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기 전에 가을 낭만 급속충전하기
만두 찜통 같던 한여름이라는 ex-를 까맣게 잊을 만큼 신선하게 다가오던 가을이는 쌀쌀맞게 변심 중이다.
늦가을은 가을 중에서도 가장 아쉽다.
헤어지기 아쉬워 서로의 집 앞에 불량배들이라도 잔뜩 있는 냥 번갈아 서로의 경호원이 되어 왔다 갔다리를 반복하곤 하는 그 길처럼.
눈에 콩깍지 서클렌즈를 끼고 맛있게 한 숟갈 먹었는데 금방 뺏겨버린 밤 티라미수처럼 그저 아쉬운 순간.
가을 모드의 급속 완충은 겨울을 나기 위한 홍삼 진액이다.
매년마다 이번 겨울은 유독 더 추울 거라는 엄포를 놓는 뉴스를 피식-하고 웃어넘기려면 우리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나만의 가을 거리를 찾아 이번 주말 내로 꾹꾹 담아 놓자.
나만의 가을 파우치 소품 공개
1. 나의 가을은 일단 라흐마니노프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영화를 한층 더 있어 보이게 하던 그 피아노 협주곡.
들으면 아~ 하지만 다 듣고 나면 오.. 하는 곡.
도입부부터 곡 끝까지 소처럼 버릴 게 없지만 최고의 순간은
오보에와 첼로가 피어오르는 5분 50초 부분이다.
궁금하거나 시간이 많이 남는다면 찾아서 '음청'해보시기를.
Sergei Vasilievich Rachmaninoff (Rachmaninov) 1873.4.1 - 1943.3.28 러시아
Piano Concerto No.2 in C minor, Op.18 I. Moderato
2. 클래식 장르만 얘기하자니 괜히 있어 보이는 척하는 것 같아서 국내 곡도 하나 꾹.
이 곡은 영화 느낌과 배우들의 연기 자체도 좋지만 정말 ost가 MSG다.
영화 출시 연도를 언급하자니 내 나이가 어때서 싶은 기분이 스치지만 어쩔 수 없다.
삽입곡의 도입부만 들어도 영화의 모든 장면이 필름처럼 스쳐가던 영화는 바로 '국화꽃 향기(2003)'.
성시경의 '희재'는 나를 2003년으로 소환시키는 타임머신이다.
영화 '국화꽃 향기'(2003) OST '희재' (성시경).
3. 그다음은 출근길의 노란 은행잎이다.
특히나 빨강, 물 빠진 초록, 바래진 갈색의 알록달록한 단풍들 중 서있는 은행나무 사이에서 파르르..
은행 잎 하나가 한 마리의 생물 노랑나비가 되어 떨어지는 찰나는 아름다운 가을 그 잡채다.
얼마 전 출근길에 그 나비를 만나서 홀연히 바라보다 뒤늦게 폰카를 꺼냈으나 너무 굼떴다.
애먼 흔한 동네 나무만 찍고 말았다.
4. 마지막은 고전적인 코스로 영화를 하나 추천하려 한다.
Great Expectations 1998년 (에단 호크, 귀네스 팰트로)
유년시절의 식수대 키스 장면으로 제일 유명한 영화이지만 내 마음속 명장면은 따로 있다.
가난을 벗어나 그림으로 유명세를 얻게 된 배우 에단 호크가 열렬히 바랬던 그녀에게 빗속에 달려가
그녀의 집 앞 창문 밑에서 고래고래 고백 어택하는 장면이다.
지원했던 회사에 면접보러가서도 사장님의 작은 공감에 혼자 울컥해서 휴지나 찾던 F of the F(MBTI 이제 좀 지겹지만)였던 나에게 그의 우중 고백이란 이미 우리 집 창문 밑에서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장대 같은 빗 속에서 아무튼 난 고백을 받았고 맘 속으론 이미 창문 열고 다다다다- 뛰어 내려가 에단 호크를 껴안았다는 거다. 우연히 tv로 봤었던 지난 영화인데 이상하게도 그 장면에 꽂혀서 다시 보고 싶은 데 오래된 영화를 각 잡고 볼 곳이 없어 그 시절 혼자 찾아간 곳은 바로.
그렇게 영화를 보고 싶다던 연인들이 들어가기만 하면 도통 내용을 하나도 기억 못 하고 나온다는 치매의 숲-dvd방. 혼자 즐감하고 홀연히 빠져 나왔던 기억 한 조각에 피식피식 웃어본다.
커피 한 잔에 소확행을 살 수 있는 것 처럼 오늘은 늦기 전에 나만의 가을 소품들을 모아 맘껏 킁킁거리며 살아 있음 느껴보는 것도 좋은 에너지가 될 것 같다.
가을은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봄이다. - 알베르 까뮈
Autumn is a second spring when every leaf is a flower. - Albert C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