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싸우고 난 5일째가 되었다.
전 날 아내와 화해를 생각하며 귀가를 했지만 막상 마음처럼 쉽게 아내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아직 어색했고 아내 역시 그동안의 나의 행동에 단단히 뿔이 난 듯했다. 결국 또 하루를 보내게 됐다.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듯했다. 그런데 하필 공휴일이라 상황이 애매하게 됐다. 평소 같았으면 아침에 일어나 그냥 회사로 출근하면 되는데 쉬는 날이라 갈 곳이 없었다. 일단 일어나자마자 아내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집 밖으로 나왔다.
너무 이른 아침이어서 딱히 갈 곳이 없었다. 한국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여기도 나름 겨울이라 아침 기온이 10도 안팎으로 싸늘했다. 그나마 차가 있어서 밖에서 떨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었다. 나는 차를 몰고 '그냥 회사 사무실이나 갈까?' 하고 운전대 방향을 돌리던 중 한 곳이 떠올랐다. 바로 새벽시장이었다.
새벽부터 오전 12시까지만 열리는 재래시장이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배추와 두부를 살 수 있는 곳이라 주말에 가끔 들리는 곳이었다. 시장까지 갔으니 두부가 있으면 좀 사 오려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두부 만드는 기계가 고장이 났다고 한다. 두부를 파는 곳 바로 옆 채소가게 아저씨가 나를 보더니 어설픈 한국말로 '배추'를 연거푸 내뱉었다. 딱 보니 싱싱해 보이기도 했고 때마침 집에 김치도 떨어졌던 지라 나는 배추 다섯 통을 주문했다. 배추 다섯 통은 한 번에 들기 어려울 정도로 묵직했다.
배추를 사는 순간은 배추가 싱싱해 보였고 김치를 먹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15킬로 가까이 되는 배추를 차 트렁크에 싣고 나서야 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와중에 내가 배추를 왜 샀을까? 저것들을 어떻게 처리한다는 말인가?’ 뒤늦게 후회가 됐다. 결국 갈 곳이 없어 내가 선택한 곳은 회사 사무실이었다. 나는 인생계획을 계속 만들어 보기로 했다. 세워 놓은 목표에 실행 계획을 정교하게 다듬어 나갔다. 그러나 점심 무렵쯤 배고픔에 더는 이어 나갈 수 없었다.
그냥 집에 들어가기로 했다. 역시 이번에도 나를 움직이게 하는 건 밥이었다. 배추를 오래 방치해두면 안 될 것 같은 이유도 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혼자서 밥을 후다닥 차려 먹었다. 이른 아침부터 찬바람을 쐬고 허기진 배를 채워서 일까? 노곤함이 몰려왔다. 방에 들어가 낮잠을 잤다. 꿀맛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배추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내일은 또 출근이라 오늘 내로 김치를 담가야 할 텐데’라는 부담감이 몰려왔다.
저녁때쯤이 되어서야 배추김치를 본격적으로 담기 위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추를 쪼개어 물에 씻고 소금에 절였다. 그리고 재료를 준비했다. 배추양이 생각보다 많아 힘이 들었다.
‘나는 왜 하필 이 타이밍에 배추를 사 와서 혼자 생고생을 하고 있을까?’
아내에게 도와 달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 채 시름 소리와 욕을 내뱉으며 김치를 담았다. 김치를 다 담고 나니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져 있었다. 서둘러 김치를 통에 넣고, 도구들을 씻고 깔끔히 정리를 해 놓았다. 내 성격이 깔끔한 편이 아니지만 이 날 만큼은 내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자존심을 굽히고 싶지 않았다. 아내가 차려준 밥을 안 먹겠다는 생각만큼이나, 정리하는데도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이상했다. 아내와의 싸운 이후에 나의 행동의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화가 나서 나의 망가진 모습을 보여줘 복수하고 싶었던 내가 아주아주 모범적인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삶을 더 충실히 살아가기 위한 목표를 세우고 새벽 기상 계획까지 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비록 욕을 한 바가지 내뱉으며 하긴 했지만 적어도 3개월은 먹을 수 있는 김치까지 직접 담고 있던 나 자신이 신기할 정도였다. 물론 두 가지 모두 시간을 때우다가 우연히 시작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나는 뒤늦게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아내와의 싸움 이후 인생 계획을 세우고 김치를 담갔던, 그동안의 나와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던 이유의 단초를 발견했다.
"낯선 상황으로 들어가야 기존에 있던 생각으로부터 벗어납니다. 낯선 것을 하는 이유는 정체되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생각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의 이야기이다. 낯선 경험이 삶을 새롭게 변화시킨다는 내용이다. 낯선 경험은 거창할 필요도 없고 일상의 작은 변화를 통하서도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비싼 낯선 경험보다는 값싼 낯선 경험을 자주 할 필요가 있다. 내가 자주 다는 길 옆길 혹은 자주 다닌 곳의 바로 옆동네, 내가 늘 먹던 것에 약간 다른 음식과 약간 다른 것, 이런 살짝 다른 것을 경험하면서 의외로 전혀 다른 것을 하고 완전히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
돌이켜보면 내가 아내와의 싸우고 난 후 며칠 동안의 방황은 나를 새로운 일들을 경함하게 했던 것이다. 혼자서 술을 마셨던 경험도 낯설었고 퇴근 후 곧바로 집에 들어가지 않고 누군가를 만났거나, 회사에 남아 있던 행동 하나하나가 나의 루틴을 벗어나는 것들이었던 것이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내와의 냉전기간 동안 집에서의 나는 낯선 이들과 함께 있는 외부 투숙객의 모습이었다.
일주일 동안의 낯선 행동들이 나의 뇌를 자극했던 것이다. 내가 은근히 이 상황을 즐겼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으리라. 이 사실을 몰랐을 땐 나에게 이런 나쁜 마음이 있었다니 흠짓 놀라기도 했었다. 김경일 교수의 설명대로 아내와의 싸움 이후의 며칠 동안 일상에서의 낯선 경험이 내가 목표를 세우고 새로운 일을 시도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틀림이 없었다.
아내와 싸우고 일탈을 생각했던 내가 인생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이유를 찾았다.
우연이 찾아온 한 순간의 낯선 경험으로 한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변화된 이야기가 떠올랐다. 바로 인도의 비폭력 민족운동 지도자이자 건국의 아버지 ‘간디’의 이야기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여행 중 마리츠버그 역에서 그가 겪은 인종차별이 그를 시시콜콜한 변호사에서 인종차별 투쟁가로 변신시켰고, 세계 역사에 오랫동안 기억되는 위대한 지도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왜 목표를 세우게 됐고, 삶의 일부분이라도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던 이제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처럼 삶을 변화시킬 우연한 기회를 의도적으로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흥분이 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