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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빈 May 28. 2022

 술이 마취제라는 걸 알았을때 내 곁엔 아버지가 없었다

<7화- 텃밭 가꾸기를 시작하고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곡성에서 맞이한 첫 한 달은 새로운 집과 달라진 업무에 적응하느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하루하루가 쌓여가고, 그 시간이 약이 되어 몸과 마음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되니 가장 먼저 마당에 방치된 밭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 시간 사람의 손길을 받지 못해 억센 풀들로 뒤덮인 땅이었다.


여름에 바다로 가서 서핑을 하고 겨울에 스키장에 가서 보드를 타야지, 여름에 스노보드를 타려 하고 겨울에 서핑하려고 하면 인생이 좀 고달플 것 같다. 뉴욕이 아닌 곡성에서 가질 수 있는 값진 경험들 중 내 손으로 땅을 갈고, 모종을 심고, 꾸준히 관리한 후 수확해 먹어보는 텃밭 가꾸기만큼 적절한 것이 또 있을까? 리틀 포레스트를 보며 얻은 영감과 어릴 적 품었던 꿈 그리고 세상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진 성향이 합쳐져 텃밭 가꾸기를 시작했다.


전&후

집주인 아저씨로부터 텃밭을 마음껏 사용해도 된다는 대답을 받고 무성하게 자란 풀부터 빼냈다. 아무렇게나 뒹구는 나무들을 정리하고, 땅을 삽질하며 그 안에 박혀있는 커다란 돌들을 골라냈다. 그 위에 식물성 유기퇴비를 뿌리고 두둑을 만들어 작물을 가꾸고 있다. 강렬한 햇빛 아래 땀을 분수처럼 흘리며 삽질하고, 작물을 심고 보살피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수십 가지의 갈래 중 가장 깊숙한 것이 바로 ‘아버지에 대한 이해’였다. 아버지가 왜 항상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이었다” 말했는지, 왜 그토록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왔는지 아버지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다.


먼저 농사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기본적으로 너무나 정직한 행위이다. (현대적 농사와 원시적 농사는 완전히 다르다. 40년 전의 아버지도, 나도 가장 원시적 방법인 ‘사람'을 통해 농사를 지었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는 원시적 농사를 기준점으로 삼고자 한다.) 한 사람이 한 시간에 해낼 수 있는 노동량이 딱 정해져 있다. 아무리 힘이 좋고 효율적으로 일한다 한들 소의 힘과 말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거기에다 시공간의 제약까지 받는다. 전 세계 어디서나, 24시간 중 내가 하고 싶을 때 일할 수 없다. 항상 그 현장에 가야 하고 해가 뜨고 지는 자연의 흐름에 순응해야 한다. 해가 뜨더라도 대낮에는 너무 뜨거워 위험하다. 극적인 예로 21세기 전 세계에 흩어진 5만 명의 메타(페이스북) 직원은 전 세계에 살고 있는 수십억 인류가 사용하는 서비스를 만들지만 20세기 전 세계 흩어진 5만 명의 농부들은 자기 주변의 5만 명만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생산할 수 있었을 것이다.


10품종, 20가지 종류


행위의 정직함은 고됨으로 이어진다. 삽질 영상을 가족들에게 보내니 아버지가 이런 말을 보내셨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술을 드시는 이유를 몰랐는데 직접 농사를 지어보니 술이 술이 아니라 마취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땐 내 곁에 아버지가 없었다네" 수많은 것들이 꾹꾹 담겨 있는 이 문장은 참으로 묵직하게 다가왔다. 농사는 맨 정신으로 할 수 없구나부터 부자의 관계까지 돌아보게 되었다. 아버지도 누군가의 아들이었지, 아버지도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는 아버지가 있겠구나. 그리운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마취제의 힘을 빌리기 위해 술을, 그것도 50도짜리를 마셨다. 하지만 이마저도 땀이 배출되는 속도가 너무 빨라 취기가 올라올 틈이 없었다.


내 곁에 아버지가 없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가 절로 나오는 순간들이었다. 농사를 천시한다는 것이 아니다. 허리 숙인 만큼, 땀 흘린 만큼, 딱 투입한 만큼만 나오는 결과물에 이마저도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 어린 아버지의 눈으로 세상을 잠시나마 바라보았던 것 같다. '그 어린 시골 소년은 이 행위들을 하면서 어떤 각오와 다짐을 했을까?' 그 시골 소년이 아버지가 되고 그의 아들이 똑같이 땀 흘리며 농사를 지으면서 여러 감정과 생각을 느끼는 과정 자체가 굉장히 신비로웠다.


아버지의 어머니인 시골 할머니의 삶도 그려보게 되었다. 시골만 가면 가족 다 함께 새벽부터 일어나서 일하러 갔다. 어릴 적의 나는 시골만 오면 일해야 하는 게 너무나 싫었다. 텃밭을 직접 가꾸고 있는 지금, 그 순간을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농사가 고되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한 명이서 하면 끝도 없지만 여럿이 함께하면 금방 끝나는 농사. 연로한 할머니의 일손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기 위해서 우리의 손을 빌렸던 것이다.


아버지라는 사람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부자 사이에 함께 이야기할 수 있고 공유할 수 있는 취미와 관심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몇 주 전 곡성에 부모님이 놀러 오셔서, 회사 대표님과 이야기를 나누셨다. 아버지는 아들이 텃밭 가꾼다는 걸 자랑하시고, 어머니는 아들이 텃밭 가꾸기를 시작한 후로 살 얼음판을 걷고 있던 부자 관계가 너무 좋아져서 참 행복하다고 했다.     


가난한 시골 농부의 아들로 자란 아버지는 지금도 취미로 텃밭 농사를 하고 계신다. 반대로 나는 배경지식이 전무하기에 두둑을 어떻게 세우는지, 어떤 작물을 심으면 좋을지, 어떻게 관리해주어야 하는지 끝없이 문제에 봉착했다. 그때마다 아버지에게 연락해 조언을 구하면 항상 적절한 대책을 건네주셨다. 텃밭을 위해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이야기를 하며 함께한 시간이 부자 관계에 진실한 변화를 만들어냈다고 믿는다.


몇 주 전, 퇴근 후 책을 읽고 있었는데 마당에서 바스락 소리가 나서 깜짝 놀랐다. 처음에 고양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버지였다. 다음날 아침 순천에 약속이 있어 들른 것이었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10시까지 열려있는 투다리로 가서 닭꼬치에 맥주 한잔씩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증오라는 단어만이 수식 가능했던 아버지와의 관계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좋아졌다는 걸 몸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있었더라면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찾아오고 싶어도 부담돼서 못 왔을 것이다.


'사서 고생하는 건가?'생각들 정도로 힘들었던 텃밭 가꾸기는 삶의 또 다른 길을 열어주었다. 아버지를,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는 징후일까?     


이 글을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두 손에.


나의 자녀와 함께 보내는 오늘이 나의 날임을 아는 지혜를 주옵소서


이해(理解)라는 단어의  뜻을 풀어보면 다스릴 리, 풀 해이다. 어쩌면 아버지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요소들을 작게 풀어헤친 후, 그 일부(=농사)를 나의 몸으로 경험했기에 이해가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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