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 윤서야.
엄마는 어린 시절 일기를 자주 썼어. 일기를 아주 잘 이용하기도 했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엄마의 일기를 자주 애독하셨거든.
엄마 어린 시절에는 정말 먹고 싶은 음식은 짜장면이었어.
엄청 먹고 싶지만 1년에 한 번 어린이날? 또는 졸업식에만 먹을 수 있는데 평일에는 꿈도 꾸지 못할 음식이었거든. 그래서 일기에 썼었지.
제목 짜장면이 먹고 싶어요.
나는 가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의사 선생님이 우리 엄마에게 해주면 좋겠다.
우리 엄마는 깜짝 놀라 의사 선생님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볼 거다.
그러면 의사 선생님은
" 이 아이는 이제 얼마 살지 못하니 먹고 싶은 음식을 실컷 먹게 해 주시죠."
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그럼 엄마가 내게 와서 뭐가 먹고 싶냐고 말하면 나는 슬픈 목소리로 답할 테다.
" 짜장면이 정말 먹고 싶어요."
말할 것도 없이
그 주말에 외할버지는 우리를 데리고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사주셨지.
이 엄마는 가끔 갖고 싶은 거나 바라는 게 있으면 일기장에 써놓고 책상에 잘 올려놓고 학교에 갔어.
분명 외할아버지가 몰래 훔쳐볼 것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지.
하지만 좋지 않은 경우도 있긴 했어.
늘 엄마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만 같은 외할머니 보라고 쓴 일기도 있었거든.
제목:나의 친엄마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 엄마는 아무래도 새엄마인 거 같다.
오빠랑 싸우면 동생이 양보해야 한다고 나만 야단치고,
동생이랑 싸우면 누나가 되어가지고 너그럽지 못하다고 야단치고.
왜 만날 나만 야단치는지 모르겠다.
내 진짜 엄마는 아무래도 다른 곳에 있는 거 같다.
진짜 엄마라면 내 편도 좀 들어줘야 하는데 말이다.
이 일기를 쓴 날. 외할머니는 엄청 화를 내시고 일기를 쫘악 찢으시고는 다시 써오라 하셨지
엄마는 또 오기쟁이라 알겠다고 대답하고
이 아줌마는 진짜 새엄마가 틀림없는 거 같다.
이렇게 화를 내는 걸 보니 진실이 들통나서 나에게 화를 내는 거 같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어처구니없어서 웃으시고 그 일기는 찢지 않았어.
엄마가 기억하는 엄마의 청소년기 일기장은 주로 내 마음의 어두운 부분들이 많았지.
중, 고등학교 때 엄마의 일기장을 훔쳐본 재경이가 깜짝 놀라서 물었던 기억이 있지.
"엄마. 일기장을 몰래 봤는데 너무 무서웠어요. 어두워서요."
맞아. 청소년기, 엄마도 사춘기 시절을 겪었으니 그 일기장에는
오르지 않는 성적과 내려가지 않는 몸무게와 부조리한 것만 같은 선생님과 부모님에 대한 반항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미움, 증오, 원망, 두려움, 슬픔, 걱정, 모든 어두움은 거기에 다 담았지.
물론 내 어두운 그림자를 일기장에 다 풀어둔 덕에 엄마는 아주 밝은 얼굴로 학교를 잘 다녔어.
나의 일기장은 내 감정의 쓰레기통이었으니까.
며칠 전 윤서가
"엄마. 저 기록을 해놓기 잘한 거 같아요. 친구가 했던 말들과 행동들에 상처받아서 적어놓은 게 있었는데.
잊고 있다가 다시 보니 제 마음도 다시 보고 좋아요."
맞아. 엄마가 언제나 하는 말
'기록은 기억을 이긴다!'
사춘기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재경이나.
사춘기가 전혀 아니라고 말하는 윤서야.
엄마도 사춘기에 나는 사춘기가 아니라고 말했단다.
그래서 이해해!
재경아, 윤서야.
세상에서 가장 질리지 않는 이야기는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란다.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나고
언제 들어도 귀가 솔깃해져.
엄마가 가끔 재경과 윤서 어린 시절 이야기 해주면
몇 번을 들어도 재미나다고 하잖아. 질리지도 않고 말이야.
엄마가 재경과 윤서에 대한 이야기를 잘 남겨놓고 기록하는 이유는
언젠가 엄마가 떠났을 때
엄마가 그립고, 엄마가 갑자기 너무 보고 싶어지고,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해지고, 슬퍼질 때
엄마가 써놓은 이야기를 보면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자신이 참 괜찮은 사람이라 느껴질 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야.
초등학교 때는 부모님께 얻고 싶은 걸 말 못 해서 적어놓았고.
사춘기에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거나 들려주지 못한 이야기를 적었던 비밀 일기장이었다면
청년시절 엄마의 일기는 낙담과 좌절의 연속에서 매일 할 수 있다고 스스로 응원했던 일기장이었지
그리고 너희를 키우면서는 늘 반성과 성찰의 일기였고,
요즘의 엄마 일기는 감사일기야.
오늘처럼 가을 하늘이 맑아도,
너네가 밥 잘 먹어줘도,
윤서가 오가는 길에 엄마를 꼭 안아줘도,
오늘 필라테스가 좀 잘 되는 날도,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중년이 돼 가는 기분이 좋아.
많이 기록하렴.
너희의 일상의 기록이 너희들만의 추억이 되고, 역사가 되고.
성장의 증거가 될 테니까 말이야.
아! 물론 엄마는 훔쳐보지 않아.
가지고 싶은 것, 받고 싶은 응원은 직접 말로 전해줘도 돼
하지만 하지 못한 이야기, 마음속의 이야기들을 기록해 놓으면
시간이 흘러 너희가 성장하고 있음을 알게 돼서 뿌듯함도 있을 거야.
자신에 대한 일기는 매일은 아니더라도 조금씩 써두면 몇 년이 지나 다시 읽어도 재미날 거야.
성실함은 그 무엇보다 큰 능력이고 자산이라는 걸 기록들로 증명이 될 거야.
음..
마지막으로 엄마가 쓰다 보니
결론은
"나나 잘하자! 그냥 나나 잘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