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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Feb 18. 2019

생애 첫 내 집 마련_

우리 집의 주인이 되기 위한 험난한 과정

#_ 1987년, 한국


내가 기억하는 우리 가족의 첫 보금자리는 큰 단층 주택의 끝자락에 놓인 작은 공간이었다. 대문을 열고 주인집을 지나 오른편으로 돌면 작은 쪽문이 있었고, 그 너머에는 방 한 칸과 부엌이 딸린 작지만 소중한 우리 집이 있었다. 엄마의 고된 시집살이로 시작된 신접살림과 언니가 태어난 이후의 첫 분가 생활을 포함하면 세 번째 우리 집이 되겠다. 아기였던 언니의 시도 때도 없는 울음은 고3이었던 집주인 딸의 공부를 방해했고, 결국 우리 가족이 쫓기듯 이사 온 곳이 그 공간이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났다. 새 집주인 부부에게 나의 울음은 시끄러운 소음보다는 생활의 활력에 가까웠다. 엄마는 소일거리 하듯 노부부의 밭일을 자청해서 도왔고, 그들은 맛있는 것이 생기면 늘 언니와 나를 챙겨주었다. 토끼 같은 자식 둘에 여전히 단칸방 월세 살이었지만, 나의 부모는 적어도 집 없는 설움을 몸으로 느끼지 않는 것에 감사했다.


그 평화로운 집을 뒤로하고 우리 가족은 이삿짐을 꾸렸다. 익숙한 장소를 떠나는 것과 정신없는 이사의 과정 자체는 일곱 살 내게도 꽤나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그렇게 이사한 우리 가족의 새 보금자리는 조금 더 번화가에 위치한 작은 맨션이었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그날 아빠의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이해하지 못했던 까닭은 그가 강조한 '우리 집'의 진짜 뜻에 있었다. 내가 알던 '우리 집'은 사실 집주인의 집이었고, 그 작은 맨션에 있던 '우리 집'이야말로 엄마 아빠가 주인인 집이라는 숨은 뜻 말이다. 젊은 부부의 생애 첫 내 집 마련의 순간. 낯선 공간이 어색했던 우리 자매와는 다른 이유로, 그날 밤 나의 부모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나다 세 개 동으로 이루어진 5층짜리 맨션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우리 집. 엄마는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계단을 오를 때마다 우리 집이 그나마 꼭대기 층이 아닌 4층이라 다행이라 말했고, 나는 우리 집이 놀이터 바로 옆에 놓인 가동이라 다행이라 응답했다. 베란다에는 엄마가 좋아하는 화분들이, 거실에는 아빠가 좋아하는 책들이 가득했던 공간. 80년대 후반의 시선에도 결코 화려하지 않았던 그 맨션에서 나의 부모는 참으로 행복해 보였다.


그 맨션의 초입에는 작은 복덕방이 있었다. 주인집을 지나 오른편으로 돌면 보였던 예전 우리 집처럼, 그 복덕방을 끼고돌아야 맨션 가동이 보였다. 놀이터에서 한창 신이 난 아이들을 향해 종종 시끄럽다며 소리를 지르던 복덕방 아주머니는 신기하게도 동네 사람들에게 제법 인기가 많아 보였다. 그리고 어느 날부턴가 엄마도 방앗간 들리는 참새처럼 복덕방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한창 티브이 속 만화에 빠져 있던 주말 오전. 인기 많은 복덕방 아주머니가 젊은 커플을 대동하고 우리 집에 나타났다. 함박웃음으로 그들을 맞이한 엄마는 비어있던 방 한 칸을 조심스레 보여주었다. 그것은 조금이라도 생활비를 아껴보려던 엄마의 계획이었다. 맞벌이 부부였던 젊은 커플은 이사를 온 뒤에도 집에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았고, 주말마다 본가로 돌아가 월요일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이토록 좋은 세입자를 만날 수 있었던 건 다 복덕방 아주머니와의 친분 덕이라는 엄마의 레퍼토리는 그 부부가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찾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우리가 다시 작은 주택으로 이사를 가기까지, 맨션 가동 4층은 온전히 우리 가족의 것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맞벌이 부부가 떠난 방에는 젊은 총각이 들어왔고, 그가 떠난 뒤에는 어느 아가씨가 머물기도 했다. 그렇게 누군가가 들고 나는 자리 뒤에는 늘 분주한 복덕방 아주머니가 있었다.


