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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한계에 서서, 나를 묻다

- 나는 괜찮은 가장인가

by 케빈은마흔여덟

[현생에 치이다 보면 노력하기보다 무능을 자책하는 쪽으로 도망치는 게 편하다. 스스로 만든 우울함에 빠져 괜히 센티멘털한 척을 한다. 그러다가도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고 고대하던 콘서트에 가고 영화를 한 편 보면, 한번 사는 인생 열심히 살고 싶어 진다]

- 그깟 ‘덕질’이 우리를 살게 할 거야/ 이소담


나는 좋은 아빠일까, 괜찮은 가장일까.

가정을 꾸리며 수도 없이 되뇌었던 질문이다. 어느 날은 “이 정도면 잘하고 있어”라며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요즘처럼 무기력한 날엔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다. 나는 너무 이기적이었던 건 아닐까.


만약 게임처럼 우리의 ‘한계 게이지’가 눈에 보인다면 어땠을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면, 무리하지 않고 나를 지킬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우리는 한계를 넘는지도 모른 채 끊임없는 경쟁 속에 내던져진다.


'3당 4 락'이라는 말이 있었다. 세 시간 자면 붙고, 네 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뜻. 잠을 줄여가며 공부하라는 압박이었다. 밤샘은 미덕이었고, 코피는 노력의 증표처럼 여겨졌다. 성적이 낮으면 노력 부족이라며 자책했고, 선생님의 몽둥이찜질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성적표 나오는 날, 한 담임선생님은 자신의 키만큼 큰 몽둥이를 들고 교실에 들어왔다.

“몇 등 떨어졌어?”

“5등이요.”

“다섯 대.”

누군가 오르면 누군가는 떨어졌다. 허벅지에 든 시퍼런 멍은 ‘사랑의 매’로 둔갑했고, 누구도 그것을 폭력이라 부르지 않았다.


한계를 강요받으며 자랐지만, 되돌아보면 밤을 더 새웠다고 성적이 크게 달라졌을까? 기껏해야 한두 대 덜 맞았을 뿐이다. 그래도 나는 늘 ‘조금 더 할 걸’ 하고 자책했고, 덜 맞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사회에 나와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어른이 되면 다를 줄 알았지만, 오히려 더 교묘해졌다. 야근은 일상이었고, 술자리는 생존의 일부였다. 신입일 땐 열정으로 버텼고, 시간이 지나면서는 눈치와 요령으로 버텼다. 한계를 넘나드는 상황이 반복되었고, 그럴수록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나 자신을 몰아세웠다.


나이가 들수록 체력은 떨어졌다. 그런데도 링거를 맞아가며 버티는 선배들이 존경스러웠다. ‘프로는 저래야지’라는 생각이 당연하게 자리 잡았다. 그래야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문득, 질문이 떠올랐다. 대체 어디까지 해야 하는 걸까. 사회는 늘 ‘더, 더, 더’를 외친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 다른 몸과 다른 삶을 살아간다. 무조건 한계를 넘어야만 하는 걸까?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엄격하다. 학생 땐 부모와 교사의 기준이 있었고, 어른이 된 지금은 내가 만든 기준이 감옥이 된다. 반항심이라도 있었던 시절은 지났고, 이제는 기준에서 벗어날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린다.


한계를 넘으면 성과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을 잃을 수도 있다.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내 탓을 하게 되고, 잘돼도 여전히 불안하다. 그런 삶에서 끝없이 흔들린다.


그래서 결국 필요한 것은, 비교가 아닌 나만의 기준이다.


사람마다 체질도, 환경도 다르다. 어떤 이는 술 한 잔에 취하고, 어떤 이는 밤새 마셔도 멀쩡하다. 누군가는 야근을 즐기고, 누군가는 퇴근 후의 시간이 더 소중하다. 그럼에도 남의 기준을 나에게 들이댄다. ‘라떼는 말이야’ 같은 말들로. 하지만 남의 기준으로 내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기준을 높이다 보면, 끝내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한 나 자신만 탓하게 된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이 버거운가? 무엇을 감당할 수 있고, 어디까지가 진짜 한계인가? 나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계를 인정하는 용기.

태어난 조건은 바꿀 수 없다. 인생에는 뽑기 운도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내가 설정할 수 있는 기준이 분명히 존재한다. 어디까지 해볼지, 어디까지 참을지, 더는 용납할 수 없는 지점이 어딘지. 그건 남이 아니라 내가 정해야 한다. 가끔 비교는 동기부여가 되지만, 그 선을 넘으면 내 마음을 짓누른다. 미치지 못한 나에게 죄책감을 안긴다.


사용하는 물건들의 수명과 사용법이 다르다르 듯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사용 설명서가 있다. 그러니, 내 한계와 기준은 다른 누구 보다 내가 가장 잘 알 수가 있다.


성과도 중요하고, 돈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무너진다면, 그 성공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내가 없는 아이, 가장 없는 가족. 그건 결코 내가 바라는 삶이 아니다.


내가 살아야 남을 도울 수 있듯, 결국 사랑도, 가족도, 나 자신이 온전해야 의미가 있다. 그러니 먼저 나를 지키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고군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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