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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근 Dec 16. 2017

제주도(濟州島)는 그런 곳이다

선이 아닌 점(點), 그래서 난 행정용어가 아닌 섬 도(島) 자를 쓴다.


내 고향은 제주도다. 족보를 보면 麗末鮮初(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지는 시기, 1392년 경) 때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여 스스로 제주로 내려오신 선조의 후손 중 한 명이다. 족보에는 시조(始祖) 몇 대(代), 입도(入島) 몇 대(代)라고 두 가지로 표시되어있다. 그래서 나는 양천(陽川)허씨(許氏) 시조(始祖) 34세손(世孫), 입도(入島) 20세손(世孫)이다. 1984년 고등학교 졸업하고 공부한답시고 육지로 올라와 육지 사람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버티다 보니 30년이 훌쩍 지났다. 이젠 제주 사람도, 육지 사람도 아닌 어중간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최인훈 소설 「광장」의 주인공인 이명준이 고민한 것과 같다고 하면 너무 비약이 심한가….


거창하게 족보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섬에서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서울에 살면서 고향이 제주도라고 이야기하면 모두들 “와, 정말 좋겠다.”라는 반응을 보인다. 그들에게 제주도는 눈이 시리게 푸른 바다와 우뚝 솟은 한라산과 아기자기한 오름들, 돌담 너머 노란 감귤이 여행자를 반겨주는 이국적인 곳이다. 

하지만 그 섬에서 가족을 이루어 600년 이상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바다와 산 그리고 감귤 ‘삶’이자 '밥벌이'였고 '희망'이었다. 


눈이 시리게 푸른 바다는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밭일은 물론이고 물질까지 해야 했던 해녀의 서글픈 눈물을 파도에 실어 보낸 곳이다. 바닷속 깊은 곳까지 잠수한 뒤 물 위로 떠 올라 참았던 숨을 힘껏 내쉬는 해녀의 숨소리, ‘숨비 소리’는 그녀들의 억눌렸던 '삶의 숨소리'다.

[ 푸른바다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해녀들의 숨소리며 삶이다 ]

우뚝 솟은 한라산과 수많은 오름들에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4·3 사건’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좌익과 우익이라는 정치 이데올로기에 빠져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구잡이로 죽여버리는 완전히 미쳐버린 세상에서 희생된 14,000여 명의 주검 위에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며 여행객을 맞이한다.

[ 한라산 정상, 백록담 : 여기에서 물을 먹었다는 흰 사슴은 아픈 역사를 알고 있을까 ] 

노란 감귤은 '공부해야 큰 사람 된다'라고 육지로 보낸 아들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는 적금통장이었다. 감귤을 육지 사람에게 팔아야 돈이 되기에 동생들은 상품으로 파는 노란 감귤은 맛도 보지 못했다. 기껏해야 '파치(깨지거나 흠이 나서 못 쓰게 된 물건) 귤'로 아쉬움을 달랬다. 

[  돌담너머 감귤과 파란 하늘, 그 속에 숨겨져 있는 마음이 보이면 이쁘게만 보이지는 않겠지... ]



육지는 선(線)이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처음으로 육지를 갔다. 모든 게 신기했지만 제일 놀라웠던 건, 끝없이 이어지는 산의 모습이었다. '아! 육지는 다리에 힘만 있으면 걸어서 어디든지 갈 수 있구나'. 내가 사는 이곳이 싫으면 언제든지 두 다리로 떠날 수 있는 곳, 그곳이 육지였다. 


섬은 점(點)이다. 

젊은 혈기에 집을 뛰쳐나와도 바다가 가로막아 더는 갈 수 없다. 파도만 한참 바라보다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섬에서 삶은 그런 거다. 답답한 섬 생활이 싫어 뛰쳐나오지만,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그래서 더욱더 같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곳, 그곳이 섬이다.



이 글을 쓰고 아내에게 보여주었더니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거 아냐? 오십 넘지 않으면 무슨 이야긴지 하나도 이해 안 될 것 같은데..."라고 한다. 그럴 것 같다. 마치 '아재, 꼰대'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제주도는 라스베이거스나 발리가 되어선 안된다. 시끌벅적해선 안 된다. 내 고향이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섬은 자연과 이웃들이 아름답게 살아가면서 만든 '삶의 흔적'이다.

제주도는 놀다 가는 곳이 아니라, 삶이 힘들고 지칠 때 조용히 삶의 의미를 되찾아가는 곳이다. 그래서 육지와 떨어져 있는 점(點)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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