어린 시절 겪은 몇 번의 이사 경험 중 나의 고민은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어야 한다는 것이 전부였다. 복덕방 아주머니는 왜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우리 집을 찾아왔는지, 집값이 얼마이고 복비는 얼마인지 따위는 당연히 알리가 없었다. 필요한 만큼의 대출을 받을 수 있을지 걱정하다가 매달 갚아나갈 대출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변하기까지, 나의 부모가 겪은 모든 과정을 이해하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생애 첫 내 집에서의 첫날밤. 그 설렘과 책임감으로 잠 못 이루던 그때의 엄마 아빠는 물 위의 오리와 같았다. 일곱 살짜리 눈에 보였던 평화로운 가족의 풍경 너머, 그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수면 아래로 쉴 새 없이 물갈퀴를 움직였을 그들의 모습이 이제야 조금씩 눈 앞에 그려진다.




#_ 2017년, 밴쿠버


나와 결혼해줄래? 남자 친구가 프러포즈를 했다. 응. 나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도 나도 간소한 결혼식을 원했기에 긴 준비기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해 여름으로 예정되어 있던 한국 가족들의 캐나다 방문 시기에 맞춰 식을 올리기로 했다. 가만. 그럼 우리 부모님은 어디서 지내지? 한 달 가까이 호텔 생활을 한다는 건 비용이 터무니없이 비쌌고, 한창 성수기에 단기 렌트를 구하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우리 집을 둘러보았다. 방 두 개에 거실 겸 주방, 그리고 화장실. 하우스 1층의 절반과 2층 전체를 쓰고 있는 집주인이 세를 놓기 위해 별도의 출입문을 내어 마련한 공간이었다. 크기는 작았지만 우리가 생활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두 명 이상의 사람들이 함께 지내기엔 역시 무리였다.

언제까지 이 집에서 지낼 수 있을까? 렌트비도 계속 오르는데. 결혼을 결심하자 월급을 월세로 탕진하는 현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우리 집이 순식간에 부모님도 모시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공간으로 전락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나는 남자 친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우리 모은 돈 합하면 얼마나 될까? 뜬금없는 질문에 눈만 끔뻑이는 그를 향해 나는 쐐기를 박았다.


우리 내일 은행 가서 대출금 얼마나 나오는지 알아보자.


결혼식 4개월 전, 우리는 그렇게 생애 첫 내 집 마련을 위해 부동산 시장에 뛰어들었다. 목표는 결혼 전 이사를 마치고 여행 온 부모님이 신혼집에서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은 부동산 계약에 대한 지식도, 금전적인 여유도 없었던 우리 커플에게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오를 만큼 오른 막바지 부동산 열기에 올라타는 중이었다. 그래도 일단 발품을 팔기로 했다. 예산에 맞으면서 (싸면서) 문제가 없는 (싸 보이지 않는) 집을 구하기 위해.



Stage 1.

우선 서로의 재정 상황을 낱낱이 공개하고 계약금(down payment)으로 쓸 수 있는 돈을 최대한 끌어모았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는 겸손한 숫자의 연봉을 드러내며 그보다 더 겸손한 자세로 모기지 중개인과 마주 앉았다. 그녀는 미리 전달받은 서류를 검토하고는 생각보다 시원스럽게 우리가 필요했던 금액만큼 대출금 사전 승인(mortgage pre approval)을 해주었다.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집값에 비해 (그때만 해도) 대출을 받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았고, 이율도 적당한 편이었다. 우리는 생애 첫 내 집 마련(first time home buyer)의 세금 혜택을 받기 위해 50만 불 미만의 집을 구입하기로 했다(어차피 그 이상의 능력도 없었다).   

