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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Oct 27. 2019

이만 원의 추억


#_


그와 함께 삼청동 거리를 걷는 중이었다. 돌담을 마주하고 나란히 앉은 젊은 남녀가 눈에 띄었다. 한 손에 들린 스케치북과 바닥에 놓인 수채화 물감이 보인 건 그다음이었다.


We won’t draw you ugly.


스케치북 뒷장에 쓰인 글귀를 읽고 예쁜 초상화들을 구경하던 그가 두 사람에게 물었다.


이거 얼마예요?

두 분이면 이만 원이요. 예쁘게 그려드릴게요.


전날 배운 한국어를 처음 써본 그가 상대방의 대답까지 헤아릴 리 없었다. 생각보다 비싼데? 그냥 가고 싶은 나를 본 듯 만 듯 그는 어느새 돌담 아래 자리를 잡고 있었다. 툭툭. 그의 손이 바로 옆 빈 공간을 토닥였다. 뭐해. 어서 앉아, 라는 듯이.


여자가 연필을 꺼내 밑그림을 그리는 동안 남자는 서글서글한 말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넸다. 어디서 오셨어요. 한국 여행은 재밌나요. 저 귀퉁이 돌면 맛있는 수제 맥주집이 있어요. 이따가 한번 들러보세요. 남자와 소소한 대화를 나누면서 금세 몸이 노곤해졌다. 따뜻한 햇빛 덕분인지 등 뒤를 덮은 돌담 덕분인지, 날카롭게 곤두섰던 마음의 가닥들도 느슨하게 경계를 풀었다. 나는 가만히 그의 손을 찾아 쥐었다.




한국 여행 둘째 날. 전날 저녁에 도착한 우리는 시차를 적응할 새도 없이 무작정 밖으로 나왔더랬다. 어디를 갈까. 아내의 나라를 처음 방문한 그에게 무엇이든 보여줘야 한다는 사명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핫한 장소를 찾아 캐나다 촌놈을 놀라게 해 볼까. 서대문형무소를 가서 한국의 아픈 역사를 보여줄까. 한참 고민한 끝에 우리는 북촌 한옥마을로 방향을 정했다. 가볍게 걷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저 혹시, 죄송하지만...


목적지를 코 앞에 두고도 헤매던 나는 행인에게 길을 물을 요량이었다. 여기 한옥마을이 어디... 단정한 정장 차림을 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걸음을 멈춘 그녀는 나와 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꿀꺽. 대답 대신 손에 들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켜는가 싶더니 그대로 우리를 지나쳐 버렸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차가운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 무안해진 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풀리지 않은 여독도 함께 올랐다. 뭐지? 몰라요, 한 마디가 어렵나? 내가 그렇게 걸리적거렸나? 별 것 아닌 짧은 순간에 마음이 상했다. 마치 아무나 붙잡고 도를 믿으십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된 심정이었다.


그런 사람도 있는 거지, 뭐. 괜찮아.


한옥마을에 들어선 뒤에도 마음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예쁜 풍경을 보면서도 되새김질하듯 아메리카노 여자의 차가운 눈길을 떠올렸다. 그런 사람도 있는 거지. 소심한 나와 달리 그는 별 것 아닌 순간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낯선 이곳이 재밌고 신기할 뿐이었다. 괜찮아. 함께 마음 상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길을 묻지 않고 보이는 골목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어느새 삼청동이었다.




#_


밑그림이 완성되고 여자가 수채화 물감을 꺼내는 사이 또 다른 커플이 우리 옆에 앉았다. 이번엔 남자가 스케치북을 열고 연필을 잡았다. 뒷면에 적힌 We won't draw you ugly라는 글귀가 가려졌지만 어차피 상관없었다. 이제 지나가는 사람들은 여자의 그림과 우리의 실물을 함께 볼 수 있을테니.


저 두 사람, 정말 최고의 데이트 아니야? 이 돌담 아래 나란히 앉아 함께 그림을 그린다는 게 말이야.


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만 보니 연필을 잡은 남자와 붓을 잡은 여자의 손가락에는 같은 모양의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하나의 물통과 필통을 나눠 쓰는 다정한 두 사람. 바지런히 움직이는 남자의 오른손 아래로도 옆 커플의 밑그림이 완성되고 있었다. 슬쩍 눈이 마주친 그림의 주인공들과 나는 서로에게 수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길에서 보았던 여자의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차가웠던 눈길은 더 이상 떠올리지 않았다. 세상엔 그런 사람도 있는 법이다.


와, 이 그림 정말 마음에 들어! 가장 값진 이만 원이야!


초상화를 받아 든 그가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나도 초상화를 보고 또 들여다봤다. 이제 귀퉁이를 돌면 보인다던 수제 맥주집을 들를 일만 남았다. 우리는 다시 손을 맞잡고 돌담길을 걸었다. 



이만 원으로 오늘의 추억을 샀다.


This is the best date ever!



이만 원으로 젊고 예뻐진 우리




** Cover Photo by Rachel Walk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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