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4일, 일>
짐작이 반이다
‘웃다가’라는 유튜브 방송이 있다. 아직 코너들이 완전히 자리 잡지는 못한 것 같지만, 주제를 쉽고 재미있게 접근하려는 방송 컨셉이 내 취향이다. 가끔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다룰 때도, 가볍게 볼 수 있을 만큼의 깊이로 다루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다양한 시각을 들어보려는 접근방식도 마음에 든다. 그래서 알림이 오면 가급적 챙겨보게 된다. 오늘의 주제는 ‘우리나라에서 남자가 더 힘든가, 여자가 더 힘든가’였다. 쉽지 않은 주제였지만, 역시나 유쾌하게 다루면서도 한번 더 생각하게 만들었다
어릴 적 나는 부친이 못마땅했다. 절대 권위를 지닌 가장이었고, 말은 곧 명령이었다. 따르지 않으면 뒤끝이 컸고, 실수는 인정하지 않고 고집으로 넘어가면서도 타인의 잘못은 기억날 때마다 되물었다. 치매로 기억이 흐려진 요즘조차 그런 기억은 까먹지도 않고 여전히 다시 꺼내곤 한다. 반면 모친은 참을 인의 표본 같은 분이었다. 지나치게 참아서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화병으로 병원에 다니실 만큼 고단한 삶이 안쓰러울 때가 더 많았다. 부모님만 보면, 여자가 훨씬 힘들어 보였다.
내가 본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아선호사상이 여전했기에 태어나면서부터 여성은 의문의 1패였다. 때문에 학창 시절에도 남자 비중이 여자보다 많았고, 회사에서는 남자가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심지어 여성은 대체로 계약직이나 비정규직으로 입사해 오래 버티기 힘든 구조였고, 결혼이나 출산은 퇴사의 이유가 되곤 했다. 급여와 승진의 차이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여자가 남자보다 살기 힘든 세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사회 경험이 쌓이면서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여성이 덜 힘들다' 라기보다는, 남자도 만만치 않게 버겁다는 말이다. 군대 같은 문제를 제쳐두더라도, 남자로서 감당해야 하는 사회적 압박은 나이가 들수록 커져만 갔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분명 높아졌지만, 반면에 남자에게 요구되는 책임은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도 같다.
연애만 하던 시기에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결혼 시기가 다가오면 남자로서의 압박이 느껴진다. 결혼 조건에서 ‘집’은 여전히 남자가 짊어져야 하는 경우가 많다. 월급을 꼬박 모아도 집을 마련하기는 어려운 시대다. 결국 월급은 당연하고 집안의 재산이 남자의 결혼 조건이 되어버렸다. 결혼 후에도 자격은 계속된다.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때로는 부모님의 자식으로서 짊어져야 할 무게감과 경쟁은 계속된다. 남녀평등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에게 더 주어진 기회만큼 기존에 남자가 가졌던 책임과 의무는 같이 줄어들었을까. 나는 의문이 든다.
결혼을 하고 가장이 되어보니 부친의 행동도 조금씩 이해가 된다. 권위적인 결정 뒤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우왕좌왕할 수 없고, 약한 모습을 보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가정적이지 못했지만, 휴일도 없이 일하며 가족과 친척들을 이끌었던 삶. 이제야 그것이 한 남자의 고군분투였음을 짐작하게 됐다. 그 부담에 비할 건 아니지만, 난 주어진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번아웃을 겪었다. 남자의 삶 또한 결코 쉽다고 말할 수 없다
내가 보고 느꼈던 것만을 기준으로 보면 남자가 여자보다 조금 더 힘들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더 힘들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난 남자고, 여자의 삶을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고충을 있는 그대로 느낄 방법이 없다.
노안이 와 보니 작은 글씨는 읽기가 힘겹다. 이제 안경을 벗거나 들어 올려서 글씨를 읽어야 한다. 어르신들이나 하는 줄 알았던 행동을 나도 모르게 따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예전엔 군에서 허리디스크를 호소하던 선임을 보며 꾀병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내가 허리 디스크로 고생하고 나니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겪어보기 전에는 모르는 것들이 많다. 여성으로서의 불평등과 불편함도, 남자인 나는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 안에서 생각의 틀을 만든다. 겪지 않은 일에 공감할 수는 있지만, 그걸 똑같이 느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래서 남자는 남자의 힘듦을, 여자는 여자의 힘듦을 이야기한다. 결국 이 질문은 ‘누가 더 힘드냐’가 아니라 ‘이성을 얼마나 이해하느냐’로, 나아가 '우리는 타인을 얼마나 이해하느냐'로 이어져야 할 질문이었다.
본가에 가면 모친과 누님은 부업이라는 것을 한다. 작은 플라스틱 소켓을 전선에 끼우는 일인데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도와드리려고 해도 소켓이 너무 작아서 손에서 자꾸만 떨어지고, 나도 노안 때문에 입구가 흐릿하게 보여서 짐작으로 끼워 넣어야 하는 일이다. 매번 몇 개 못 도와드리고 내려놓곤 한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런 부업은 하루 종일 한다 해도 큰돈이 되지 못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삶은 멈출 수 없고 돈은 필요하기에, 돋보기를 쓰고 얼굴을 찡그려가며 하고 있는 것일 테다. 그래서 그런 두 모녀의 모습을 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 경제적 도움을 드릴 처지도 아니라서 역시나 괜찮겠지 짐작만 하며, 난 죄송하고 안쓰럽게 응원할 수밖에 없다.
어른의 삶은 뭐 하나 명확히 떨어지는 정답이 없다. 내 마음조차 들쭉날쭉 해서 알 수 없을 때가 많은데, 타인의 마음이야 오죽할까.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온전히 알 수 없고 짐작으로 이해해야 하는 일 투성이다. 일상은 이렇게 소켓 하나 끼우는 일조차 짐작에 기대야 한다.
어른의 삶은 온통 그렇다. 짐작이 반이다.
<9월 15일, 월>
때 아닌 고드름이 열렸다
또 여름은 가고 난 머물러 있다.
얼마 전만 해도 덥혀진 등허리 열기를 식히려고 아침까지 뒤척이던 밤이었는데, 이제는 늦잠을 부르는 초가을이다
공원은 본격적으로 색을 입는 중이다
나무에서 떨어질 준비 서두르는 성급한 잎사귀 사이
나 같은 고드름
왜 뜬금없이 지금
왜 뜬금없이 이곳에
갈피를 못 잡겠다.
난 머물러 있고, 생각만 깊어간다.
<9월 16일, 화>
대신 슬프다
아침에 떠있던 해는 어디 가고
하늘이 내 기분 같이 변덕스럽다
마음 두드리는 굵은 빗방울 소리
창문틈 비집고 들어온 바람의 울음
번개 따라 우렁대는 하늘의 볼멘소리
그 소리 뒤섞여 요란하게 슬프다
울화통 터진 듯 쏟아지는 빗줄기
순식간에 사라진 구름 덮인 산
세상은 온통 불투명한 나 같고
하늘은 맹렬하게 대신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