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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Mar 25. 2019

언니의 집밥

돼지고기 넣고 김치 숭숭 썰어서 간단하게 먹자.

날씨 좋은 주말. 이리저리 볼일을 보러 다니다 마지막으로 발길 닿는 곳은 언니네 집이다. 커피 한잔 마시면서 함께 산책이나 할까 했는데, 언니는 기어코 돼지고기와 김치를 꺼내 든다. 만삭 임산부에게 밥 얻어먹는 염치없는 꼴이라니. 집밥을 준비하는 언니의 분주한 손길 옆으로 간단하지 않을 설거지가 쌓여간다.

어쩌다 우리가 집밥을 나눠 먹을 만큼 가까워졌을까.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그다지 사교성이 없던 나와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언니는 기억나지 않는 '언젠가'부터 밥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간단하게 만둣국 끓여줄게.

캐나다에서 처음 맞은 설날. 나를 집으로 초대한 언니는 만둣국에 골뱅이무침을 만들었다. 한국에서 공수한 멸치와 다시마로 육수를 내고 한인타운의 유명 맛집 출신 만두들을 첨벙첨벙 빠뜨렸다.

너 매운 거 좋아하니? 이거 한국에서 가져온 거라 꽤 매운데. 

유독 빨간 고춧가루를 집어 드는 손끝이 언니의 늘씬한 키에 어울리게 쭉 뻗어 있었다.

난 웬만하면 다 집에서 해 먹어. 생각보다 간단해. 자주 해줄게.

그날 언니는 내가 매운 소면을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됐고, 나는 '간단하게'가 언니의 입버릇임을 알게 됐다. 룸메이트와 함께 지내던 언니의 조그마한 주방. 그날의 정갈했던 밥상 위로 우리는 만학도의 해외생활 고충을 고봉밥처럼 수북이 쌓아 올렸다.



그놈의 영주권이 뭐라고. 이젠 때려치우는 것도 맘대로 못하네.

한참 회사 욕을 하던 나는 언니가 만들어준 고추장 불고기를 뜨끈한 흰쌀밥과 함께 욱여넣었다. 오래된 호텔을 개조해 만든 콘도. 그 높은 층 어딘가에 자리했던 아담한 스튜디오는 처음으로 생긴 언니만의 오롯한 공간이었다. 현관문 옆으로 좁고 길게 난 주방에는 낯설지 않은 언니의 주방도구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언니는 나에게 집밥을 해주려고 지난밤 이곳에서 '간단히' 불고기를 재워두었을 터였다. 예의 빨갛던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가면서.

영주권만 해결되면 더 바랄 게 없는데. 

너 그거 알아? 우리 이년 전만 해도 취업만 해결되면 더 바랄 게 없다고 했던 거. 

그러게. 욕심이란 게 끝이 없네. 영주권이 해결되고 나면 우리가 또 뭘 바라고 있을까?  

밥상을 물린 언니가 옷장 한켠에서 와인잔을 꺼내왔다. 살림꾼 언니의 주방 살림은 옷장의 공간까지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우리는 널찍한 창문을 마주하고 나란히 앉았다. 그 너머에는 놀스 밴쿠버의 산과 다리가 파노라마처럼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말이야. 그렇게 혼자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이젠 주방이 더 큰 곳에서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

언니의 말에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치,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네. 창밖의 좋은 풍경을 두고 와인잔 넣을 작은 공간을 탐하다니. 나는 언니의 집이 참 좋았다. 언니의 밥도 좋았고.



지금 어디야? 비 오니까 순대국밥 먹고 싶다.

퇴근길 버스 안에서 언니의 전화를 받은 나는 바로 순대국밥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밥은 아니었지만 집밥만큼 자주 생각나는 그 맛. 물리도록 비가 내리는 밴쿠버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은 순대국밥이었다.

이거 먹고 나면 당분간 남자 친구 못 만나겠네.

괜찮아. 지금 내겐 남자 친구보다 순대국밥이 더 소중해.

그날 순대국밥 너머로 오고 간 우리의 주제는 '냄새에 민감한 남자 친구'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영주권을 따고. 가지고 있던 걱정 리스트를 해결하면 금세 또 다른 걱정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끼니를 함께할수록 우리가 공유하는 걱정과 비밀도 함께 늘어갔다. 아무도 없던 낯선 곳. 사람들을 만나기도 떠나보내기도 하면서 어느새 더 이상 낯설지 않은 곳이 되어버린 이곳. 보글보글 끓어오른 순대국밥은 한국보다 더 한국처럼 느껴졌다.

아, 맛있다. 오늘 순대국밥 생각이 어찌나 간절하던지. 네가 전화받고 바로 와서 다행이야.

다음엔 집에서 간단하게 해 먹자. 골뱅이무침 해줄게. 소면 잔뜩 넣고 맵게.

언니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막창 순대 위로 새우젓 하나를 올리며 말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는 얼굴이 테이블 너머에서 웃고 있었다.  

언니. 앞으로도 비 올 때마다 나랑 순대국밥 먹어줘.

그럼. 순대국밥은 먹어도 먹어도 안 물려.

나도 그랬다.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해도, 같은 음식을 먹고 또 먹어도, 그 시간들이 물리지 않았다.




오늘의 간단한 메뉴는 김치볶음밥이다. 여전히 한국에서 공수한 양념이 배인 김치는 날 것으로 먹어도 사각사각 맛이 난다. 언니의 주방은 이제 와인잔을 넣을 수 있고 김치냉장고도 들어갈 만큼 넉넉하다.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들이 뛰어다니는 사이로 배가 잔뜩 부른 임산부가 집밥을 만드는 공간.  

이제 얼굴이 좀 피었네. 그동안 고생했어.

그러게. 이제 마음이 참 편해. 올해는 좋은 일만 생길 거 같아.

내겐 조그마한 사업을 한답시고 힘들었던 시간이 있었다. 나쁜 사람은 없는데 나쁜 상황이 자꾸 생겼다. 오해와 이해가 얽혀 틀어진 인간관계로 상처를 받았을 때,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아졌을 때, 함께 집밥을 먹으며 내 이야기를 들어준 것도 언니였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들고 나는 인연들. 그 속에서도 언니는 늘 제자리에 있었다.

밥 남았으니까 싸줄게. 집에 가서 생각날 때 덥혀서 먹어.

언니는 한국 음식을 자주 먹지 않는 나를 위해 남은 밥을 병에 꼭꼭 눌러 담아준다. 그 위에 흰쌀밥을 다시 얹고 사각사각 김치도 썰어 넣으면서. 혹시라도 냄새가 새어 나올까 비닐로 꽁꽁 싸는 것도 잊지 않는다.

언니, 요즘 뭐 땡기는 거 없어? 내가 먹을 거 좀 해다 줄까?

어후 야, 네가 해주는 음식 맛없어. 난 내가 만든 음식이 젤 맛있다.

그치. 내가 만든 음식이 꽤 맛이 없지.

언니의 현실적인 대답에 나는 딱히 부정하지 않는다. 오늘의 집밥과 우리의 싱거운 대화도 언젠가의 기억으로 남겠지. 그때도 우리는 여전히 함께 밥을 먹는 사이일 테고. 그것이 어느 장소일지, 어떤 음식일지, 무슨 고민거리를 함께 나눌지는 몰라도 밥상 너머의 익숙한 언니의 얼굴은 변함없을 것이다. 나는 염치없지만, 말한다.

언니. 앞으로도 계속 집밥 해줘_





*표지 사진 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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