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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밤에 내린 눈을 시작으로 수요일인 오늘 급기야 휴교령이 떨어졌다. 라디오 방송은 시시각각 도로 통제와 사고 소식을 알렸고 트레인 역에서는 웬만하면 집으로 돌아가라는 회유의 방송이 들렸다. 웬만하지 않은 사람들만 남아도 역 안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한참이나 연착된 트레인을 타고 두어 정거장을 지났을 때 직장 동료의 전화가 걸려왔다.
Our centre is closed! Don’t need to work today! Go home!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제치고 트레인에서 내렸다. 다들 모쪼록 수고하세요. 피곤해 보이는 낯선 얼굴들을 마주하자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려면 반대편 트레인을 타야 했으나 그쪽 상황도 답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아침 일곱 시. 갓 내린 눈이 몇 초 먼저 내린 눈을 덮으며 발목보다 높게 차올랐다. 해는 여덟 시가 되어야 뜨지만 덕분에 세상은 온통 환한 빛이었다. 눈 속에 묻혀 헛도는 자동차 바퀴, 코너에 멈춰버린 버스 한 대, 부지런히 건물 앞 눈을 치우는 아저씨. 이른 아침, 혼돈의 도시 풍경에 정점을 찍은 것은 물속을 헤엄치듯 버둥대며 언덕을 오르던 내 뒷모습일지도 모른다.
날씨로 국경을 정한다면 밴쿠버는 캐나다가 아닐 것이다. 덥지 않은 여름, 춥지 않은 겨울을 지니고 있으니 타 지역에 비하면 그야말로 환상의 도시가 아닐 수 없다. 오늘 밴쿠버의 기온은 영하 7도. 이곳 환상의 도시인들은 한 번씩 이런 추위가 찾아오면 어찌할 줄 모른다. 흔치 않은 폭설까지 겹치면 그야말로 멘붕이다. 대중교통은 마비가 되고 눈길 운전에 서툰 이들은 도로에서 곡예를 벌인다. 영하 30도 수준이 기본인 다른 동네 케네디언들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이다. 오늘 같은 날씨라면 그들은 반팔 차림으로 조깅을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직장인에겐 일주일 중 가장 힘든 고비인 수요일, 폭설 덕분에 생각지 않은 휴일을 맞았다. 뒤뚱거리며 오른 언덕의 끝자락에서 공으로 얻은 오늘의 시간을 어떻게 쓸까 고민해본다. 1. 낮잠을 잔다. 2. 아침을 먹고 낮잠을 잔다. 3. 넷플릭스를 보며 낮잠을 잔다. 무얼 해도 낮잠이 옵션으로 들어있는 하루라니. 기분이 좋아 혼 빠진 사람처럼 배실배실 웃다가 집 앞에 나와 있던 이웃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출근을 하지 않는 대신 세 시간째 삽을 들고 콘도 앞 눈을 치우는 중이라고 했다. 관리소 직원이 나타나기 전인 새벽 눈길에 누군가 넘어지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단다. 아, 이런 환상의 도시에 걸맞은 환상의 시민이라니.
Would you like some coffee?
Oh, yeah!
청년이 반색을 표하며 엄지를 척 올린다. 나는 그가 세 시간 동안 쌓아 올린 눈산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핸드드립 커피를 만들기 위해 원두를 갈고 텀블러를 준비한다. 공으로 얻은 오늘의 시간은 이웃 청년과 함께 커피와 수다를 나눈 뒤 아점을 먹고, 넷플릭스를 보다가 낮잠을 자는 데 쓰일 것이다. 어쩌면 미뤄둔 학교 과제를 끝낼 수도 있겠다. 생각할수록 마음에 드는 하루다.
폭설을 맞은 밴쿠버의 오늘. 다들 어떤 수요일을 보내고 있을까. 매일 트레인에 함께 오르는 이름 모를 동지들의 퇴근길이 너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눈은 이제 그만 멈춰줬으면.
** Cover Photo by kwong_kevin from Vancouver is Awes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