나름이군. 매일 지나던 시드니 시티의 거리마저 새롭게 보였고,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출근길을 서두르고 있는 낯선 이들에게선 동지애마저 느껴졌다.  

그때였다. 걸음마다 느껴지던 상쾌함이 왠지 모를 불길함으로 바뀌며, 신발 코를 통해 둔탁한 무언가가 느껴진 것은. 그 무언가에 걸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하체와 달리, 관성의 법칙을 따르며 굳건히 전진하려는 나의 상체는 균형을 잃은 채 고꾸라지고 있었다. 아, 왜 이런 순간은 늘 슬로 모션 같은 느낌일까. 시선을 떨궈 내려다본 곳엔 맨홀이 있었다. 그 위로 아주 작게 튀어나온 고리에 발이 걸려 허우적대고 있었던 것이다. 중심을 잡아보려 필사적으로 움직일수록 내 몸은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듯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빠지고 있었다.

철퍼덕. 나는 그렇게 무릎을 꿇고 맨홀에 주저앉았다. 출근길 사람들 중 몇몇의 시선이 내게 닿았지만, 창피함보다 앞선 것은 엄청난 아픔이었다. 일어나고 싶어도 무릎이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그때 마침, 내 옆을 지나가던 중년 남성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제발. 제발 괜찮으니 그냥 이대로 지나쳐주길_ 나의 창피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친절함 가득한 표정으로 다가와 내 어깻죽지에 손을 넣어 어린애 다루듯 나를 벌떡 일으켜 주었다. Are you okay? Can you walk? 나는 벌게진 얼굴로 Thank you와 I'm okay만 연발하며 걱정스러운 얼굴의 그를 돌려보냈다.


사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아침부터 의도치 않은 퍼포먼스를 벌인 맨홀 위에서 그 뒤로도 삼십 분가량 미동 없이 선 채, 내 오른쪽 무릎이 고분고분 움직여주기를 기다려야 했다. 외부로 보이는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작은 고리로 인해 깊게 파인 부위가 문제인 듯싶었다. 나는 스시집에 출근을 하지 못하겠다는 전화를 하고, 오른쪽 다리를 끌다시피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욱신거리는 무릎은 계속 부어올랐고, 덕분에 그날 밤은 거의 새우다시피 하며 보내야 했다. 보험은커녕 돈도 많지 않았던 나는 병원도, 약국도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영어로 진료를 받아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도 컸던 것 같다.)

하지만 다음 날에도 일을 거를 순 없었다. 오늘의 노동이 내일 하루를 책임지는 고단한 외국 생활 중에 아프다고 해서 마냥 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무릎을 다친 주일은 바쁜 크리켓 시즌. 나는 절뚝거리는 다리를 한 채 새벽부터 넓은 경기장을 돌아다니며 청소를 했고,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잠시 앉아 쉴 여유가 찾아왔다. 그렇게 작은 창고 안에서 상자를 의자 삼아 앉으려는 순간. 생각지 못한 눈물이 핑 돌기 시작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상처는 안에서 곪고 있는 모양이었고, 오른쪽 무릎은 쉽게 구부려지지 않았다. 형편없이 부어오른 다리는 영락없이 형편없는 서른 살의 내 모습과도 같았다. 무릎이 쿡쿡 쑤실 때마다 가슴 언저리도 따라 쿡쿡 쑤셨다.

참으로 서러웠다. 끊임없는 야근 끝에 무직으로 끝을 맺었던 이십 대의 끝자락이 서러웠고, 모두가 자리 잡을 시기인 서른의 시작에 이렇게 아픈 무릎을 부여잡고 창고에 앉아 있는 것도 서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펑펑 울며 누군가에게 안길 수도, 남 탓을 할 수도 없는 어른이라는 것이 서럽게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 나의 모습이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에 따른 결과물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처음 겪어보는 외국 생활 속에서 찾아온 서른의 사춘기. 한없이 작고 보잘것없이 느껴지던 내 모습과 마주하는 것은 무릎의 상처만큼 쓰린 경험이었다.


오른쪽 무릎의 상처는 이후로도 한 달은 넘게 방치되었다가 어느 순간 제풀에 지쳐 아물어 버렸다. 그리고 손톱만 한 흉터가 그 자리에 대신 남겨졌을 때, 나는 다시 캐나다행을 준비했다. 잊을만할 때쯤이면 한 번씩 찾아오는 외국 생활의 아픔과 서러움.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상처는 아물기 마련이다.




#_ 자전거


나의 오랜 소망 중 하나는 자전거 여행이었다. 말 그대로 dream of dreams. 왜냐하면 나는 자전거를 탈 줄 모르니까. 어린 시절, 두 발 자전거를 가르쳐주던 아빠는 끝내 백기를 들며 내게 말했다. 그래, 자전거 못 탄다고 죽냐. 안 타면 그만이지_ 그리하여 서른이 넘을 때까지, 나는 자전거는 쳐다도 보지 않는 고고한 인생을 살았더랬다.


