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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근 Jan 12. 2018

손 vs 컴퓨터_의사소통 도구

아이디어를 그리는 도구

나는 건축디자인 실무를 1990년 초에 시작했다. 당시 설계사무소에서 도면 작업은 손으로 그리는 것과 컴퓨터로 도면(CAD : Computer-Aided Design)을 그리는 비율이 80:20 정도였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도면은 CAD로 그리게 된다. 손으로 도면을 그리는 선배와 CAD로 도면을 그리는 후배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자주 발생했다. 선배는 손으로 그리지 못하고 모니터만 쳐다보는 후배를 안타까워했고, 후배는 CAD의 편리함을 이해 못 하는 선배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나는 그 중간에 낀 세대였다. 손으로도, CAD로도 그릴 줄 알아야 했다. 손과 컴퓨터로 도면을 그리는 작업의 차이를 살펴보자.


부분과 전체의 차이 : 

손으로 그리는 경우 도면의 세부적인 부분을 그릴 때는 한 부분에 눈을 가까이 두고 그린다. 그리고 허리를 펴면 전체 도면이 눈에 들어온다. 작업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연결이 잘 되어 있는지, 수정이 제대로 되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허리를 굽히고 펴는 동작에서 ‘줌-인(zoom-in)’, ‘줌-아웃(zoom-out)’ 되는 것이다. CAD의 경우에는 ‘줌-인’을 통해 모니터를 보면서 마우스로 세부를 그린다. 전체와의 관계를 보려고 ‘줌-아웃’하면 모니터 크기의 한계 때문에 보이질 않는다. 전체와 연관되게 그려졌는지, 제대로 수정되었는지 확인이 어렵다. 종이에 출력해서 확인해야 한다. 출력된 도면에 잘못된 부분을 빨간 펜으로 표시해 다시 수정작업을 한다. 그리고 제대로 수정되었는지 또 출력해 빨간 펜으로 검토한 도면과 비교해야 수정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건축디자인에 CAD가 도입되면서 엄청난 종이가 사용되었고 이면지는 날로 쌓여 갔다. 아마도 지구 온난화에 엄청난 역할을 했을 것이다.

[ 건축가 류춘수의 스케치 ]

기술과 경험의 전달 : 

손으로 도면을 그리면 새로운 프로젝트 도면은 새로 그려야 한다. 기존 프로젝트에서 활용할 수 있는 디테일이 있어도 손으로 다시 옮겨야 한다. 이 과정에서 선배가 그린 디테일을 이해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선배의 암묵지가 전달된다. 제도판에서 도면을 그리고 있으면 지나가던 선배가 잘못된 것을 지적해준다. CAD로 도면을 그리면 선배의 경험을 손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명령어로 ‘복사와 붙이기(copy & paste)’를 하면 된다. 선배가 지나가면 잔소리할까 봐 화면을 ‘줌-아웃(zoom-out)’시켜 버린다. 시간은 절약되었지만, 선배의 경험은 전달되지 않는다. 

[ 모니터를 통해 도면을 그리는 CAD ]


3차원, 4차원 설계(BIM : Building Information Modeling)를 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개발되어 사용하는 지금의 건축 디자이너에게는 옛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자신의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남에게 설명할 때 펜을 들고 종이에 스케치하는 것만큼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도구는 아직 없다.   

   


영국의 유명 그래픽 디자이너 존 고럼(John Gorham,1937~2001)은 1990년 초 ‘애플 맥(Mac)’이 디자인 산업에 도입되자 새로운 디자인 도구를 경계하면서 자신을 홍보하는 포스터를 만들어 고객과 친구들에게 보냈다. 편지봉투 밑에는 ‘나의 유일한 장비(도구)’, 연필 밑에는 ‘내 마우스’라고 쓰여 있다. 손으로 그리기 때문에 컴퓨터가 못하는 아이디어가 풍부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 존 고럼의 홍보 포스터 ]


디자인을 위한 각종 소프트웨어가 개발되어 활용되고 있는 지금에도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손으로 그리기다. 컴퓨터는 아이디어나 구상을 불러일으키는 도구가 아니다. 컴퓨터나 소프트웨어 기술의 한계가 아이디어의 발목을 잡는다. 신세대 디자이너는 컴퓨터 기술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아이디어를 떠올리거나 디자인하지 못한다. 스케치는 고객에게 기본 아이디어를 전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객이 의견을 추가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수주영업의 제안 작업에도 이러한 ‘손으로 그리고 생각하기’는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고 제안 전략을 만드는 데 효과적이다. 나는 제안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자료를 공유한 다음 팀원들과 아이디어 미팅을 한다. 노트북은 필요 없다. 화이트보드가 있는 회의실에서 보드 마커와 A3 이면지만 가지고 시작한다. 화이트보드에 적든, A3 이면지에 적든 키워드와 도형만을 가지고 제안에 필요한 요소들을 정리한다. 이 과정에서 제안 전략이 설정된다. 그리고 제안 작업을 하는 동안 벽에 붙여 놓고 발전시켜 나간다. 언제든지 빠르게 전략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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