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적인 공간에 대한 윤리

250420

by 케비놀로지

공간은 중립적이지 않다.


바야흐로 2025년, 원시림이 아닌 다음에야 이 땅 위에 모든 공간은 조용히 입장을 갖는다. 사용자의 습관, 고집, 체온, 말투, 침묵, 물건을 놓는 방식, 그 모든 것이 겹겹이 쌓인다. 공간은 그것을 축적한다. 쌓인 시간은 중력을 얻고, 공간은 존재를 품는 장이 된다. 단순한 평면이 아니라 선택이 남는 아방가르드한 텍스쳐_ 그 선택에는 윤리가 따라붙는다. 공간의 윤리란, 그곳이 과거를 어떻게 견디고 현재를 어떻게 허용하는지에 대한 태도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방 역시 그런 방식으로 윤리를 갖게 되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조용히.


이 집으로 이사 왔을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그전에 살던 햇빛이 쉬이 찾아오지 못하던 방보다 두 배를 훌쩍 넘게 컸고, 창은 큼지막했다. 그 방은 당시엔 그저 ‘주어진 장소’였다. 내 선택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그 시절 이 방은 아직 어떤 윤리도 가지지 않은, 말하자면 아직 이름이 붙지 않은 공간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무렵, 어머니가 방을 리모델링하시면서 내게 벽지를 직접 고르라 하셨다. 그건 뜻밖의 기회였다. 나는 그때의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꾸미고 싶은지조차 명확히 알지 못했지만, 무심한 듯 당연하게 도시 일러스트 벽지를 골랐다. 취향도 독특하셔라, 열여덟 살의 성빈아.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선택은 당시 내 세계에 대한 감정적 태도였다. 나는 도시를 동경하는 양평 촌놈이었고, 높은 건물과 널찍한 아스팔트 도로, 단정한 구조와 환상적인 조명에 매혹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고른 벽지엔 국회의사당, 63빌딩, 남산타워, 예술의 전당, 코엑스... 서울의 다양한 건물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줄지어 서 있었다. 세 면은 낮이었고 한 면은 밤이었다. 도시의 얼굴은 각기 다른 빛으로 발현되었다. 나는 그 벽지들이 벽에 붙여지고 나서야 내 방을 비로소 처음으로 “내 것”이라 느꼈던 것 같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나는 이 방을 떠나 다른 도시들을 떠돌며 지냈고,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이 방에 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온 방은 내가 남겨둔 거의 모든 것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책상, 장롱, 피아노, 어느 것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건 시간이 멈춘 상태 같기도 하고, 마치 누군가가 나를 위해 이 공간을 고이 보관해 두었던 것 같기도 했다.


실제로 그렇기도 한 것이, 어머니는 이 방을 손대지 않았다. 남겨진 자리들을 허물거나 새롭게 정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두었다. 그 선택은 조용하지만 깊은 의미를 가졌다. 누군가의 시간을 없애는 대신 보존하는 결정을 내리는 일. 그것은 단순한 존중을 넘어 기억을 품는 방식에 대한 윤리였다. 누군가의 자리를 그대로 두는 일은 그 사람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수많은 계절을 돌고 돌아서 고향땅으로 돌아왔을 때, 이 방은 어머니 기준의 윤리로 먼저 채워져 있던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처음 돌아왔을 때 이 공간이 낯설게 느껴진 것이 그 때문이지 않았을까. 분명 내 것이면서도 내 것이 아닌 것 같았고, 익숙하면서도 머물기 두려운 장소 같았다. 나는 책상 위를 비워두었고, 책장은 텅 비어 있었다. 수상했던 상패들, 입시생 시절부터 시작된 이론서들, 그리고 스스로 찾아 읽던 모든 책들, 모두 2층 거실 한쪽 구석에 짱박혀 있었다. 그것들을 다시 방 안으로 들이는 것이 마치 내 과거를 과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공간을 채운다는 일이 무언가를 ‘보이기 위한’ 행동처럼 여겨졌고, 나는 조심스러워졌다. 그렇게 책장을 비워둔 채 몇 달이 흘렀다. 나만 알고 있는 고요한 침묵이 방 안을 꽤나 오랜 기간 동안 감쌌다.


