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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큰철 Mar 24. 2023

우리의 눈을 가리는 것

프란츠 카프카, <성>

어렸을 때부터 피부가 약했고, 사춘기부터 아토피에 시달리곤 했다. 날씨가 바뀌고 건조해지는 환절기마다 팔꿈치나 무릎 안쪽의 접히는 부분은 벌겋게 짓무르기 일쑤였고 연고를 바르고 나도 모르게  긁는 것이 반복되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에 나뿐만 아니라 부모님도 많이 안타까워하셨다.


고등학교 시절 내 머릿속에 한 가지 꽂힌 게 있었는데, 바로 가습기였다. 집이 건조해서 증상이 심해지는 것이 아닐까? 인터넷을 뒤져 좋아 보이는 가습기를 찾기 시작했고, 광고 문구와 후기를 보면서 가습기만 들여놓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마냥 생각이 점점 굳어갔다. 그렇게 고른 10만 원이 넘는 가습기 부모님 게 사달라고 졸랐지만 아버지가 사 오신 것은 평범하디 평범한 싸구려 가습기였다. 그날 저녁 난 아버지에게 대들었고, 화가 난 아버지는 가습기를 번쩍 들어 거실바닥에 내던져 버렸다. 덤으로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뺨을 맞았고 방에 들어가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20년, 나는 아직 아토피와 함께 살고 있다. 그동안 다양한 수면/식사 패턴을 지내면서 깨달은 것은 아토피는 워낙 원인이 다양해서 한 두 가지를 바꾸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맑은 공기와 일정한 수면, 균형 잡힌 식사를 제공했던 군대에서도 없어지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심하게 고통받는 사람들에 비하면 내 증상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어떻게 운이 좋았는지, 심했던 증상 부위는 거의 나았고 손 부위에만 남아있다. 꼼꼼히 핸드크림을 바르고 술이나 인스턴트식품들을 자제하면서 잘 다스리는 중이다.


고등학교 때의 나처럼, 때론 명확해 보이는 해답이 우리의 눈을 가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만 고치면 해결될 거야, 내가 고통받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야, 등등. 우리는 마주 하는 문제들의 복잡성을 인정하지 않고 단순하고 명쾌해 보이는 해답에 끌린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한 마케팅도 넘쳐난다. OO설루션, 인생 OO, 항상 잠이 모 잘랐던 나는 광고에 이끌려 수없이 매트리스도 바꿔보고 베개도 바꿔봤지만 달라진 건 없었고 후회와 부끄러움만이 남았다. 가습기? 집에  있지만 귀찮아서 잘 틀지도 않는다. 난 그때 왜 철 없이 아버지에게 대들었을까... 부모님에게도 그 일은 큰 상처로 남지 않았을까.


그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시만, 길은 길게 뻗어 있었다. 도로, 즉 마을의 큰길은 성이 있는 산으로 나 있지 않았다. 성이 있는 산에 가까이 다가가는 듯하다가, 마치 일부러 그런 듯 구부러 져 버렸다. 성에서 멀어지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가까워지 는 것도 아니었다.
 -20p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성>의 주인공 K는 측량사로 고용되어 외딴 성마을에 왔지만, 신분 증명도 못하고 일을 받지 못하는 위기에 처했다. 어떻게든 성에 들어가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고 싶어 눈에 보이는 해결책을 따라가지만 본질에는 다가가지 못한 채 겉만 뱅글뱅글 돌 뿐이었다. 주변 마을 사람들의 도움도 결국 자신이 가진 단편적인 정보와 희망사항에 매몰된 엇갈린 해답들이다. K는 어떻게든 객관적으로 판단하려 하지만 복잡한 절차와, 관료주의에서 나오는 한정적인 정보들은 어떤 길이 진정 성으로 향하는 길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겐 반대로 수많은 정보들이 널려있다. 그러나 눈에 띄는 단순 명쾌한 정보들만 수집하다 보면 결국 그것이 우리의 눈을 가리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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