2012년 초여름. 눈부신 햇살과 싱그러운 녹색으로 밴쿠버의 미모가 한창 물이 올랐던 시기. 이른 아침 출근길에도 사람들의 표정에는 생기가 돌았고, 볕이 드는 자리마다 벌러덩 누워 있는 이들을 흔하게 볼 수 있던 때였다. 밴쿠버의 긴긴 우기를 보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햇빛이 쨍한 여름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나와 룸메이트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틈만 나면 동네 공원에 자리를 깔고 앉아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며 햇빛을 쬐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광욕과 낮잠에 지친 (백수) 룸메가 말했다. 우리 다 같이 자전거 타고 다운타운 한 바퀴 도는 건 어때? 그리고 맥주도 한 잔 들이키자!! '맥주도 한 잔'에 포커스를 맞춘 아이들에 떠밀려 폭풍처럼 집을 나오면서 나는 사실 자전거를 탈 줄 몰라,라고 말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우리가 도착한 곳은 Stanley park. 다운타운 중심에 위치한 그 공원을 한 바퀴 돌려면 총길이가 9km. 나는 겁도 없이 룸메이트들과 자전거를 빌려 구석에서 조용히 연습을 시작했다. 어라? 나이를 먹으면서 나도 모르는 능력이 생긴 것일까? 바퀴가 조금 휘청이긴 했지만, 자전거는 생각보다 잘 굴러갔다. 내 모습을 애처롭게 쳐다보던 룸메이트들 중 하나가 내 호위를 자처하면서 (너의 희생에 눈물이 앞을 가려...) 우리는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비록 거북이도 그보단 빠를 속도였지만, 내 자전거는 꾸준히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자전거 도로는 아름다운 경치를 뽐내는 물가를 따라 널찍하게 뻗어 있었고, 나는 따뜻한 햇살과 함께 스치는 시원한 바람을 즐길 정도의 여유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자전거 별 거 아니었네. 코웃음이 절로 난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건 아주 잠깐. On your left! On your right! 나의 느린 속도를 참지 못한 바이커들이 연달아 내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넓었던 도로마저 자전거 한 두대만 지날 수 있을 정도로 좁아지면서 나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멈추고 싶었지만, 원점으로 돌아가려면 오직 전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ON YOUR LEFT!! 엄청난 속도로 아슬아슬 지나가는 자전거를 피하려던 찰나, 나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여지없이 영화 속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그리고 처참하게 내 몸이 길바닥에 나뒹구는 사이 on your left를 외치던 자전거 사나이만이 총알처럼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뒤에서 따라오던 룸메이트가 나를 일으켜주었을 땐 이미 내 오른쪽 무릎은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 시드니의 맨홀이 남긴 흉터를 덮어주었으면 좋으련만. 상처는 새로 새긴 타투처럼 맨홀의 흉터 아래 떡 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자전거도 내팽개치고 철퍼덕 주저앉아 울고 싶은 아픔이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룸메이트와 나는 절뚝거리는 다리로 자전거를 끌며 남은 길을 걸어서 돌아와야 했다. 한참을 걸려 돌아온 출발 지점에서 우리는 자전거를 반납하고 나머지 룸메이트들과 조우했다. 그리고 내 무릎을 보고 걱정해 주던 아이들은 금세 술 마시면 아픔이 다 가실 거야, 라며 나를 다운타운 펍으로 안내했다.   


사실 그날 내가 놓치고 싶지 않았던 건 자전거 타기가 아닌 룸메이트들과의 시간이었다. 캐나다에 온 지 2년의 시간이 흐른 때였지만, 여전히 내게 영어는 어려웠고 그들의 문화는 낯설었다. 유일하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동양인이었던 나는 (동양인이 훨씬 많은 밴쿠버임에도 불구하고) 늘 룸메이트들과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유리벽을 느꼈고, 조금이라도 더 그들과 융화되고 싶었다. 그 이후로도 우리는 4년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 살다가 집주인의 가족들이 이사 오는 바람에 결국 뿔뿔이 흩어졌더랬다. 비록 헤어지는 날까지 그 유리벽을 완벽하게 깨지는 못했어도 우리는 많은 추억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친구들이 되었다. 내 인생의 유일무이한 자전거 타기 경험. 그날의 상처는 내 오른쪽 무릎에 또 하나의 흉터를 안겨주었지만, 이는 아픔과 서러움보다는 즐거움과 웃음으로 더 기억된다. 


앞으로는 자빠짐 없는 삶만이 내 앞에 펼쳐지기를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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