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승현 Jan 02. 2023

동시대 예술 01: 히토 슈타이얼

Between Atom and Bit, 경계를 가로지르는 통섭의 아티스트


1. 여는 글 : 질문으로 확장하기


우리는 ‘의문’에 인색하다.

   흔히 ‘진리’라고 부르는 것들의 실체에 다가가려 노력하지 않으며, 이를 무관심하게 맹신하거나 부역한다. 무관심의 방식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당대가 쏟아내는 이미지의 물결에 그저 휩쓸려 버린다. 그들의 신경 체계는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은 꿋꿋이 서 있음을 아무런 근거 없이 피력할 뿐이다. 실체를 알면서도 떠받치는 이들은 파도를 관망하는 이들이다. 다른 존재들이 어디로 휩쓸리든 간에 자신들만 거대한 배에 올라 살아가면 된다는 논리를 가진 이들이다.       

   그러나 가끔은 커다란 배의 구성원들이 자기모순에 빠져 암초에 부딪히기도 하고, 아예 다른 방향에서 더 큰 파도가 닥쳐오기도 하며, 휩쓸리지 않기 위해 뗏목 위에 올라 (위의 ‘두 부류’와는 다르게) 삶의 궤적에 ‘의문'을 투영하고 질문을 부르짖는 사람들의 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우리는 이를 역사 속에서 ‘변화의 모멘텀’이라 지칭하며, 그러한 특이점을 만드는 데 기여한 사람들을 혁명가라고 부른다. 
    예술은 언제나 (특이점 이후의 예측 불가능한 세계를 만들어내는) ‘특이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도구들 중 하나이다. 더욱이 시간의 흐름은 ‘표현’의 방법론을 다방면에서 풍부하게 만들었다. 끊임없이 불어나는 사회의 예측 불가능성으로 인해 질문의 ‘대상’이 늘어난 것이 한 측면이고, 회화와 조각으로 한정되어있던 질문의 ‘매체’가 기술의 고도화로 점차 확장되어 가는 것이 또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 예술도 열역학 제2법칙(‘고립계의 엔트로피는 줄어들지 않는다.’)을 거스르지 못하며, 동시대 예술은 복잡도의 기하급수적인 증가, 계속해서 꼬리를 무는 질문들, 끝없는 통섭의 연속, 이해 불가능성과 모순의 테두리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엔트로피와 함께 점점 그 영역을 확장하는 데이터의 바다에서 인간의 감각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려 노력하는 동시대 예술가들 중, 이 글에서는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 1966-)의 역할을 다각도로 조망해 보고자 한다. 또한 미디어, 이미지 그리고 기술이 ‘동시대 문명의 도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작가가 던지는 질문들을 하나씩 탐구해 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생성되는 새로운 질문을 통해 우리 인식의 체계를 확장하는 방법론에 대해 조금이나마 활자를 통해 펼쳐보고자 한다.


2. 데이터의 바다, 우둔한 수용


오늘날 데이터 흔적에 반영되는 삶의 표현들은 정보 생명장치가 관리하는, 
경작할 수 있고, 수확할 수 있으며, 채굴할 수 있는 자원이 된다 (히토 슈타이얼, 2021).


<소셜 딜레마>, 2020
다큐멘터리/다큐 드라마, 1시간 34분

제프 올롭스키, 넷플릭스 제공





   소셜 네트워크는 사용자의 삶을 데이터화(datafication)해 시스템을 유지하는 자원으로 활용한다. 그리고 데이터를 쉼 없이 섭취하며 자라나는 0과 1의 거미줄의 중심에는 데이터 분석 알고리즘이 있다. 그 존재가 인류 공동체에서 일으키는 참상을 서술하려 한다면, 넷플릭스(Netflix)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Social Dilemma를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사용자들이 플랫폼에 존재하는 시간들을, 그들의 일상에서 어떻게든 채굴하려 ‘애를 쓰는’ 알고리즘을 의인화한 장면은 이 매체가 제공하는 수많은 표현들 속에서도 가히 압권이다. 끊임없이 울리는 알림, 사용자의 관심사를 분석해 취사선택된 ‘맞춤’ 게시물과 광고들이 표시되는 피드(feed), IT 공룡들이 수익을 경작하는 방법을 ‘충격을 주기 쉬운 방식으로’ 묘사한다.



