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한 장 앞에서
끝에 남은 확신 / 곽의영
마지막 달력 한 장을 넘기지 못한 채 오래 바라본다. 한 해를 버티며 흔들리던 마음들이 종잇장 끝에서 대롱거리듯 남아 있다. 손끝으로 건드리면 곧 떨어질 것 같은 얇음 속에, 지난 시간들이 조용히 포개져 있다. 국화가 늦게 피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잠시 멈춘다. 때를 조금 놓쳐도 자기 계절을 찾으면 끝내 피어난다는 사실, 그 단순한 진실이 이상하게 오래 머문다. 그래서 나도 이달이 가기 전에 내 글에 작은 꽃 하나 피어났으면 한다. 화려하지 않아도, 누군가 보지 않아도, 스스로 피어 있어도 좋은 한 송이의 문장. 가을 들판을 바라본 기억이 떠오른다. 바람에 흔들리는 금빛이 넉넉함보다 따뜻함을 먼저 건네던 순간. 들판이 풍요로워서가 아니라, 그 흔들림이 마음의 빈자리를 채워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도 저 들판처럼 넓어질 수 있다면, 잃은 것보다 남은 것을 먼저 떠올릴 수 있을 텐데. 마지막 달력 한 장은 끝이 아니라 잠시 멈춰 서게 하는 조용한 경계처럼 느껴진다. 잘 왔다고 등을 가만히 쓸어주는 자리. 그 자리에서 한 번 숨을 고르면, 다시 시작할 용기가 아주 작게 피어난다. 새해가 온다고 해서 갑자기 모든 것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오늘 이 달력 한 장 앞에서만큼은 지나온 날들이 나를 조금은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작은 확신이 스며든다. 그 확신 하나면 올해도 충분히 잘 살아온 것이다.