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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파민을 포기할 수 없다

by 케빈은마흔여덟

<9월 17일, 수>

소소한 행복 하나

이제는 정말 탈탈 털렸다.
예금, 적금, 보험금까지 모두 깨졌고, 마이너스 통장 한도마저 다 채워버렸다. 돈이 나올 구멍은 하나도 없는데, 생활비는 여전히 빠져나간다. 불행은 꼭 한꺼번에 몰려온다더니, 돈 없을 때 TV까지 고장 나버렸다. 결혼하면서 장만했던 반려가전들이 하나둘 떠나간다. 다행히 아슬아슬했던 에어컨은 올해까진 버텨줬지만, TV는 끝내 떠났다. 몇 해 전 고장 났을 때 AS 기사가 “다음엔 교체하세요”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번엔 정말 소생이 불가능할 것 같다.


이제 집에서도 노안 때문에 안경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작은 스마트폰 화면에 의존해야 한다. 슬프도다. 믿을 건 진정 로또뿐인가.


800만 분의 1이라는 확률은 현실에선 거의 제로에 가깝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고 매주 로또를 산다. 한 주에 만 원, 1년이면 52만 원. 적지 않은 돈이지만, 그 돈을 모은다고 대단한 부자가 될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매주 희망을 품는다.


매주 낙첨 사실에 실망해서 그만둘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비용 대비 이만큼의 행복한 효용가치를 나에게 줄 수 있는 대체재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요즘은 당첨 여부를 한 주 늦게 확인한다. ‘관찰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말처럼, 낙첨되었더라도 내 주머니엔 아직 확인하지 않은 복권이 한 장 더 있다. ‘이러나저러나’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다행히 효과가 있다. 이제는 주말의 실망감이 줄었다.


서민들의 삶이 힘들어질수록 복권 판매액이 증가한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복권에 기대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다. 하지만 복권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면, 생활에 부담을 줄 만큼 과하지 않다면, 그리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 끼 식사가 만 원을 넘는 곳이 많다. 적당한 취미도 돈이 들지 않는 것이 별로 없다. 요즘 물가로는 만 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복권은 한 주 동안 기대할 수 있는 행복을 가져다준다. 당첨돼서 하고 싶은 것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일상 속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 나만의 행복해지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그래서 사행성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으로도 기꺼이 만 원을 투자할 생각이다. 덜컥 당첨되면 더 좋고 말이다.


한 뇌과학자는 말한다.
힘들고 괴로운 상황을 마주할 때,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자신만의 작은 행복을 많이 만들어 놓으라고. 소소하게 행복해지는 방법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 더 행복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예전엔 힘든 일상을 벗어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저 동료들과 진탕 술을 마시고 잠시 잊은 뒤, 다음 날은 취기에 다시 일을 하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쌓이고 쌓인 불행의 씨앗이 술을 양분 삼아 온몸에 퍼졌고, 죽어나가는 해마와 떨어지는 체력은 결국 나를 버티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젠 시간이 나면 달리고, 우울하면 우쿨렐레를 치고, 허전하면 책을 읽는다. 로또도 행복한 감정을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다. 뇌과학자가 말한 ‘소소하게 행복해지는 방법’이 이런 거라면, 나는 이제 제법 현실을 견뎌낼 방법을 찾은 것 같기도 하다.


그나저나 로또에 당첨되면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졌다. 이젠 TV도 사야 한다. 하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을 다 하려면 두 번은 당첨되어야 할 판이다.



<9월 18일, 목>

저평가가 아니고 노(No) 평가

유튜브 쇼츠에서 가수 타블로의 인상적인 말을 들었다.
“같은 생수 한 병도 편의점, 영화관, 축제에서 가격이 다르다. 그건 물이 달라서가 아니라, 위치가 달라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나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껴진다면, 위치를 바꿔야 할 때다.”


위치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듯, 나도 위치의 문제일까? 그렇다면 벗어날 수 있을까?

인상적인 말은 들을 땐 좋지만, 그걸 실제로 적용하고 실행하는 건 어렵다.
우리 같은 사람은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옮기려다가
오히려 더 나쁜 평가를 받을까 봐 걱정이 앞선다.


그런데 간과한 것이 있으니
난 지금 저평가가 아니라, No평가구나!




<9월 19일, 금>

도파민을 포기할 수 없다

나는 비쩍 마른 몸으로 살아왔기에, 다이어트하는 사람들의 고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좋게 말하면 우수한 체질이고, 나쁘게 말하면 연비가 좋지 못한 편이다. 많이 먹으면 많이 배출하고, 안 먹으면 금세 체중이 줄어든다. 그래서 20년 넘게 비슷한 몸무게를 유지해 왔다. 솔직히 말해, 체중 관리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다.


그런데 최근 불규칙한 식습관과 다소 과한 러닝 탓에 몸무게 앞자리 숫자가 바뀌고 말았다. 깜짝 놀라 폭식을 하면 역시나 다음 날 다시 빠졌고, 조금만 소홀하면 당황스러운 앞자리가 자꾸 눈에 띄었다. 조금 다르게 요요가 온 셈이다.


20년 넘게 유지해 오던 몸무게였고, 예전에는 운동하면 오히려 살이 붙었었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 생각하고 달렸건만,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무릎도 불편하고, 살도 빠지고… 달리기를 중단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이 됐다. 급기야 문득, 체중이 갑자기 빠지면 암을 의심해 보라는 말이 떠올라서 결국 검진을 받았던 거다.


지난주 검진에서는 위 내시경 결과만 들었다. 나머지 검사 결과는 한 주 뒤에 나온다고 했다. 혹시 이상한 질병이나 문제가 있을까 봐, 나는 그 한 주를 무겁게 기다렸다.


정상, 정상, 정상…
LDL 콜레스테롤 수치는 조금 낮은 편이니 운동을 계속하라고 했고, 엑스레이상 나타난 비활동성 폐결핵 소견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검진하면서 추적만 하라고 했다. (이 자국은 대략 15년 전부터 찍을 때마다 나왔던 것이다.) 위염약을 한 주 더 처방받고 진료가 끝났다.


병원을 나와 결과지에 나온 자료를 추가로 확인해 보니, 나는 그렇게 건강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혈관 나이는 실제보다 6살이나 어리게 나왔다. 전체 종합검진을 받은 건 아니었기에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최근 마음을 무겁게 했던 걱정이 한 방에 해소된 기분이었다.


체중이 빠지는 것이 어지간히 찝찝했었다. 게다가 무릎도 불편하니 러닝은 잠시 중단하려 했었다. 그런데 결과를 듣고 나니, 이런 숫자들은 결국 러닝의 효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긍정 회로를 돌렸다.
남들은 살 안 빠진다고 다이어트 하며 고생하는데, 체중 좀 빠지는 게 대수냐.
무릎도 주법 신경 쓰면서 무리하지 않는 슬로우 조깅으로 하면 될 일이다.
먹는 걸 조금 더 먹고, 달리는 건 조금 더 조심하면 된다.

땀 흘리며 터지는 도파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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