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같은 가을
<9월 29일, 월>
감정의 파도
높고 푸른 마음 고요하게 떠 있던 달
꿈을 품은 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어디로 가고, 어디쯤 와있을까
처음 가는 길, 잘 가고 있을까
툭, 던져진 상념은 쓰나미 구름처럼
삽시간에 나를 삼키려 덮쳐온다
두려운 막막함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나약한 나는 그저 시간에 기대어 선다
멀리서 비추는 빛, 나를 향한 위로일까
차가운 들숨, 오늘은 조용히 넘어가기를
<10월 10일, 금>
네 아빠보다 오래 살아야 할 텐데 걱정이다
어머니의 진료가 있어서 7시간이나 병원에서 같이 보냈다. 3개 과목 진료와 피검사를 했는데, 소요된 시간의 합은 고작 30분 정도였다. 의사들의 일정에 맞추고, 진료 전에 대기를 하고, 밥 먹은 시간까지 더하니 6시간 30분이었다. 손님이 왕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병원에서 만큼은 보통 환자가 '을'이다.
대부분은 앉아서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이었지만, 의미 없는 시간은 아니었다. 어머니와는 평소 진지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지 않다 보니, 그간 하지 못했던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중 몇 마디는 마음 깊이 남는 말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치매를 앓기 시작한 이후, 어머니와의 대화는 대부분 내가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과거 이야기로 채워졌지만, 이번에는 어머니 자신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순간들이 있었다.
"네 아빠보다는 오래 살아야 할 텐데 걱정이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구나. 아버지의 성격은 가족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우리 삼형제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한다. 아버지는 스스로를 잃어가는 와중에도 권위적인 태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몸과 마음이 불편해지면서 그 고압적인 모습은 더 심해졌다. 귀는 어둡고, 긴 설명은 이해하기 어려우니 먼저 화부터 낸다. 사실과 다르다며 장황하게 설명을 해도 돌아오는 말은 “뭐라고?”다. 힘이 빠지고, 결국 “예예”로 대화를 마무리하게 된다. 아버지와 오래 대화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아버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어머니. 본인이 없으면 가족들이 어떻게 될지 뻔히 아시기에, 더 오래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셨을 것이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도, 그 끝은 늘 외면이었다. 어머니가 오래 살아주시기만을 바라는 마음. 비겁하고 무능한 이기주의자 같은 생각이다.
짧은 문장으로는 내 감정을 다 담을 수 없다. 부모님을 사랑하고, 건강하게 오래 사셨으면 하는 마음은 변함없다. 하지만 부모님의 부재를 진지하게 상상해본 적이 없기에, 아직은 두렵고 그저 외면하고 싶은 막내일 뿐이다.
모친과 병원을 올 때면 부친을 모시고 병원에 가는 것과는 조금 느낌이 다르다. 부친의 병원에서는 측은한 의무감이 감돌지만, 모친의 병원에서는 이상한 한기가 더해진다. 두려움인지 긴장감인지 모를 감정이 온몸을 감싼다. 몸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오늘은 화장실을 다섯 번이나 다녀왔다.
다행히 오늘 진료 결과는 모든 과에서 호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진료실을 나올 때마다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어머니의 증상이 좋아진 것에 대한 감사함만은 아니었다. 그 인사는 나 자신에 대한 위로이자, 여러 감정이 뒤섞인 안도의 표현이었다.
어머니의 몸에 나타난 이상 증상은 아직 원인이 명확하지 않다. 참고 살아온 삶의 상처들이 이제야 곪아 터져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증상이 나아졌다고 하니 치료하고 약을 먹으면 되겠지만, 앞으로의 스트레스는 어떻게 감당하실까 걱정이 앞선다. 우리 가족은 아직 뚜렷한 대책이 없다.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오래 살아야 한다”고 하신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말이 어머니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생각하면 선뜻 맞장구를 칠 수도, 그렇다고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다.
지금의 나는 그저 무능한 불효자일 뿐이다.
<10월 15일, 수>
버려질까 두려웠을지도 모르겠다.
본가에 가니 아버지의 심기가 불편하다. 오늘은 주간보호센터에서 돌아오자마자 짜증부터 내셨다.
해가 짧아져 어두워졌는데 왜 집에 데려다주지 않느냐며 직원들과 크게 언쟁을 벌이신 듯하다. 아마도 직원들은 아직 퇴소 시간이 되지 않았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을 테고, 결국 아버지는 큰 소리를 치셨을 것이다. 안 봐도 비디오다. 머리에 뿔이 난 채 집에 돌아오셔서는, 재미도 없는데 왜 자꾸 그곳에 가라고 하느냐며 어머니께 또 성을 내셨다. 어머니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도 괜스레 미안한 표정을 지으셨다.
아버지의 짜증은 눈에 띄게 늘었다. 의사의 말처럼, 몸은 불편하고 머리도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으니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짜증을 받아내야 하는 사람이 어머니라는 사실이 대책 없이 답답하다.
조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지만, 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죽음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할머니는 오래도록 밭일을 하셨다. 시골에 내려갈 때마다 어딘가를 부지런히 다니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쉐쉐’ 하며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손을 놓지 않던 기억. 그러다 다리를 다치신 이후 거동이 불편해지며 치매가 찾아왔고, 그 후로는 다시 걷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서울 생활이 답답하다고 하셔서 우리 집에 모시지 못했고, 시골 작은집에서 여생을 보내셨다. 아버지는 그 일이 마음에 오래 남으셨던 것 같다.
외할아버지도 몸이 불편해진 후 우리 집에서 지내신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이 차이가 크지 않은 사위의 집은 아들의 집보다 더 불편했던 것 같다. 결국 외삼촌 댁으로 옮기셨고, 마지막엔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하셨다.
아버지는 어쩌면 자신도 시설에 버려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주간보호센터에 가자고 설득했을 때, “어디 데려다 놓고 오는 거 아니냐”고 하셨던 말이 떠오른다. 오늘처럼 어두워졌는데도 집에 데려다주지 않는다는 말은, 그곳에 그대로 남겨질까 두려웠던 마음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을 잘 모시지 못했다는 죄책감, 미디어에서 접한 버려지는 노인들의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자리했을 수도 있다. 나도 언젠가 버려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짜증으로 표출된 건 아닐까.
겨울이 다가오면 해는 더 짧아질 텐데, 매번 짜증을 부리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는 센터에 가지 않겠다고 하시면, 또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고 하루 종일 어머니께 부담을 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러나저러나 어머니의 고생이 눈에 선하다.
인생은 실전이라더니, 요즘은 정말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삶이란 정말 이런 것일까. 그저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