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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큰철 Feb 24. 2023

자네를 만나 반갑네, 호레이쇼

셰익스피어, <햄릿>

 가끔씩 나를 괴롭히는 두려움이 있다. '이대로 잊히는 게 아닐까.' 바람같이 왔다가 바람같이 가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나라는 사람, 세상이란 불판에 뿌려진 소주처럼 아무 향기도 채취도 남기지 못하고 치익 하고 사라져 버리면 어떡하나 라는 두려움.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 일상만화를 그리기로 했다. 일기를 쓸까도 고민했지만 그림 연습 겸 남들도 볼 수 있는 만화로 정했다. 조선시대 왕들처럼 사관이 따라다니며 일일이 말 한마디 행동 한 거지를 기록해 주면 좋으련만 왕이 될 수 없는 나는 셀프 사관이 되어  평소의 생각, 행동의 이유들을 그려서 보여주련다. 누군가라도 나라는 사람을 알고 기억해주지 않을까 싶어서.


나를 잘 알아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이런 고민 없이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반려자를 찾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생의 과업이 아닐까. 그리고 반대로, 누구를 잘 알고 있다고 말할 만큼 난 남에게 관심을, 믿음을 주는 사람이던가.


햄릿에게는 심복 호레이쇼가 있었다. 햄릿은 삼촌이 아버지를 죽여 왕위를 뺏고, 어머니까지 차지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미친 척을 하면서 주변의 의심을 피하고 삼촌의 동태를 살핀다.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상황, 주변 인물들과의 갈등이 심해지는 가운데 호레이쇼는 햄릿의 광기를 잡아주었다. 호레이쇼에게만큼은 속사정과 진심을 허울 없이 터놓았고, 호레이쇼는 믿음으로 화답하며 그의 계획을 보좌했다.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러 사랑하던 연인과 어머니, 삼촌이 죽고 자신마저 바닥에 누워 마지막을 기다리는 순간 햄릿은 따라 죽겠다는 호레이쇼를 말리며 부탁 하나를 남긴다. 살아남아서 삼촌의 악행과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달라고.


자네를 만나 반갑네. 호레이쇼, 자네가 아니라면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네.
-106p


주인공을 포함한 관련인물 대부분이 죽는 몰살 엔딩이지만 그래도 햄릿의 입장에서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자신을 비추어 주던 호레이쇼라는 거울이 살아남았기 때문 일 것이다. 중국 춘추 전국시대 제나라의 재상 관중은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것은 포숙이다"라고 말하며 힘들 때나 어려울 때 변함없이 그의 능력을 알아주고 지지해 준 포숙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동양에 관포지교가 있다면, 내 마음속엔 햄릿과 호레이쇼, 햄호지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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