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여자의 인생 P(현재) 막 일상다반사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다들 그런 생각을 하며 진로를 고민하고 회사를 정하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살 것이다. 나 역시 돈을 적게 벌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것이라는 어리석은 결심으로 20대와 30대에는 나를 갈아가며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고 갈망했던 패션 디자이너로써의 삶을 위해서 다시 대학도 들어가고 아무리 박봉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일이 많더라도 아무리 인격모독적인 말을 듣더라도 꾸역꾸역 참고 견디며 나름 디자이너로써의 사회생활을 이어갔었다.
그러다가 별로 잘 나가지 않던 온라인브랜드 디자이너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디자이너로써는 취업을 할 수가 없었고 몇 달의 공백기로 빚은 쌓여갔고 어쩔 수 없이 디자이너가 아닌 프로모션회사의 디자인실로 취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너무 힘이 들었었다. 이제 더 이상 디자이너가 아니라는 자괴감에 영업이라는 생전 해보지도 않은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대표님의 격려가 없었다면 이 일을 이어가지 못했을 것 같다. 처음 영업을 가던 날 이제 내가 필드로 처음 나가는 날이라고 박수로 축해주시던 게 기억난다.
그렇게 회사가 소유한 브랜드가 아닌 다른 회사브랜드의 디자인을 제외한 모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엔 너무 힘들고 정말 회사 시스템이 별로라고 생각했었지만 그 후에 여러 회사를 거치다 보니 그나마 체계가 잘 갖춰진 회사였었고 그저 디자이너로써 이젠 살 수 없다는 생각에 항상 우울해하면서 일했던 것 같다. 물론 나를 괴롭히던 상사도 있었고 나를 지독히도 압박하던 거래처 브랜드의 디자이너도 있었지만 나를 믿어주던 거래처디자이너들 덕에 그나마 숨 쉬며 살 수 있었다. 그래도 너무 힘들었던 나는 당시 술에 빠져 살았고 점심때 밥을 먹지 못하던 환경 때문에 저녁에 몰아서 밥을 먹으면서 항상 술을 마셨고 급기야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술을 먹어야지 출근을 할 수 있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었다. 한 모금 마시던 술은 반캔에서 한 캔으로 늘어났고 어느 날 만취해서 회사 앞건물뒤에서 토를 하는 지경에 이르러서 아침에 술을 먹고 출근하던 행위를 멈출 수 있었다. 그래도 나름 회사 브랜드는 아니더라도 거래처에 디자인실이 없던 브랜드의 디자인을 할 수 있어서 조금은 숨통이 트였었지만 결국 새로운 거래처에 나를 너무 학대하던 디자이너 덕분에 결국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정말 소심하고 극내향형인 나로서는 누군가를 만나서 설득을 하는 행위 자체가 너무 힘들 수밖에 없었다. 이럴 거면 내가 보험영업을 했지 왜 디자이너가 되려고 그렇게 힘들게 살았었나 싶은 생각에 우울증은 극에 달했고 정신과 건강 모두 피폐해져 갔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어쩌면 디자인실에 다시 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력서를 내더라도 패션 디자인실에 이력서를 내게 되었다. 그러나 면접을 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나이가 많다, 월급을 깎으면 일하게 해 주겠다, 네임드 디자인실에서 일한게 아니라 채용이 어렵다 등등이었다. 이력서를 보고 면접제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따위 소리를 듣는 게 너무 힘들었지만 다 맞는 사실이라 반박을 할 순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르면 어김없이 돈에 압박과 대출의 한계에 다다르고 결국 제의가 오는 프로모션 회사에 면접을 보고 또 입사를 하는 악순환을 계속했었다.
항상 디자이너로써 다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그런지 프로모션에서 작게나마 있던 몇 아이템 디자인을 할 기회가 주어지면 정말 기쁘게 일했던 것 같다. 그렇게 조금씩 숨 쉬며 살다 마지막 프로모션 회사에서 퇴사를 하면서 결심을 했다. 이젠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그냥 프로모션직원으로 마인드로 바꿔서 회사를 구해야겠다 싶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나이에 다시 디자인실로 갈 수는 없었고 나를 뽑아주는 사람도 심지어 이제는 면접을 보자는 회사도 없었고 연락이 오는 건 모두 프로모션 회사들 뿐이었다.
이제 내 디자이너로써의 삶은 끝이다.
