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내린 비탈길을 젊은 청춘은 뛰어 미끄럼을 타고 늙은 청춘들은 게걸음을 걷지만 절박한 사람은 네발로 뛴다 3.
다행이도 늦은 밤 가게를 연 곳이 있었다
우리는 청웅초등학교 삼거리 앞 파출소를 돌아서 있는 라면집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침만 흘리며 곁눈길로만 그렇게 부러워한 라면집에 들어온 것이다
냄새가 ... 이세상 냄새가 아닌것 같았다
함바집 아줌마에게서나는 비릿한 젓갈 냄새보다 선생님에 더 가까운 주인 아줌마에게선 오뎅국물 냄새가 났으며 몇개 안되는 식탁에는 늦은시간임도 불구하고 경봉고등학교 학생들 징명여고 학생들이 알듯 모를듯한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라면에 떡복이를 먹고 있었다
파냄새와 시큼한 식초 냄새는 묘하게 향기롭게 풍기는 듯했고 우선 따듯했다
함바집에서 먹는 김치찌개 술국은 보이지도 않고 튀김의 고소한 냄새는 사리 판단을 잃게하는 무슨 마약 같은 조미료를 뿌린듯했다
용트림하듯 완만한 곡선을 그렸지만 거칠은 오징어 튀김과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 달걀은 빨간데 노란색까지 띄고 있었다
라면 한그릇에 밥까지 말았지만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다
열세살 수리에게는 너무 적은양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그릇을 더 먹고 싶었지만 멋대가리 없는 눈 짝 찢어진 형 같은 형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라면 한그릇을 비우고 있어 눈치만 볼수 밖에 없었다
라면집 아줌마는 친절한건지 장사속인지 몰라도 마치 손님들한테 잘 보이고 잘 먹이고 편히 쉬다가 잘하면 종이 쪽지까지 전해주고 재미있게 놀라는 듯 넉넉한 인심을 보여주는것 같았다
'밥 더 줄까?'
'됐어요 다음에 주세요 ... 아줌마 그리고 얘 앞으로 여기 밥 먹으러 오면 제거랑 같이 달아놔 주시고 달라는데로 주세요 ... 월급 받으면 매월 말일날에 학교 파한후에 예전처럼 같이 돈 드릴께요 ... 그렇게 좀 해주세요'
'누구니? 동생? ... 음 이쁜데 좀 씼겨야 겟네 ㅉㅉ'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진눈깨비였다
겨울도 아니고 그렇다고 봄도 아닌 아니 항상 겨울인 수리에게는 아무 상관 없었지만 애매한 날씨였다
귓불이 얼은 것도 아닌데 라면집 오뎅국물 김서림의 포근함 때문인지 몰라도 밖은 절대 포근하지도 따듯하지도 않았고 정말 차가웠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만화방으로가는 길이 지저분해지는 것도 괜한 마음탓인 것 같았다
진눈개비는 내리는 족족 녹아 내렸다
도로는 담배 꽁초와 그을음과 어울려 범벅이 된 잿빛 물바다 위에 뜬 구름다리 같았다면 어울리지않게 감상적인걸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수리?라고 했나 ... 무수리 같이 생기긴 했네'
'..... 소린데요'
'소리나 수리나 .... 너 정말 여기 건달들 사이에서 제대로 살 자신 있니?'
'자신이라면 어떤 자신 말입니까'
'여긴 매사가 제 정신 박힌 인간들이 사는곳이 아닌 쓰레기들이 모인곳이고 인간적인 곳이 아니야 ...
잘못하거나 아니 잘못한 일이 없어도 재수 없으면 얻어 터져도 어디 하소연 할곳도 없을뿐더러 한번 손 담그면 정신 제대로 가지고 있어도 헤어나오기 어려운 곳이야'
'.....'
'정신 제대로 가질 각오나 자신 없으면 지금이라도 그냥 가는게 좋다'
그러나 솔직히 수리는 갈곳도 마땅찮고 알수 없는 미묘한 흥분마저 일어나고 있었다
경계심을 넘어선 호기심이란 말이 옳을것 같다
경계심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충영이 형은 만화방 집사같은 사람이었지만 집사 일은 본업이 아니었다
만화방과 노름판 기도도 보면서 잔 신부름도 하는 그런 사람인데도 건달은 아니었고 오히려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 신분이었다
처음에는 잔 신부름이나하는 꼬마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수많은 건달들과 양아치를 제치고 당당히 한 자리를 지키며 공부까지 하고 있는것이었다
이충영
경기산고 야간 2학년 - 4년째 재학 중
나이 19살
사각턱에 스포츠머리 합기도 유단자 출신으로 안경쟁이고 짧은 목검만 있으면 싸움에 능통하다
학교에서는 전교 1.2등을 다투는 수재로 평가 받아서 지속되는 휴학과 복학에도 잘리지않고 학생신분을 인정받고 있다
본업은 학생이지만 청량리 쪽에 있는 경흥대학교
의과대학 해부 실습실 준직원 신분으로 담당학과 교수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사람이다
실습후 허가 받은 시신을 공동묘지에 매장하거나 화장하여 뒷 마무리를 하는 직원이었던것이다
고등학교 일학년 열 다섯 짜리가 한 밤중에 남들 다 꺼려하는 일을 아무 말없이 이년 이상을 도맡아 하고 있으니 이쁘고 대견하지 않을수 없었다
당연히 댓가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좋다 선택해라'
'여기서 지내다 날 풀리면 노가다판으로 돌아가 지금처럼 양아치처럼 살던가 아니면 여기서 내가 하는 일 따라하며 공부도하고 심부름하면서 살던가 .... 둘중에 하나 골라라 ...'