** 잠깐 설명하자면,

- 영주권을 받은 지 5년 이내에 집을 구입할 시 연봉과 상관없이 최대 65%까지 모기지를 빌릴 수 있다.
- 계약금(down payment)을 집값의 20% 미만으로 지불하고 모기지를 빌릴 시 모기지 보험에 의무적으로 계약해야 한다.  


Stage 2.

우리의 빠듯한 예산은 지역 선정 문제를 간단히 해결해 주었다. 먼 교외로 빠지는 것은 불가능하니 근교 도시 중 상대적으로 저렴한 지역을 택하는 수밖에. 원하는 크기는 2 bed 2 bath. 하우스나 타운 하우스는 예산의 두배가 기본이니 쳐다볼 필요도 없다. 우리는 조금 오래된 고층 콘도와 최근 지어진 저층 콘도의 선택지에서 후자를 택했다.


Stage 3.

한창 뜨거웠던 당시 부동산 시장에는 콘도 구매를 원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이미 너무 올라버린 하우스를 사지 못하는 사람들과 콘도 값마저 더 오르기 전에 사려는 사람들이 몰린 탓이었다. 우리는 이제 막 리얼터가 된 친구와 함께 주말마다 다섯 군데 이상의 오픈하우스를 찾아다녔다. 마음에 드는 집은 너무 비쌌고, 예산이 맞으면 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잠깐 설명하자면,

보통의 부동산 거래는 buyer와 seller 각각의 realtor를 통해 이루어지며, seller는 거래 성사 시 양쪽 realtor에게 정해진 중개 수수료를 지불한다.


그렇게 발품 팔기를 몇 주 째. 내 집 마련의 꿈이 저물어 갈 때쯤, 우리는 상대적으로 낮은 판매가를 제시하는 마음에 쏙 드는 집을 발견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높은 경쟁률을 감안해 제시된 판매가보다 조금 높은 금액으로 오퍼를 넣었다. 집 상태를 점검해서 문제가 있는 경우나, 대출금 최종 승인이 나지 않을 경우 계약을 파기하는 식의 조건을 넣는 것 자체도 불가능한 경쟁이었다.

짧은 시간 뒤에 우리는 리얼터의 연락을 받았다. Seller 측은 좀 더 높은 오퍼를 제시할 생각이 없는지 묻고 있었다. (그 의미는 우리의 오퍼가 top 3 안에 속한다고 봐야 했다.) 그보다 높은 금액은 우리에게 무리였지만 바로 no를 외치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집값이 오르는 속도만큼 우리의 연봉이 따라 오르는 기적은 절대 일어날 리 없으니까. 달리 방법이 없었던 우리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seller 측에 편지를 썼다.


우리는 곧 결혼을 앞둔 커플입니다. 이 집을 보게 된 순간 우리의 새로운 시작을 함께 할 완벽한 장소라고 생각했어요. 기회가 된다면 미래에 생길 아이와 함께 이 곳에서 행복한 가족을 이루고 싶어요.


Stage 4.

우리의 오퍼가 받아들여졌다. 사실은 우리가 제안한 금액이 가장 높은 금액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다른 경쟁자들이 어떤 금액의 오퍼를 넣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그때 우리가 진심을 다해 썼던 편지가 조금은 seller의 마음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하고 싶다. 우리는 다음 날 바로 약속된 계약금을 전송했고, 얼마 뒤에 변호사를 만나 최종 계약서와 관련 서류들에 사인을 했다.



결혼식 2개월 전. 우리는 드디어 '우리 집'으로 이사를 했다. 설렘과 피곤함으로 쉽게 잠들지 못했던 그날 밤, 나는 오래전 나의 부모를 떠올렸다. 힘들게 마련한 생애 첫 내 집. 이제 우리도 물 위의 오리가 되었다. 이 터전을 지키기 위해, 언젠가 태어날 아이를 위해 우리도 수면 아래로 쉴 새 없이 물갈퀴를 움직여야 할 것이다. 은행과 함께 소유한 이 집이 온전히 우리 집이 되는 그날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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