라는 깨달음이 들었고 디자인실이 아닌 프로모션 회사에만 입사 지원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본 지금 회사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지원을 하게 되었다. 디자인실에서 디자인을 할 수 있는 회사였고 그래도 생산을 어느 정도는 겸해서 해야 하는 어쩌면 저에 회사들보다는 좀 더 디자인업무가 많아 보이는 회사여서 지원을 했고 덜컥 합격을 해버렸다.
그래서 디자이너로써 포기했던 순간에 다시 디자이너로써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처음엔 정말 나에게 온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가 작고 환경이 별로인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디자인을 할 수 있는 회사라는 얘기에 그저 너무 기뻤던 것 같다.
그리고 출근한 첫날 실장은 내게 말했다. 디자이너는 필요 없다고 본인이 모든 디자인을 다 하니 본인은 생산을 관리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뭔가 관리를 잘해준다면 디자이너로써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가스라이팅이 다분한 얘기를 했다. 그래도 대외적으로는 디자이너고 대표 역시 시간이 흐른 후엔 내가 디자이기획을 맡을 기회도 줄 예정이니 열심히 하라는 말에 이 마지막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그러나 나에게 그런 행운 따윈 없었다. 첫날부터 실장의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인신공격적인 말은 매일 이어졌고 본인 마음에 조금이라도 들지 않으면 골방으로 따로 불러서 소리 지르기 일쑤였다. 연차가 어느 정도 찬 지금 상황에 갑자기 막내였을 때 당하던 일들을 당하다 보니 황당하기까지 했었다. 정말 목소리만 들어도 PTSD가 올 것 같던 즈음 퇴사를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정말 돈 때문에 결심을 하진 못하던 그때 옆팀에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옆팀 브랜드에 새로운 TO가 생겼고 나를 추천할 거라고 했다.
정말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간의 실랑이와 소란이 있은 후 나는 원래 있던 팀에서 쓰레기가 되면서 다른 팀으로 부서이동을 할 수 있었다.
처음엔 비난과 인신공격을 안 받으니 단순하게 너무 행복했다. 그러나 딱 일주일이 지나고부터 지옥이 시작 되었다. 팀에서는 나를 생각보다 반기지 않았고 실장을 제외하고 나에게 너무 호의적이던 이전팀과는 다르게 부하직원에게 일을 시키지도 못할 정도로 갈등이 시작되었고 겉도는 나를 당연히 좋게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대표까지 나의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이전팀과 다르게 디자인을 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힘이 들기만 했다. 일의 강도는 너무 높고 인원수도 적은 팀에서 생산에 디자인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되다 보니 매일 야근을 했고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병들어 갔다. 이전과는 또 다른 스트레스였고 급기야 내가 진짜 디자인을 하기를 원하는 게 맞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물리적인 시간이 없다 보니 결국 디자인을 모두 퇴근한 이후 야근을 하면서 해야 했고 주말에 몰아서 디자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이런상황이 생기더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쪽잠을 자면서까지 디자인을 했고 디자인을 할수 있음에 힘들어도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그렇게 바라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젠 더 이상 디자인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급이 적어도 사람이 별로여도 일이 힘들어도 야근을 해도 하고 싶던 디자인이 이젠 정말 나에게 너무 부담만 되었다. 조용히 디자인만 했던 디자인실이 아닌 기형적으로 생산을 하면서 디자인도 병행해야 하는 지금의 시스템은 이젠 내가 디자인이 싫어지게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그렇게 오랜 시간 바라던 일인데 이렇게 싫어지기까지 하게 된 것일까? 나이가 들어서 열정이 없어져서 그런 걸까? 내 디자인을 보고 기뻐해줄 아빠가 없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몇 년간 디자이너로써의 삶을 포기하고 살아서 그런 걸까?
원론적으로 나는 대체 무얼 하고 싶은 걸까?
아니 나는 뭘 하고 살아야 할까?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게 너무 싫어진 지금 다시금 인생의 출발점에 다시 서있는 기분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내 신념과 목표가 사라진 지금 회사를 퇴사하고 나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 그저 프로모션 회사를 다시 들어가서 다시금 우울하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게 맞는 걸까? 그렇다고 디자인도 하고 싶지 않은 지금 디자인실을 갈 수 있다고 해도 일을 할 순 없을 것 같다.
항상 목표를 가지고 원하는 바를 이루는 삶을 살기 위해 하루하루 참고 버텨온 나로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지금이 오히려 더 힘든 것 같다.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무얼 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아니 살아가는 게 맞는 걸까?
안 살아도 되는 걸까?
그냥 살지 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