'....'
'조건이 있다
어느쪽을 택하든 니맘대로지만 나를 택하면 학교는 무조건 졸업해야 한다
월사금은 못줘도 자고 먹는건 여기서 같이 있어도 좋고 공부는 무조건 한반 중간 이상해야 한다'
'아! 너 몆등쯤 했냐?'
'... '
'몇등 쯤 했냐니까?'
'중간정도는 했어요'
'그럼 한반이 60명이니까 반에서 15등 안에 들면 딱 되겠네 ... 싫으면 자고 내일 나가면 되고
좋으면 내일부터 일어나자마자 나랑 같이 목욕탕부터 같다와서 자세한 이야기하기로 하고
... 잘 선택해'
귀신한테 홀린것처럼 수리는 자기 의지대로 해보지 못하는것이 처음이었고 삶에 있어서 가장중요한 선택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조차 몰랐지만 기뻤다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기뻐 죽을것 같았다
그래도 아직은 믿을수 없다
항상 이용만 당하고 뒷통수를 맞아왔으니까 아직은 믿을수 없었다
왜 나한테 이러지 ... 믿고 따라가 볼까? 저새끼 그 늙은 선생년처럼 또 나 팔아 먹는거 아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 밤새 혼자 묻고 답해 봤지만 종잡을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래도 저래도 달라질것 없다는 생각과 달라지면 달라지는대로 그대로 거부감 없이 받아 들이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저 사각턱을 따라해보자 하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형! 형이 생긴거라는 생각만 하자
겨울해는 언제나 짧았다
그리고 밤은 긴게 맞는지 아직 창밖은 어둑어둑해 한밤중인듯 했다
겨울 특유의 날씨가 그렇듯 녹으며 내리던 진눈개비가 멎은 대신 바람불며 추워진 날씨는 깡깡 얼어붙기 시작한것 같았다
'수리야 일어나라'
부드러운 말이 나를 다듬었지만 습관처럼 용수철 튀듯 저절로 상체가 일어났다
'정신 차리고 옷입고 따라나서'
어디서 났는지 던지는 츄리닝은 완전 배삼용 배바지 같이 커서 입을수가 없어 보였다
'제거 입을께요'
'저거 빨아야지 .... 니가 개냐?
지나던 개새끼도 냄새난다고 돌아가겠다'
'....'
'정신 안차려! 빨리빨리 옷 입고 똑바로 못해'
돌변한듯 험악한 인상을 쓰며 다그치기 시작했다
'눈깔 똑바로 떠, 눈깔 확 뽑아버리기 전에 ... 여기가 노가다 판인줄 알아'
저절로 눈이 커지며 동그랗게 변했다
어느새 미친듯이 볶아대는 잔소리에 궁두리짝을 주어 터지며 일어나 신발을 신고 있었다
'여기 있을거잖아? 엄살 떨지말고 제대로 안해?
다시 말하지만 여기는 살살거리며 아양 떨며 살아야 하는곳이 아니야. 여기는 자기는 자기가 지키며 살아야하는 곳이고 그래야 살아남을수 있는 곳이야 ...'
'빌빌거리며 양아치 짓하면 용서치 않을거야!
대답도 안했는데 불만있으면 언제라도 나가란다
충격이 너무 컸다
정신은 깨어 말뜻은 알겠는데 몸은 돌처럼 굳어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각턱만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는 매일 이시간에 일어나 자하문. 산명 여대 꼭대기를 돌고 올거다! 그 다음은 자든 뒤지든 맘대로 해도 좋지만 약속을 어기거나 싫든 좋든 내 뜻에 따라야만 한다!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뒤지든 병신이 되든 난 책임지지 않겠다! 알았어?'
시작도 전인데 이마에선 진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무언가 대들어야 하는데 입만 실룩거릴뿐 아무런 말도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빌어먹을
나름 노가다판에서 날 다람쥐처럼 빠르고 신속하게 뛰어 다녔는데 겨우 청웅중학교 앞 안가를 지나는 고개도 못넘고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고 턱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뛰는게 아니라 기어가듯 엉거주춤 깡깡 얼은 고개 넘어 산명여대 꼭대기 비탈길을 다 올랐을때에는
눈알에서 불꽃이 튀었다
'좋았어! 그래도 근성은 있네!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이렇게 하는거야'
이렇게 생의 첫번째 선택은 어거지로 꼭두새벽부터 청와대 깨 부수려 온 북한 124군 부대 김신조처럼 빌어먹을 산명여대 비탈길을 뛰고 있었다
빌어먹을 왜 힘든데 상쾌한거야
왜! 통쾌한거냐고 소리지르며 묻고 있었다
망할놈의 츄리닝은 걸리적거려 접어도 접어도 흘러 내려 추운 날씨에 본의 아니게 반바지를 만들어 입어야 했다
또다시 진눈개비가 나리기 시작한 빌어먹을 날씨는
땀인지 입김인지 빨간 얼굴에 녹아내려 애써 참아온 눈물을 목덜미 흘러보내며 몰래 감춰주고 있었다
삶의 첫번째 선택을 축하해 주는것 처럼 점점 더 세차게 흩날리고 있었다
세번째 그림 마침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