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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Mar 16. 2020

일상은 더 이상 고요하지 않다.

COVID-19가 변화시킨 밴쿠버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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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밤. 예정대로라면 우리는 영화관에 있었어야 했다. 집에서 도보로 십 분이면 닿는 거리에 있는 동네 영화관은 가격이 저렴할 뿐 아니라 다리까지 뻗고 앉을 수 있는 좌석이 마련돼 있다. 영화가 끝나면 어슬렁거리며 집으로 가는 길에 스시를 먹을까, 타이를 먹을까 고민하다 결국엔 그가 좋아하는 타코를 먹었을 것이다. 에이, 왜 우리 동네엔 코리안 레스토랑이 없는 거야, 하고 짜증을 부리면서. 주말 아침엔 보통 늘어지게 늦잠을 잔 뒤 천천히 단골 카페를 향한다. 브런치와 커피를 시킨 뒤 그가 그림을 그리면 나는 책을 읽거나 밀린 과제를 하곤 한다. 우리가 좋아하는 카페는 시내를 관통하는 강가에 자리하고 있어 햇살이 좋은 날이면 산책하기에도 그만이다. 물 위에 떠 있는 터그보트를 바라보며 걷다가 리버 마켓에서 일주일 치 먹거리를 사는 편리함은 덤이다. 집순이 집돌이의 평범한 주말. 나는 그 고요함이 좋았다.




그랬던 나의 일상이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2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인터넷으로 한국의 상황을 확인하고 가족들과 통화하는 것이 주요 일과가 되었다. 여긴 괜찮아. 한국이 걱정이지. 되려 나를 걱정하는 엄마의 목소리에 나는 늘 같은 대답을 하곤 했다. 그때까진 그랬다.


갑자기 트레인에서 재채기가 나오려는데 참느라고 혼났잖아. 뻔하잖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I'm Asian!


동양인들에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변화는 더 빨리 감지되었다. 일본인 직장 동료는 마스크를 쓰고 싶어도 사람들의 인식이 두려워 망설여진다고 했다. 마스크를 쓴 동양인과 코로나 바이러스를 구분하지 못하는 몇몇 사람들 때문이었다. 뉴스에서는 늘어난 확진자 수를 발표하면서도 위험한 수준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사람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일을 하고, 학교를 가고, 여가 생활을 즐겼다. 한국은 외출 시 마스크를 쓰는 것이 필수였지만 캐나다는 증상이 없다면 쓸 필요가 없다고 권고했다. 무엇을 따라야 할까? 혼란스러웠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종종 일어났다. 웨스턴 레스토랑이나 술집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시안 레스토랑은 갈수록 손님이 줄었다. 왜 그런 것일까? 이탈리아에서 바이러스 사망률이 치솟는다고 해서 피자나 파스타가 팔리지 않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동양인 혼혈 친구는 두 달이나 기다려 만난 전문의가 자신의 다친 손목을 만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모든 환자와의 접촉 시 예방 차원에서 행하는 일이라던 그 백인 전문의가 왜 다른 백인 환자와는 기꺼이 악수를 나누었을까? 혼란스러운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인종차별을 느낀 친구가 열받아 올린 글


3월에 접어들면서 이곳의 상황도 급격하게 달라졌다. 메트로 밴쿠버를 비롯한 북미 전역에서도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진자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팬데믹 선언 이후 250명 이상의 모임은 법적으로 제한되었고, 로컬 스키장도 줄줄이 문을 닫았다. 학교는 이제 봄방학에 들어갔지만 아마도 더 연장될 것이다. 주정부에서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2주일 치의 비상식량을 준비할 것을 권유했고, 사람들은 panic buying으로 세상이 끝날 것처럼 마트의 물건들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물건 값은 오르고 마트의 선반들은 텅텅 비어갔다. 마스크나 손 세정제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화장지를 구하려면 새벽부터 줄을 서야 할 판이었다. 동양인 차별에 사재기 열풍이라니. 마치 블랙코미디라도 보고 있는 기분에 나도 모르게 씁쓸해졌다.




금요일 밤. 우리는 영화관에 가지 않았다. 예약했던 영화들은 개봉일을 미루면서 줄줄이 취소되었다. 스시를 먹을까, 타이를 먹을까 고민하다 스시를 포장해 집으로 가져왔다. 거실에 도란도란 앉아 영화를 보고 다음날 아침까지 늘어지게 늦잠을 잤다. 토요일. 장바구니를 들고 마트를 돌아다니며 약간의 캔과 냉동식품, 여분의 쌀을 구입했다. 평소의 쇼핑 리스트와는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그 정도면 자가격리를 하게 되는 날이 와도 충분할 터였다. 세상에, 집에 휴지가 남아 있는 게 어디야. 당분간 화장실은 몰아서 가야 하나 싶은 생각에 쓴웃음마저 났다.


햇살 좋은 주말, 커피를 마시며 집 앞 공원을 산책했다. 세상이 들썩이는 동안에도 봄은 찾아온 모양이다. 이런 날씨에 거리는 한적하고 마트는 북적이는 기현상이라니. 코로나 바이러스의 등장으로 우리의 일상은 더 이상 고요하지 않다. 다양한 문화와 인종을 존중하지 않고 높은 시민 의식이 사라진 밴쿠버라면 더더욱 말이다. 꽃이 지고 더운 여름이 오기 전에 우리는 다시 평온해질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 Photo by Komal Bra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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