그 침묵은 어느 한겨울날 아침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별다른 계기 없이 나는 그날 조용히 일어나 2층 거실로 올라갔고, 먼지가 묻은 상패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곤 방으로 올라가 책장의 첫 칸에 조용히 놓았다. 그다음은 의외로 빨랐다. 책 한 권, 또 한 권, 차례로 손에 쥐고, 가볍게 먼지를 털어내고, 제자리에 꽂았다. 그건 일종의 순례 같기도 했다. 돌아온 것들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보내주는 의식. 나는 그것들이 무겁지 않게, 아주 자연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 공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도 이 방을 다시 채울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창도 그 사이에 새로 손을 봤다. 커다란 창문에 맞춰 내가 직접 블라인드를 달았다. 줄을 잡아당기면 빛이 사선으로 떨어졌고, 바람은 아침마다 조용히 들어왔다. 창가에는 긴 선반이 놓여 있다. 그 위엔 작은 약통들과 물병, 수건, 립밤, 잡다한 것들이 흩어져 있지만 이상하게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 선반은 나의 일상적인 정돈의 방식이다. 굳이 거창하게 말하자면 이 공간의 생활윤리랄까. 정리정돈이 목적이 아니라, 생활의 리듬을 만들기 위한 방식. 그 뒤로는 창크기와 딱 맞는 화분이 하나 놓여 있다. 레몬밤. 다글다글 소란스럽게도 올라오는 새싹들. 매일 아침마다 나는 그 화분을 들여다본다. 어느 여름날, 바람이 불 때마다 내 방을 훑고 지나갈 시트러스 향을 기대하며. 그리고 그 다정한 기다림이 이 공간에 생기를 더한다.


음악이 업이 될지 몰랐던 시절부터 나와 동행해 온 피아노 위에 이것저것 올려놓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수집하기 시작한 포켓몬 인형들. 그 시절의 나는 어디를 가도 인형 뽑기 기계를 찾았었네. 그치. 어떤 애는 복슬복슬하고, 어떤 애는 색이 바랬고, 어떤 애는 아직 포장도 뜯지 않았다. 이제는 창고 깊숙한 구석에서 잠들어있던 그 인형들을 꺼내어 다시 피아노 위에 올려두었다. 그건 삼십 대 중반에 포덕질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나에게 선언하는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것을 다시 곁에 두는 일. 단순하고 조용한 회복이었다.


피아노 뒤로는 큰 화이트보드가 있다. 그 위엔 함께 발맞춰 걸어온 이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찍은 사진들과 마그넷들이 가득 붙어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여행을 갈 때마다 하나씩 모아 온 것들이다. 푸껫, 파리, 로마, 암스테르담, 뉴욕, 보스턴 타이베이, 그리고 서울역, 부산역, 대전역 등등. 국경을 넘나든 기억도 있고, 기차표가 눅눅해지던 한겨울 여행도 있다. 그 마그넷들을 다시 꺼내 붙이면서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을 하나씩 되짚었다. 비닐봉지 속에 밀봉하여 근 20년 가까이를 창고 깊숙한 곳에 넣어둬서일까. 모든 것이 소름 끼치도록 거의 처음 그대로였다. '직사광선을 피하고 서늘하게 보관'해야 할 것은 우유뿐만이 아니구나. 추억도 서늘하게 보관해야겠지. 이 퇴적된 추억들은 내 과거의 이동 경로이자 감정의 궤적이다. 그 조각들이 지금 이 방 한편에서 조용히 나를 지켜본다. 마치 내가 언젠가 다시 기꺼이 떠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처럼.


이 방은 이제 나의 윤리적 선택들로 가득하다. 무엇을 남겨두었고 무엇을 다시 꺼냈는지가 이 방의 윤리를 만든다. 어머니가 부여한 윤리가 이 방을 지켜냈다면, 지금은 내가 그 윤리를 이어받아 조금씩 덧붙이고 있다. 그건 위대한 선언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반복에서 드러난다. 매일 똑같은 블라인드를 올리고, 매일 같은 선반 위의 물건을 쓸어내리고, 인형의 먼지를 털고, 마그넷을 정렬하는 일들. 그러니까 이 방의 윤리란 지워지지 않은 것들을 다시 '제대로' 살아가려는 다정한 시도이고, 사라지지 않은 것들과 함께 숨 쉬는 태도이다.


무엇보다 이 방은 더 이상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과거를 저장하면서도 현재를 열어두고 있다. 나는 이 방에서 다시 음악을 시작했고, 건반 위에 손을 얹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블라인드를 위로 걷어내면 햇빛과 봄바람이 함께 내 손등 위에서 노닐다 간다. 여전히 조용한 날들이 많고, 허무하게 하루를 끝내는 날도 있지만, 나는 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에도 이 방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존재를 받아들이는 공간 그 자체의 시선은 때로는 사람보다 더 따뜻하다.


이 방은 나를 다시 숨 쉬게 만든다. 어딘가 무너졌던 마음도, 소리 없이 사라졌던 시간도, 이 방 안에서는 아주 작은 물건 하나로 되살아난다. 햇살이 레몬밤 새싹을 흔들어 깨우고, 가구들이 나를 묵묵히 지켜보고, 다양한 마그넷들이 고요하게도 시끄러운 이 공간은 이제 나에게 아주 명확하고 직설적인 언어를 건네는듯하다.


“괜찮아, 살아 있어.”


나는 그 말을 나의 삶의 조각에 기대어 들으며, 오늘도 이 방 안에서 천천히 일어난다. 그리고 창을 열고, 다시 블라인드를 걷는다. 눈부신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바람은 언제나 그랬듯이 미소 띤 입꼬리에 조금 먼저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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