<미션 완료: 벨란시지>, 2019. 

단채널 HD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47분 23초.  

히토 슈타이얼, 조르지 가고 가고시츠, 

밀로스 트라킬로비치 제공.

글쓴이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히토 슈타이얼: 데이터의 바다> 전시에서 촬영.














   데이터의 바다가 사회 구성원 하나하나의 삶의 양상을 침식시키는 방식에 초점을 맞춘 앞의 작품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렉처 퍼포먼스(Lecture Performance) 영상 <미션 완료 : 벨란시지>는 (데이터가 흘러넘치는 대양(大洋)에서의) 파도의 형태에 주목한다. 데이터 분석 알고리즘이 사용자들의 관심사를 수확하고 재가공하여 만들어낸 패션 데이터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 영역으로 퍼져나가 독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벨란시지(Belanciege)’, 즉 발렌시아가(Balenciaga)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명품 브랜드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서 촉발된 국가 사회주의의 몰락에 발맞춰, 지금까지 30년 이상 자유시장 이데올로기, 포퓰리즘의 ‘융성’, 소셜 네트워크의 시대를 상징하는 하나의 패션 데이터로 작동하고 있으며, 서유럽과 동유럽, 패션계와 정치계 사이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 든다고 설명한다(국립현대미술관, 2022).

   발렌시아가는 소셜 네트워크에 연결된 수많은 사용자들이 자발적으로 밈(Meme)을 생성하게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밈을 활용하여 패션 디자인을 트렌드로 만드는 마케팅 전략을 취해(국립현대미술관, 2022) 초연결  시대의 새로운 ‘수익 증대’ 방정식을 개척해 냈다. 이러한 벨란시지 모델은 정치, 대중문화, 경제, 각 영역의 사정에 맞게 재편되어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끊임없이 생성되는 (정치, 사회, 문화적) 밈과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대중은 디지털 세계의 트렌드를 생성하는 재료가 되고, 그렇게 탄생한 트렌드는 정치적 이익과 상업적 수익으로 치환된다. 그렇게 발생한 정치적/금전적 재화는 밈의 근간을 이루는 ‘밈 데이터(Meme Data)’를 생성하는 데 활용된다. 이렇게 끝없는 0과 1의 순환은, 자본주의 사회의 새로운 무기 '벨란시지 알고리즘’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그 알고리즘은 현대인의 사고 체계를 지배하는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글쓴이가 말하는 밈 데이터란,
당대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가 가지는 콘텍스트(Context)의 커다란 집합을 의미하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집합의 원소들은 결국 다양한 형태의 재화와 권력의 힘을 빌려 탄생할 수밖에 없다.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두 작품의 하류(河流)를 따라가 보면 결국 비슷한 지점에서 끝을 맺는다. 데이터 기반으로 완전히 재편된 세계상 안에서 생산되는 메시지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말고, 사유의 주체가 되어 비로소 ‘수면’ 위에서 숨을 쉴 것을 촉구한다. 끝없이 닥쳐오는 본질에 관한 의문 앞에서 ‘질문’을 통해 숨을 깊게 들이쉬고, 자신만의 이성적인 답을 찾으며 천천히 내쉬는 것. 그리고 인간이라는 종(種, species)이 세상에 내놓는 다양한 표현들이 경작되고 수확되며 채굴되는 현실에 공동체 차원에서 어떤 방식으로 대응할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 이러한 것들이 현대 시민의 책무라고 이야기한다.


