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색을 입히는 수만 가지의 향.
삶은 기억의 연속이다. 기억의 나열은 인생의 궤적을 그려내고, 감각은 이에 색을 덧입힌다. 프랑스의 소설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는 주인공 마르셀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먹고 어린 시절의 회상에 잠긴 모습이 묘사된다. 수북하게 쌓인 검댕이 속, 햇빛도 받지 못한 채 머릿속 작은 다락방에 쌓여 있던 기억에, 먼지를 걷어내는 바람을 불어주는 건 인간의 감각이다. 음식을 느낀다는 행위는 흔히 미각에 한정되어 서술된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단순히 음식을 ‘섭취한다’에 포커스를 맞추기 때문이다. 하지만 (*) 촉각, 청각, 통각, 그리고, 어떤 감각보다 기억을 더 오래 각인시킨다는 후각까지, 우리는 음식을 기억하는 데 오감을 사용한다.
2001년,
필라델피아에 있는 미국 모넬화학감각센터의
헤르츠(Rachel Herz) 박사팀에 의해 입증되었다.
연구팀은 사람들에게 사진과 특정 냄새를 함께 제시한 뒤,
나중에는 사진을 빼고 냄새만 맡게 하였다.
그 결과 냄새를 맡게 했을 때가 사진을 보았을 때보다
과거의 느낌을 훨씬 더 잘 기억해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과의 향기란 내게 아침의 향기로 기억되어 있다. 매일 아침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애국가를 BGM으로 삼고 하루를 시작했던 유년의 향기. 하늘에서 뿜어내는, 동향(東向)의 창틀로 엿보는 일출의 향기. 그 누구보다 일찍 하루의 여정을 준비하시는 할아버지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주셨던 따뜻한 향기. (할아버지는 그 연세에도 겨우 몇 년 전 회사에서 은퇴하셔서, 지금은 또 다른 일을 하고 계신다.) 작은 마을을 감싸는 숲의 향기. 그저 머릿속 텍스트로만 존재하는 색칠되지 않은 기억들. 모두 깊은 밤의 공기에 익숙해진 지금으로서는, 신도시의 고향 잃은 나무, 기계로 흘러가는 물줄기, 콘크리트 냄새에 무뎌진 지금의 후각으로선 도저히 맡을 수 없는 향기들이다. 그러나 사과의 향기는 아직 맡을 수 있기에, 갓 미취학 딱지를 뗀 그때의 기억은 붉은 수채물감으로 옅게 칠해져 있다.
태어나서 10년 가까이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엄마와 아빠는 내가 세상에 나온 뒤에도, (과거보다는 비교적 긴) 지금과 달리 출산휴가를 거의 보장받지 못하고, 빠르게 일터로 나서야 했다. (다니던 회사가 대기업임에도 말이다. 엄마는 양수 터지기 며칠 전까지 회사에 나갔다고 한다.) 주말마다 엄마와 아빠가 지내는 철산동에서 이틀 밤을 보내는 게 전부였다. 대부분의 시간은 할머니와 함께 소하동에서 보냈다. 그곳은 지금 생각하면, 꽤 특이한 동네였다. 마을 중앙을 가로지르는 4차선 도로 양옆으로는 지극히 평범한 벽돌식 건물들, 골목 사이사이로 들어가면 분식점과 문구점, 작은 놀이터들, 학교의 널찍한 운동장, 곳곳에서 뛰노는 친구들 그리고 이 모두를 감싸는 뒷산. 겨우 막 1m 높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나로서는 이 동네, 충분히 큰 놀이동산이었다. (이때의 기억 때문에 빽빽하게 늘어선 신도시 아파트들은 진절머리가 난다. 지금의 삶이 그런 곳에 놓여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갈색 벽돌의 주택이 늘어선 좁다란 골목들이 나에게는 훨씬 정감이 간다. 어쩌면 한옥 마을 보다도 더.) 그리고 매일 찾아가는 그곳에는, 아침마다 웰컴 드링크가 놓여 있었다. (호텔도 아닌 곳에 말이다.)
아침에는 항상 내가 먼저 눈을 떴기에, 할머니를 깨워 드리는 건 나의 첫 일과였다. 10시에 겨우 눈에 빛을 들이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할머니께서는 눈을 뜨시면, 제일 먼저 김치냉장고에서 사과와 당근을 꺼내 겉을 다듬고, 물로 헹구셨다. 나는 그 타이밍에 맞춰 아침 뉴스를 틀었다. 땅속의 열매와 나뭇가지를 지탱하는 뿌리가 강판 위를 움직이며 눈물을 짜낼 때쯤,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할아버지의 소리다. ‘벅—벅—벅—벅’ 거칠고 투박한 소리 위를 감싸는 부드럽고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 그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사라져 갈 때쯤 들리는, 주스가 담긴 그릇이 식탁에 내려앉는 흰소리. 그릇에 코를 대면, 밀려오는 달콤한 사과와 쌉싸름한 당근의 향기. 입 안을 깨우는 과일과 채소의 기적 소리. 목에 한 모금 한 모금 들이킬 때마다 온몸에 퍼지는 따뜻한 아침의 향기. 힘에 겨웠든 즐거웠든, 울음에 밤을 지새웠든 어제를 지나, 또 다른 하루에 온 것에 감사한다며 건네는 환영의 인사. 일찍 일어난 새가 느낄 수 있던 아침의 특권이었다.
지금 사는 곳으로 전학을 온 후 엄마에게도 똑같이 해달라 떼를 썼지만, 만들어주신 건 그때 그 주스가 아니었다. 레시피는 다를 게 없었다. 과채를 강판에 갈아 착즙 하는(팔은 조금, 많이 아프지만) 매우 단순한 방법이기 때문에 요리의 ‘ㅇ’ 자도 모르는 나조차도 쉽게 해 볼 수 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착즙기로 한다 해도 ‘미각’ 하나에서는 크게 차이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주스를 느끼는 데 많은 감각을 동원했던 나로서는, 그때의 감각을 다시 찾아내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지워내기 힘들다. 그런 향기를, 시간을, 그리고 사람들을 돌려내기엔 호모 사피엔스의 능력이 너무나 미천하다. ‘사과의 달큼한 향기’로부터, ‘당근의 쌉싸름한 맛’으로부터 유년의 기억을 겉핥아볼 수는 있겠다.
그러므로 이 글은 맛이라는 추억을 기록하기 위해, 옅은 수채화 위에 텍스트로 덧입혀진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