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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추석 전날. 엄마는 차례상을 준비하다 진통을 느꼈다. 두서너 달에 한번 꼴로 찾아오는 제사에 진저리가 난 장손 며느리는 하필이면 추석 밑에 태어난 딸이 참 가여웠다. 평생 명절에 묻힐 생일이라니. 다른 식구들과 달리 내가 양력 생일을 챙기게 된 것은 그런 연유였다.
휴가요? 어디 가세요?
친구 부모님 댁이요. 추석 음식 많이 해 두신다고 놀러 오라 하셔서요.
벌써 추석이라고요? '여름 추석'이란 글을 인터넷에서 보긴 했지만 정확한 날짜를 알게 된 것은 한국인 직장 동료를 통해서였다. 지난 십 년 간의 해외 생활. 구정이나 추석 같은 명절은 낯설어진지 오래였다. 좀처럼 집에서 요리를 하지 않는다는 동료는 오랜만에 먹을 손맛 가득한 한국식 집밥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휴가까지 맞춰 즐기는 추석이라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일이 추석인지 조차 몰랐으면서 나는 갑자기 그녀가 부러워졌다. 지금쯤이면 우리 엄마도 한창 이런저런 음식을 만들고 있겠지. 나는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조물조물 만들던 송편이 생각났다. 한 입 베어 물면 달짝하게 새어 나오던 참깨의 맛과 콩 송편을 골라 슬그머니 언니의 접시에 올려놓던 기억까지. 까맣게 잊고 있던 추석날 우리 집의 풍경이 하나씩 떠오르면서 퇴근 후 가족들에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이 추석이래요.
스시집 주인이 말을 걸었다. 집에서 겨우 두 블록 떨어진 거리이기도 하고, 메뉴에는 간단한 한국 음식들도 있어 종종 들르는 곳이었다. 오늘처럼 요리하기 귀찮은 저녁이면 생각나는 골목 귀퉁이의 작은 가게.
그러게요. 전 모르고 지나칠 뻔했어요.
오늘은 한국에 계신 부모님 생각이 나서 마음이 참 안 좋네요. 휴가도 없이 먹고 산다고 매일 가게에만 매달려서 한국에 언제 가봤는지 기억도 잘 안 나요. 이런 명절에도 한 번 찾아뵙질 못하니... 가족분들이 캐나다에 계세요?
아... 아니요.
그의 말이 가시바늘처럼 날아와 가슴에 콕콕 박혔다. 나는 어저께 한국 집에 전화하려던 것도 깜빡한 터였다. 오늘 아침에서야 깨달았지만 이미 한국 시각은 한밤 중이었다.
외국에 살면서 철없을 때보다 더 불효자가 되는 것 같네요.
스시집 주인은 서글픈 표정을 끝으로 등을 돌렸다. 기름통에는 새우튀김이, 도마 위에는 스시롤이 추석 음식 대신 그에게 놓여졌다. 지금쯤 그의 부모님도 멀리 있는 아들을 생각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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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에 넣은 손 끝으로 휴대전화의 진동이 느껴졌다. 화면 위로 '엄마'라는 두 글자가 보였다.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니?
엄마는 늘 내 밥이 걱정이다. 전화의 용건이 무엇이든, 추석이든 설이든, 혹은 그 어떤 날이든.
여기는 오늘이 추석이야.
그러니까 엄마. 내가 먼저 전화한다는 걸 깜빡했네.
괜찮아. 어제 간소하게 음식해서 아빠랑 오늘 차례상도 차렸어.
손이 큰 엄마를 닮아 결코 간소하지 않았을 차례상이 눈 앞에 펼쳐졌다. 엄마가 소고기 뭇국을 끓이면서 전을 부치고 생선과 고기를 준비하는 동안, 아빠는 대추를 깎고 문지방에 한자를 적어 놓았을 것이다. 언니와 내가 없는 추석. 적어도 송편은 더 이상 집에서 만들지 않아도 되었다.
음력으로 치면 어제가 네 생일이잖아. 이번 추석은 네가 유독 보고 싶은 거 있지.
엄마의 고요한 목소리 너머로 문득 새우를 튀기던 스시집 주인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외국에 살면서 철없을 때보다 더 불효자가 되는 것 같네요. 그가 말한 것이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일까.
엄마. 나도 엄마가 참 보고 싶네. 내년에는 추석에 맞춰서 한국에 갈까?
그럴 수 있으면 좋지. 너 오면 집에서 같이 참깨 넣고 송편 해 먹자.
전화기 너머 엄마가 해맑게 웃었다. 추석 밑에 태어난 자식이 평생 생일밥 한 번 못 얻어먹을까 걱정하던 엄마의 마음속에서 나는 매 해 두 살씩 나이를 먹는다. 추석 전날 음력 생일에 한 번, 그리고 양력 생일에 한 번. 지구 반대편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내가 모르고 지나치는 그 순간에도, 엄마는 늘 내 생각을 한다.
내년 추석은 잊지 말아야지.
잊지 말고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줘야지.
2019년의 추석. 이곳 밴쿠버에서는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보통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 Image by youngku lee from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