3. 치환되는 현실, 0과 1의 빈곤함


빈곤한 이미지는 움직이는 사본이다. 화질은 낮고 해상도는 평균 이하, 그것은 가속될수록 저하된다. 
빈곤한 이미지는 이미지의 유령, 미리보기, 섬네일, 엇나간 관념이다. 
그것은 떠도는 이미지로서 무료로 배포되고, 저속 인터넷 연결로 겨우 전송되고, 압축되고, 복제되고, 
리핑되고, 리믹스되고, 다른 배포 경로로 복사되어 붙여넣기 된다 (히토 슈타이얼, 2018).


   데이터 사회에서 원자(Atom)는 0과 1의 비트(Bit)로 끊임없이 환원된다. 0과 1로 겉모습을 바꾼 하나의 사물은 네트워크의 파도를 타고 당도하는 곳마다 그 형태를 달리 한다. 사회가 통념적으로 가지고 있는 디지털 이미지의 ‘완전한 복제’라는 허상과 다르게, 네트워크를 통한 이미지의 전달은 ‘압축’이라는 필연적인 손상을 수반하며 전송의 경우마다 그 객체의 속성은 다르게 설정된다. 왜냐하면 저장 공간과 전송 속도가 가지는 유한성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형태의 저장 공간(클라우드 서비스 포함)은 물리적인 한계를 뚜렷이 가지고 있으며, 전송 속도는 말 그대로 전송의 대상이 되는 이미지의 데이터량에 따라 결정된다. 네트워크 상에서는, 초연결 사회의 더 높은 가속을 위해서, 공유에 방해가 되는 ‘무거운 원본’은 자연스레 경시되고 손상을 감수한 저품질의 이미지가 다수(Majority)를 차지한다.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아톰 세계’에서의 이미지 위계질서는 비트의 세계에서 완전히 붕괴된다.


<11월>, 2004

단채널 디지털 비디오, 컬러, 사운드, 25분 19초

히토 슈타이얼, 앤드류 크랩스 갤러리,            

뉴욕 및 에스더 쉬퍼, 베를린 제공   

ⓒ MoMA






   

   슈타이얼이 ‘가속하며 이동하는 이미지’의 빈곤함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작품은 <11월>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한 ‘인물’이 어떻게 ‘빈곤한 이미지’가 되어 유통되는지,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가 생산될 수밖에 없는 복잡다단한 정치적 상황을 함께 보여준다. 이 인물은 작가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좌파 페미니즘 운동을 함께 했었던, 그리고 이후 쿠르드계 해방전선(PKK)의 일원이자 로나히(Ronahi)라는 쿠르드식 이름으로 저항 운동을 펼치다 결국 1998년 터키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안드레아 볼프’이다(최소영, 2021). ‘볼프 - 로나히’는 이 작품에서 세 가지 다른 역할의 인물로 재구성되는데, 하나는 1983년 슈타이얼이 17세 때 함께 만든 페미니즘 무술 영화에서 남자들과 난투극을 벌이는 페미니스트 전사로, 또 하나는 1990년대 아랍 위성방송 인터뷰에서 저화질의 (그리고 점차 저하되는 픽셀의) 영상 이미지로 등장하는 쿠르드 자유 여성 군대의 무장 저항군으로, 마지막에는 독일에 거주하는 쿠르드족의 반(反) 터키 시위 포스터에 순교의 아이콘으로 재탄생한 게 그것이다(국립현대미술관, 2022). 그러나 여러 채널을 통해 숭상되는 ‘인물’의 이미지와는 달리, 그의 시신은 수습조차 되지 못했다. 완전히 비가시적인 영역에 놓여 버린 그는, 이미지 전송의 가속과 특정 정파의 정치적인 욕망으로 인해, 어느 인물보다 빈곤한 방식으로 재활용되고 있다.



