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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큰철 Feb 17. 2023

브레이크가 고장 난 80톤 트럭

허버트 조지 웰스, <타임머신>

 나는 디스토피아 세계관의 SF물을 엄청, 완전, 아주, 매우 좋아한다. 거기다 시간여행까지 있으면 환장한다. 미래를 상상하는 일은 항상 즐거운데, 암울한 세계관은 현실감을 주고 시간여행이라는 기믹은 변수와 모험을 만들어 활기를 불어넣는다. 우리가 맞닥뜨릴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점도 좋다. 환경 문제서부터 빈부격차, 종말, AI에도 인격이 있는지, 어떻게 인간성을 지킬 수 있는지 등 많은 딜레마에서 나의 입장을 미리 정리하다 보면 가끔 이야기 소재도 떠오른다. 그 와중에 어떻게 생각을 해봐도 우리의 미래가 막 긍정적이지 않은 건 나만의 생각일까? 내가 너무 디스토피아에 절여졌나?

 

이제 발전을 그만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도 해봤다. 굳이 화성에 가지 않아도 살만 한데, AI나 기계가 나서지 않아도 딱히 불편한 게 없는데, 지금 정도 문명에서 아낄 거 아끼고 잘 버티는 게 오래 존속하는 길이라는 생각.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문제만 튀어나오는 것 같고 악용될 위험도 높아지니까. 하지만 조금 더 깊게 생각해 본 결과 개인이건 인류건 정체되는 것이 가장 큰 재앙이고, 앞에 뭐가 있던 나아가는 것이 운명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는 인류의 진보를 어둡게 보았다. 쌓아 올린 문명이 필연적으로 무너져서 결국에는 그것을 쌓아 올린 자들을 파멸시킬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헛고생이라고 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듯 살아낼 도리밖에 없다. -174p


100년 전 사람들은 본인의 생계에 대한 걱정은 있었어도 인류 생사에 관한 문제는 정말 상상불가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1895년 발표된 <타임머신>에서 허버트 조지 웰스가 그린 80만 년 후의 미래는  요즘 그려지는 미래에 비하면 나이브하게 생각될 정도로 긍정적인 면이 있다. 인상적인 것은 작가가 생각하는 미래 인류의 쇠락 원인이다. 소설 속 미래 인류는 결핍과 위험에서 해방되고 그대로 안주해 버리고 만다. 그리고 긴 시간 동안 지능과 신체능력이 쇠퇴해 버린다. 물론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가정은 지금 우리에겐 꿈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100년 전 사람이 말한 '살아낼 도리'라는 말은 2023년, 침대에 널브러져 지구걱정을 하던 내 몸을 일으켜 책상에 앉힌다.


올해 인류 멸망시계의 시곗바늘이 10초 더 당겨진 90초로 맞춰졌다고 한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내야지. 영화 <돈룩 업>의 결말에서 지구종말을 맞이하는 다양한 군상들을 보여주는데,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지는 순간을 앞두고도 담대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차곡차곡 살아낸 오늘이 꺾이는 마음을 떠받쳤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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