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토타입과 모형
디자이너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손으로 그리면서 구체화 시킨다. 아이디어가 생각날수록 스케치는 많아진다. 그중에서 선택된 아이디어는 좀 더 구체적인 단계로 들어선다. 디자이너가 프로토타입이나 모형을 만드는 것은 ‘손으로 하는 사고’를 구체화하는 것이다. 아이디어를 구체적인 프로토타입으로 만들어 내는 속도가 빠를수록 그 아이디어를 평가하고 다듬고 최상의 해결책을 찾는 것도 빨라진다. 초기 단계의 프로토타입은 무엇보다 신속하고 간단하고 저렴하게 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프로토타입을 만드는데 투자가 클수록 그 프로젝트에 대한 집착과 헌신도 커지기 때문이다.
프로토타입을 세련되게 다듬는 일에 대해 과잉투자를 하게 되면 두 가지 의외의 결과를 낳는다.
첫째, 조악한 아이디어임에도 불구하고 상용화를 위한 작업이 지나치게 많이 진척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최악의 경우 끝까지 가버리기도 한다.
둘째, 모형 제작에 시간이 많이 필요해 더 저렴한 비용으로 새롭고 좋은 아이디어를 발견할 기회가 사라져 버린다는 점이다. 프로토타입을 만드는 목표는 실제로 작동하는 모델을 만들려는 게 아니다. 아이디어에 형태를 제공하고 현재의 장단점을 파악하여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진 차기 모델에 대한 방향성을 얻으려는 게 진짜 목표다. 경험이 많은 디자이너는 프로토타입을 만들 때 “그만하면 됐어”라는 말을 적절한 시간에 던질 줄 알아야 한다.
건축 디자이너도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데 모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땅이 가지는 여러 가지 제약조건을 파악하고 건물의 규모를 결정한 다음, 건물이 땅 위에 앉을 위치와 형태 등을 모형을 통해 구체화한다. 초기 모형 재료로는 스티로폼이 많이 사용되는데 1970~80년대에는 찰흙을 사용하기도 했다. 찰흙만큼 만들었다가 부수고, 다시 활용하기 편한 재료가 없었다. 여러 건물이 배치되는 아파트 단지의 경우에는 수많은 대안 검토를 통해 최적 안을 만들어 간다. 건물의 배치를 통해 사람들의 움직임은 물론 차량의 움직임까지도 함께 결정된다. 배치가 결정되면 건물의 구체적인 크기를 결정하여 일조권은 물론 시각적인 사생활 보호까지 고려해 정확한 위치를 결정한다.
위치가 결정되면 건축 디자이너는 더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디자인을 하지 않고 모형 안으로 들어가 실제 생활하는 사람의 감각을 느끼며 모든 것을 디자인하게 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모형의 크기(scale)이다. 1대1 실물 모형을 만들기는 어렵기 때문에 축소 모형을 사용한다. 디자인 초기에는 1/100, 1/500로 축소한 모형을 가지고 아이디어를 검토하지만, 디자인이 진행될수록 좀 더 정교한 크기로 제작함으로써 실제 공간과 같은 느낌을 얻으려고 한다. 디자인된 공간 안에서 생활할 사용자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놓치지 않는 것이 스케치라면, 프로토타입과 모형은 아이디어를 3차원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실험하는 아주 유용한 방법이다. 직장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자신들이 하는 일에는 적용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들이 하는 말은 이렇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물체가 아닌 사람의 행동이나 할 일에 대해 기획한다. 그래서 디자이너처럼 프로토타입이나 모형으로 테스트할 수 없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