<태양의 공장>, 2015

단채널 HD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발광 LED 그리드, 의자, 23분

히토 슈타이얼, 앤드류 크랩스 갤러리,
뉴욕 및 에스더 쉬퍼, 베를린 제공

ⓒ Google Arts & Culture




   <11월>이 끊임없이 복사되면서 화질이 떨어지는 ‘빈곤한 이미지’의 생성과 실존, 그리고 가속되는 전파에 대해 다루었다면, <태양의 공장>은 현실 세계의 육체노동이 데이터 노동으로 치환되는 데이터 사회의 세계상을 담고 있으며(국립현대미술관, 2022), 그 자체로 Atom의 Bit화, 현실의 움직임이 데이터로 치환되는 과정을 상징한다. 작품의 제목 ‘태양의 공장’은 이 영상의 주인공이자 내레이터인 율리아가 모션 캡처 스튜디오에서 제작하고 있는 게임의 이름이다. 영상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스튜디오 노동자들로, 강요당한 그들의 춤 동작은 모션 캡처 수트에 부탁된 센서를 통해 컴퓨터로 캡처되고 데이터로 전환되어 게임과 애니메이션 등에 활용된다(국립현대미술관, 2022). 그렇게 탄생한 수많은 데이터 이미지, 일명 ‘밈’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폭발적으로 순환된다. 또한 0과 1의 공장에서 그들의 행위가 ‘인공적인 햇빛’이라는 상품으로 재탄생하는 모습을 보여주며(안미희, 2019), 관람자로 하여금 동시대 데이터 사회의 노동이 어떤 양상을 띠고 있는지 저절로 생각하게 만든다. 또한 화면에 등장하는 ‘이것은 게임이 아니다. 이것은 현실이다.’라는 문구는 Bit의 공간이 정치, 문화, 사회, 경제, 노동, 예술 등으로 대표되는 Atom 세계의 인간 사회를 단순히 대체하는 대리물로서 작동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또 하나의 현실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11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슈타이얼의 두 작업이 결부되는 지점은
바로 데이터 사회의 ‘치환’과 ‘가속’이라는 속성에 존재한다. 


   삶이 내놓는 수많은 표현들을 경작하고 수확하는 현실에 덧붙여, ‘존재하지 않는 실체’에 대한 무관심과는 별개로, 가속화되는 데이터 흐름 속에 (실체가 무수히 복제된 결과로) 탄생한 이미지에 대해 이루어지는 경외, Bit가 지니는 태생적인 결함과 폭발적인 데이터의 빈곤한 순환을 보여주는 데 있다. 그리고 결국은, 데이터 사회에서 살아가지만 ‘어쩔 수 없이’ Atom으로 구성된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실재했던’ 실체의 끊임없는 재가공을 통해 0과 1의 상징으로만 남게 된 한 ‘인물’의 이야기. 생산 과정 자체가 만족감을 담보한다는 이유로, 밈을 생산하는 데 터무니없는 저임금으로 착취되는 ‘비물질 노동자’들의 이야기. (미술관은 또 다른 방식의 공장이며 거기서는 새로운 방식의 생산과 착취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미술관 노동 역시 ‘비물질노동’으로 규정할 수 있으며(최소영, 2021), 그들은 “영혼을 노동하도록 배치한다(프랑코 베라르디, 2022).”) Atom 세계의 헤어 나올 수 없는 물질적 불평등에서 벗어나, Bit 세계에서 비물질적 풍요와 진정한 존재들의 평등을 이룩하고자 하는 노력, 근대가 시작되며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에 부여한 노동의 신성함, 한 사회가 큰 족적을 남긴 인간을 대우하는 전통적인 방식에 대한 데이터 권력의 도전을 조명한다.


4. 닫는 글 : 정치적으로 사고하기


   인간은 0과 1을 만들었으나, 0과 1은 마침내 사회를 구성하고 인간을 이에 귀속시켰다. Bit가 본래 부여했던 평등은 다시금 자취를 감춘 세상에서, 귀속된 인간들은 누군가에 의해 계속되는 착취를 견디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자신의 저작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Atom 세계에서 자연은 인류 모두에게 평등을 선사했으나, 인류 스스로가 자신들 사이의 불평등을 초래하였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Bit 세계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Atom 세계에서 존재하는 ‘사회적 불평등’은 Bit 세계의 ‘자연적 불평등’이 되어 0과 1의 특성에 맞춰 사회 구성원 간의 격차를 심화시켜 왔다. 그리고 그 격차는 데이터를 ‘무질서화’시켰다. 통제되지 않으며 방향을 잃은, 그저 ‘욕망에만 충실한’ 데이터들은 끊임없이 재가공되어 사람들의 인식 체계에 스며들었다.


   무질서는 인간의 통제 밖에 존재하며, 무질서도, 즉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에 인간은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둔다. 그러나 그 속력을 현대 인류가 감당 가능한 수준으로 조정할 수는 있다. 인류는 그들의 역사에서 여러 번 존재했던, 엔트로피 증가의 ‘순간 속력’이 너무 높아 공동체가 수용하기 힘든 수준의 혼란이 빚어졌을 때에도, 선의를 가진 다수가 ‘정치적인 행동’을 취하며 이를 끌어내렸던 경험이 있다. 예를 들어, 대공황 직후의 서구 자본주의 사회는 (마르크스도 지적한) 여러 가지 구조적인 문제를 드러내며 그 혼란상이 극에 달했다. 그러나 케인스주의의 대두, 노동자의 처우 개선, (바이마르 헌법을 시초로 하는) 기본적인 사회보장 제도 마련 등의 사회주의적 요소를 일부 끌어안으며, 커다란 병폐를 극복한 경제 체제가 지금까지도 큰 틀에서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거시적인 관점은 물론이거니와, 국민국가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민주화의 물결, 반전 운동, 환경 운동 등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모두 인간이 ‘정치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들이다.


글쓴이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타인이나 다른 조직의 어떠한 위협도 받지 않고 가치의 분배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성찰하며 내보일 수 있게 문명이 발전시켜 온 시스템”
이라는 관점에서 현대의 정치를 바라본다. 


   과연 데이터 사회에서 그러한 위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데이터 사회에서 인간의 표현은 채굴되며, 데이터 알고리즘은 채굴된 데이터를 가지고 특정한 콘텐츠를 경작하고 수확한다. 그렇게 생산된 경작물은 인간의 사고를 구성하는 식량이 된다. 실체는 경시되고, 무제한으로 재생산된 이미지만이 인류가 성찰할 수 있는 것이 되며, 사회적 가치를 분배할 권리는 소수에게 되돌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민주적인 인류 공동체는 데이터 사회가 가져야 할 도덕성의 준칙에 대해 고민해 보아야 한다.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끊임없이 사유하는 것이, 실체를 경시하지 않는 태도가, 인공지능 시대에 맞서 더 이상 노동을 통해 인간의 존엄을 규정하지 않으려는 사회적 합의가 절실하다. 슈타이얼은 ‘빈곤한 이미지’의 점령과 데이터 사회의 착취를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다(최소영, 2021). 즉 “우리가 점령해야 할 공간은 어디인가(히토 슈타이얼, 2018).”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답은 위의 준칙을 데이터 사회의 헌법으로 규정하고, 민주적인 권력이 데이터 사회를 통치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글쓴이의 생각이다.


참고 자료

국립현대미술관. (2022). 히토 슈타이얼-데이터의 바다 전시 가이드[팜플렛].

국립현대미술관. (2022). 히토 슈타이얼-데이터의 바다 오디오가이드 스크립트.

안미희. (2019). 포스트인터넷 예술에서 이미지의 생성과 순환 - 히토 슈타이얼의 작품 <태양의 공장>을 중심으로. 유럽문화예술학논집, 10:1, 41-54

최소영. (2021). 포스트 디지털 시대의 예술과 이미지 연구 - 히토 슈타이얼의 ‘빈곤한 이미지’ 개념을 중심으로. 인공지능인문학연구, 7, 171-193.

프랑코 베라르디. (2012). 노동하는 영혼: 소외에서 자율로. (서창현 옮김). 갈무리.

히토 슈타이얼. (2018). 스크린의 추방자들 (김실비 옮김). 워크룸 프레스.

히토 슈타이얼. (2021). 면세 미술 : 지구 내전 시대의 미술 (문혜진, 김홍기 옮김). 워크룸 프레스.



작가의 이전글 에세이 01: 아침의 향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